목회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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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오랜만에 휴스턴서울교회 웹사이트를 방문해서 보다가 나눔터에서 눈길을 끄는 제목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미국 교회의 충격적인 모습”이라는 글이었는데, 그 내용을 읽어보다가 글을 쓰신 목자님과 그 글에 대해 답글을 다신 분들이 서로 생각을 나누며 아주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며칠 전 뉴욕에 있는 아들과 전화 통화를 하던 목자님이 우연히 아들이 다니는 한인 2세 중심 영어권 교회의 충격적인 모습을 전해 듣고 짤막하게 느낌을 적은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교회 목회자들이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시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자님은 시가를 물고 있는 목회자의 모습을 그려보니 순간 아찔하였지만 ‘역시 젊은 2세들은 어른들 세대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미소가 지어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군인이라면 무엇을 안 할 것인가에 집중하지 않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해서 훈련해야 하듯이, 올바른 신앙생활도 무엇을 안 하느냐보다, 무엇을 하며 살 것이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안 하는 것에 있어서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만큼 열심인 사람들이 없었고, 그들은 유대교 전통을 철저히 지키며 하나님과 유대교를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에게 책망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무엇을 안 하는 것만 있지,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님의 아들이 다니는 뉴욕 영어권 교회는 보수 교단에 속한 아주 건강한 교회로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잘 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글을 보신 영어회중 목사님과 전 담임이셨던 최영기 목사님이 답글을 다셨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좋지만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었습니다. 참 공감이 되었는데, 특히 최영기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 좋은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또 하나의 율법주의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주의는 겉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던 반면, 신약시대의 율법주의는 겉으로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 장’으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전 13:3)라고 하면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선행을 베풀고 자기희생을 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결국 율법주의냐 아니냐는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는가가 아니라 그 삶의 동기가 무엇인가가 결정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봉사하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반대로 전통교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그와 반대로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이웃을 돕고 자부심을 느낀다면, 하나님께는 그것이 또 하나의 율법주의가 될 수 있기에 경계해야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새로운 율법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먼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