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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5일 수요예배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0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61~8)

 

1.   사명을 깨우치는 질문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며 또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를 부르셨고, 그 외에도 예언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6장에서는 유다의 어두운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물으시는 10번째 질문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해야 하는지, 인생의 꿈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명은 하나님을 만날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인생은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면 내 인생을 향한 그분의 꿈과 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으로 들어왔습니다. 웃시야는 유다의 아홉 번째 왕으로서 아주 훌륭한 왕이었고, 유다 역사상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사울이나 다윗이나 솔로몬은 각각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는데,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이나 왕위에서 다스렸습니다. 그보다 더 오래 다스린 사람은 므낫세 밖에 없는데 그는 55년을 통치했습니다. 웃시야의 통치 기간 중에 경제가 번성했고,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외교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아주 강성한 왕국을 유지했습니다.

 

웃시야가 처음에는 신앙도 좋았는데, 너무 풍요롭고 성공만 하다 보니 교만해졌습니다. 우리도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넘어질 때 보면, 삶이 어렵고 실패할 때가 아니라 일이 잘 풀리고 잘나갈 때입니다.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제사 의식을 치르는 동안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분향을 자기가 직접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교만해지니까 하나님을 향한 영적 경외감이 사라지고 영적으로 둔감해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치셨고, 그 즉시 웃시야는 나병에 걸려서 별궁에 거하며 말년을 아주 비참하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시야 왕이 살아 있는 동안 유다는 안전했고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이 죽은 그 해에 북쪽으로는 앗수르가 쳐들어오고, 동쪽으로는 신흥 거대 제국 바벨론이 쳐들어온다는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사야와 웃시야는 친척이었다고 합니다. , 웃시야 왕과 친척이라는 좋은 배경에서 잘 살고 있었던 이사야가, 가문적으로,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 성전으로 기도하기 위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성전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왔을 때, 아픔과 슬픔 가운데 놓였을 때, 기도 제목이 있을 때 성전으로 나아가십시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며 주님을 만나는 것이 소망입니다. 고난도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자리를 찾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2.   사명자의 할 일, 예배와 거룩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1)

 

이사야가 보니까 주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웃시야가 죽은 것처럼, 아무리 강하고 오래 통치해도 세상의 왕은 결국 죽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아름다움은 한때입니다. 길어봐야 50여 년입니다. 김일성이 49년 동안 북한을 통치했고,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26세에 왕이 되어 현재 68년을 하고 있습니다(올해 94).

 

그러나 아무리 길게 통치해도 결국 죽으면 끝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보좌와 왕권이 있습니다. 영원무궁토록 권능으로 다스리시는 우리 주님의 보좌와 왕권입니다. 그러므로 온 우주의 왕이신 주님께 어떤 문제이든 들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을 재건하셨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8장 이후부터는 학사 에스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기초를 다지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각성하고 부흥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8:5-6, )

 

에스라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다 일어서서 아멘, 아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주님의 말씀을 갈망했고, 두 손 들고 화답하면서, 또 엎드려 기도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이방 신상을 다 제하면서 영적인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영적 부흥이 일어난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는 자리였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2-4)

 

천사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룹 천사이고 다른 하나는 스랍인데 세라핌입니다. 그 세라핌이 여기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위기 가운데 성전에 들어와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 안에는 떡상과 금 촛대와 휘장도 있었을 텐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 보았습니다.

 

요즘에는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다른 것만 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앞에 보이는 사람들, 강대상, 모니터, 기도자, 설교자, 성가대만 보고 갑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드리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위기는 죄가 드러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죄를 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며 화를 내거나 비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죄가 낱낱이 드러납니다. 이사야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5)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7)

 

스랍 천사들 중 하나가 부집게로 제단에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그렇게 하고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은 자갈입니다. 자갈 밑에 불을 피우면 달궈지는데, 그 당시에는 달궈진 자갈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태웠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갈에는 양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피 묻은 자갈, 대속의 자갈, 죄 씻음의 자갈이 이사야의 입에 닿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 씻음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죄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굳게 붙잡을 때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습니다. 아무리 험악한 죄라도 용서를 받습니다. 십자가가 죄보다 강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1:18)

 

 

3.  오늘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에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관계가 회복되니까, 이제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8a)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각자를 부르십니다. 그때 이사야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8b)

 

어떻게 이사야는 이처럼 즉각적으로 순종의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죄 사함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형식이나 습관이 아니고 체험입니다. 물론 체험이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뵙고 그분과 교제하는데 어떻게 체험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평안과 치유와 응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이 들릴 때 즉시 깨닫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하고 순종의 대답을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때인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처음으로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장부터 사명을 받아서 선지자로서 활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자기 마음대로 선지자 활동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받아서 나가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오늘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삶에 그날 누릴 수 있는 복을 내려주시고 동시에 그날 이루어야 할 사명도 주십니다. 오늘 내가 누린 복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내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주신 과거의 사명에 머물러 있습니까? 간증을 하자고 하면 10, 20년 이상 된 이야기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까? 과거에 나를 만나 주신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왕년에 대단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그때만 그리워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무슨 거창한 사명만 사명이 아닙니다. 오늘 주어진 작은 일도 사명입니다. 이렇게 수요예배에 참석하신 것도 사명이고 또 복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까? 이사야는 복음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그는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14)

 

하나님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53:5-6, )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700년 후에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선포하셨습니다. 6절에서 가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악 된 인생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미리 외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도 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령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신 하나님의 질문과 똑같습니다.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Missio Dei)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통합적인 역사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역사하심에 우리 인간이 동참하도록 초청하시는 신적 역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1)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성부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하신 것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그 보내심의 목적이 바로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선교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사실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기 위해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지 않지만 위험성이 있을 수 있는 인간의 협력을 선택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제자들을 동역자로 부르시고 지상 명령을 하신 부분에도 드러나 있습니다(28:18-20). 특별히 선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감당하는 선교라는 것이 나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사명대로 살아야지 내 뜻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계획대로, 내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슨 면목으로 대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전파하는 소명에 우리의 인생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130여 년 전, 부활절 아침에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2년 전인 1883년에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열린 신학교 연합 캠퍼스 부흥집회 때 앨버트 선교사님의 메시지를 통해서 원래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던 땅인 인도가 아니라 조선 땅에서 선교하기로 헌신을 결심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 자리에서, 조선의 문이 열리고 있는데 하나님이 누군가 조선 땅을 향해서 부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아멘, 아멘하는데 자신이 가겠다고 헌신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위해 다 헌신하겠다는데 왜 조선에는 가지 않으려고 할까? 가난과 질병과 많은 문제가 있다는 땅, 닫혀 있던 그 땅의 문을 하나님이 여셨는데 왜 아무도 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성령이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왜 조선으로 가지 못하느냐?”

 

주님의 질문에 언더우드는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바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아펜젤러와 같이 복음을 들고 이 땅을 밟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자들을 통해 복음의 열매가 맺힙니다.

 

언더우드에 앞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 중에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도 있습니다. 1866년에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는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6세의 나이에 아내가 열병으로 선교지에서 죽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선교지에 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조선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 토마스는 그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했고, 뉴제너럴셔먼 호를 타고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평양 감리사였던 박규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나와서 토마스 선교사가 탄 배를 불태웠습니다. 당시 그 사고로 많은 사람이 바다에 빠져서 익사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생사의 기로에서 한자로 된 성경을 들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비록 건짐 받았지만, 박춘권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목 베임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토마스 선교사의 헛된 것 같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놀라운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벤 박춘권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고, 당시 토마스 선교사의 성경책을 받아서 갔던 12세 최치량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간 최치량이 나중에 여관 사업을 했는데, 그 성경책을 여관 벽지로 쓰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여관이 나중에 널다리골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유명한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적인 헌신과 응답을 통해 시작된 놀라운 역사가 장대현교회로 연결되었고,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절망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4:35)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9:37-38)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 죄 사함의 은총을 받은 우리 모두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주님의 물음 앞에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결단하고 주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시는 외침을 듣고 도전받아 응답하며 나아가는 우리들을 통해 놀라운 복음의 열매를 맺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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