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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8일 수요예배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7 ✦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장 60~71절)
1. 내 신앙의 실체를 확인하는 질문
새해가 밝은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연말을 지내며 느슨해진 마음을 다시 조여서 새해에는 열매 맺는 삶이 되어야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명자로서 우리가 답해야 할 일곱 번째 영적 질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서 “너희도 가려느냐”(67)입니다.
이 질문에는 주님의 깊은 고뇌와 안타까운 마음과 진한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거부했으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잘 따르다 떠났기 때문에 마음이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잘 따라왔고, 믿음을 잘 지키는 것 같았으며, 예수님을 제대로 붙잡고 나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수님을 등지고 모두 각자의 길로 가 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왜 예수님을 따라오던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가진 신앙이라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참 신앙이 아니라, 자기 계획과 유익을 위한 이기적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일이 용납되지가 않았습니다.
이 일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생명의 떡”이라 하신 데서 시작됐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에 나오는 요한복음 6장 내용을 읽을 때 더 잘 이해가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5절)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1-42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1-52절)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3-58절, 새)
이 말씀에 대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0절)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는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로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를 때 나오는 축복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따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6장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으로 시작하는데, 그 사건 직후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고 열두 제자는 배를 태워 반대편으로 보내셨습니다. 다음 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몰라서 열심히 찾다가 드디어 만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요 6:26-27, 새)
이 말씀을 잘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찾으며 따른 것은 예수님 덕분에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이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한 것이 아니라,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한 것이었다는 사실도 지적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51-56).
그러나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세상에서 배불리 잘 먹고 잘 사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듣기 싫으니까 재미도 없고 이해도 안 갔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배를 부르게 해줄 것을 원했는데, 가만 보니까 그럴 것 같지가 않고 계속해서 따라가다가는 황당한 말만 듣고 고생할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니까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6절)
결국 그들은 세상의 것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에 주님 곁을 다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당장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과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또 돌짝밭에 뿌린 씨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하고,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마 13:20-21, 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도 베푸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이끄셨습니다.
남자 장정만 5천 명이 굶주렸을 때, 한 아이가 안드레를 통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먹고 배부르기에도 부족한 양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작은 헌신을 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나누어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예수님을 향해 열광하고 환호했습니다. ‘이 예수만 따라다니면 우리가 평생 굶을 일이 없겠다. 예수만 따라다니면 우리 인생은 성공할 수 있다. 예수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다. 예수를 왕으로 모시면 저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다. 왕으로 모시자!’라고 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예수님은 그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무리들을 뿌리치시고는 홀로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까? 왕으로 모시겠다는데 왜 그것을 거절하셨습니까? 사람들의 왕이 된다는 것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고, 그럼 좋은 게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유대인들의 왕이 되시는 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육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즉 세상의 떡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떡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좁은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3절)
신앙에는 육적인 신앙과 영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적인 크리스천이 있고 영적인 크리스천이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으로 적용해보면, 영적인 신앙생활은 생명의 길이고, 육적인 신앙생활은 무익한 길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육적인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고 믿음이 있는 것 같이 보이며, 주님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닌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육적인 크리스천이 따로 있고 영적인 크리스천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항상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늘 주님을 따르며 영적 신앙생활을 하지만, 어떤 때는 겉으로만 신앙인이지 실제로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며 나아가는 육적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육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정말로 주님을 붙들고 살면서 주님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종려주일의 배경이 되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열광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실 때 사람들은 겉옷을 다 펴서 길바닥에 펼쳐 놓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외쳤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 12:12-13)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당신은 참 구원자이십니다!”라는 찬양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일한 찬양과 동일한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니 인간적인 욕심이 숨어 있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원하고 자신이 바라는 메시아상, 구원자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 현실적 필요를 채워주는 메시아,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벗어나게 해줄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바꾸어보면 뭐가 됩니까? ‘내 삶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거나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주지 않는 메시아라면 필요 없다.’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열광하고 따르며 그분을 환영했던 사람들은 일주일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고 부르짖는 성난 군중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우리의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실제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약한 자들을 돌보시며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녀들과 어울리며 돌보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서 그런 일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해하고서 그 길로 가겠다고 결단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영적 신앙생활을 하는 영적 크리스천입니다.
2. 주님밖에 없다는 고백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한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하시니까 떠났습니다. 육적인 신앙생활만을 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7절)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너희도 내가 너희의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만을 원하느냐? 내가 육적인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 너희도 떠나겠느냐? 너희도 육적인 신앙생활만을 하겠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우리도 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68-69절)
베드로의 대답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밖에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과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따르며 신앙생활을 하는 육적인 크리스천이 아니라,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고, 능력이고, 구원자이신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저는 주님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 동안 교회에서 보면,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 어떤 사람은 이력서를 쓸 때 ‘취미’ 란에 ‘기독교’ 또는 ‘교회 가기’라고 적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다는 겁니다. 신앙이 그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액세서리 정도에 불과하고, 여러 취미생활 중 하나의 선택 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자기고 나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주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없이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이 없는 삶이 성공입니까? 심판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어디를 보시고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시겠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보시면서 ‘너는 네 안에 내 아들이 있구나. 천국!’ 또는 ‘너는 내 아들이 없구나. 저기 다른 데로 가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신가 안 계신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영생의 복은 오직 우리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우리 삶을 부요케 해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가 가난하지 않고 부유한 것,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 세상에서 성공을 누리는 것은 다 귀한 복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은혜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세상에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롬 5:6-8, 새)
내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든지 상관없이, 내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내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덜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나와 함께합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10, 새)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그 사랑에 감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잘 풀리고 환경이 좋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붙잡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고 상황이 힘들면 주님을 사랑하기를 멈추고 떠난다면 영적 크리스천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직 영생의 말씀이신 주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진정한 제자들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70-71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부한 무리들은 다 떠났고, 이제 12명의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그들 중 한 사람은 마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팔려고 작정한 가룟 유다의 마음은 마귀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곁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하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마귀를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마귀가 틈 타 욕심이 생기고 변질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라는 신분이 신앙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봅니다.
목사나 장로나 안수집사나 권사 같은 직분이나, 몇 십 년씩 교회에 다닌 신앙 연륜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정말 날마다 기도와 말씀 가운데 깨어 있어야만 참된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영생의 말씀에 매일 붙잡혀 내 삶을 통해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영생을 얻은 우리는 정욕과 욕심대로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무엇보다 그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
(요일 4:11-12, 새)
영생의 복음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다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떡을 떼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묵상하고 기억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기 인생을 다 드렸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영생의 주인이십니다. 저에게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내 모든 인생을 주님께서 책임져주시고 다스려 주십시오. 주의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기쁨이 되는 그 길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생명의 복음을 지키면서, 영원한 생명에 마음을 두고 한 번 주신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매일의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