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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25일 수요예배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1

평화를 위한 기도

(데살로니가후서 36~18)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사는 이 땅은 평화가 없는 땅입니다. 한국도 미국도 시끄럽습니다. 한국은 어느 장관 임명 때문에 한 달 이상 시끄럽고, 미국은 지금 대통령을 탄핵하니 마니 하면서 시끄럽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두 번도 아니고 지속적인 평화를 기대하며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불안함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불안해하는 자신과 이웃들을 바라보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영혼의 구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다르게 살 수 있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 땅의 백성들인데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우리가 무엇에서 다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고 누리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사도 바울이 살던 1세기 당시의 상황을 특징짓는 중요한 단어가 바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입니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통치하던 주전 27년부터 후대 황제들이 통치하던 주후 180년까지의 시기로, 로마제국의 강한 군사력으로 평화가 유지되며 큰 전쟁 없이 살아가던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까불지 못하게 힘으로 눌러서 평화를 유지했는데, 진짜 평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힘에 의해 평화가 유지되던 시대에 지배 계층에게는 활발한 상업을 통해서 번영을 누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해주었지만,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학대와 착취를 당하는 아주 불안한 세상이었습니다. 특히 로마에게 정복당한 나라들은 힘으로 눌려서 평화를 유지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진정한 평화이겠습니까? 그래서 외적으로는 평화의 질서가 있었는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여전히 불안한 가짜 평화가 팍스 로마나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진짜 평화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아주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키며 핍박을 해서 그곳을 금방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금방 떠나온 어린 교회의 초신자 서도들에게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이고 그 후 바로 또 쓴 편지가 후서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난지 얼마 안 되어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참된 평화의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진정한 평화의 길이 무엇입니까?

 

 

1. 다시 오실 평화의 주님을 기대하라

 

성경은 우리의 구주이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에 두 번 오실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기독교 교리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First coming)과 재림(Second coming)이라고 부릅니다. 즉 처음 오시고 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시간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 그분은 다시 오셔야만 합니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신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두 날을 예로 듭니다. 바로 ‘D-Day’‘V-Day’입니다. D-Day194466일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에 연합군이 상륙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날을 말합니다. 전세를 결정한 날이라고 해서 ‘D-Day’ ‘Decision Day’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날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D-day 이후 나치 독일은 완강하게 버텼고, 치열한 전투들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D-Day 이후로 전세는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연합군은 이미 승리한 전쟁을 싸우고 있었고, 나치 독일군은 이미 패배한 전쟁을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D-Day로부터 11개월이 지난 194558일에 나치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8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래서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194558일을 가리켜 승리의 날이라는 뜻으로 ‘V-day’ ‘Victory day’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연합군이 결정적 승기를 잡은 날과 최후 승리의 날 사이의 기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조직신학 교수님이 쓴 책에도 바로 이 ‘D-Day’‘V-Day’를 예로 들어 예수님의 구원을 설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우리의 승리가 결정된 D-Day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Peace with God)를 얻게 되었고, 그분의 선물인 내적 평화, 즉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날이 우리의 D-Day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날 이후 이 땅의 모든 영적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날마다 치열한 영적전쟁을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있고 새로운 평화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불완전한 평화를 누립니다.

 

그렇다면 언제 완벽한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이며, 바로 그날이 우리에게 V-Day입니다. 그날이 되면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온 우주가 완전한 질서를 얻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믿고 기다리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세상의 지도자라도 우리에게 완벽한 평화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미북 정상회담이나 한미 정상회담이나 남북 정상회담이 잘 되어서 그 나라의 정상들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고 재림의 소망을 가지게 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축복기도를 합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16-18)

 

참된 평화를 갈망한다면, 무엇보다 다시 오실 예수님만이 평화의 주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2. 모든 상황에서 평화를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라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평화의 주님이시라면, 그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참된 평화를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16절은 모든 때, 모든 곳에서의 평화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평화를 갈망하며 살아가는데, 평화의 주님은 우리에게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보편적 원인은 바로 인간관계의 갈등이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알려줍니다. 이런 인간관계의 갈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사이에도 당시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생활을 둘러싸고 불편한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갈등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15)

 

인생을 살다 보면 형제자매가 원수로 될 수도 있습니다. 성도끼리도 원수가 된 것처럼 싸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부 간에도 그렇습니다.

 

이전에 한참 유행하던 유머가 생각납니다. 어느 노부부가 단어 알아맞히기’ TV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한 사람이 그것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아맞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때 주어진 단어들 중 하나가 천생연분이었는데,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이 단어를 다른 짤막한 단어로 설명해야 했습니다.

 

할머니가 여러 가지로 시도해도 할아버지가 맞추지 못하니까 할머니가 당신과 나 사이라고 했고,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 알겠다. 웬수!”라고 했습니다. 당황한 할머니가 급하게 아니, 네 글자!”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답을 외쳤습니다. “평생 웬수!” (그 프로그램이 끝난 후 두분 사이가 진짜 평생 웬수가 되었다는 소문이...)

 

이처럼 언제든지 쉽게 깨질 수 있는 인간관계를 평화로 지킬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평화의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때, 모든 곳에서 평강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가능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주님의 임재가 답입니다. 그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13:26)

 

예수님은 선생인 자신을 팔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는 가룟 유다에게 오히려 떡 조각을 건네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23:34-37)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 십자가 죽음 후에 누가 그 옷을 가질 것인지 내기하던 병사들, 비웃는 관리들과 희롱하는 군인들을 보시며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이 사랑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때마다 일마다 평강의 주님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3세기 이집트 사막 교부들(Desert Fathers)은 순간순간의 숨기도’(Breath Prayer)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하고 가르칩니다. 우리도 매일의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 시시때때로 깊은 숨을 쉬는 기도 시간을 내어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3. 주님 안에서 날마다 조용히 일하고 안식하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점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중에서 예수님의 재림 교리를 비상식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곧 재림하실 테니까 일상적인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은 무의미하며, 따라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회에 삶을 의탁하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 그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6)

 

그들을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7)

 

또한 그들은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1)

 

그리고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뭐라고 명령합니까?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0)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2)

 

그런 자들을 보면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고 하고,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12) 하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참된 종말론적 삶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하면서 광신적으로 이웃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며 여유 있는 안식으로 일상을 마무리할 줄 아는 진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전부터 우리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는 말씀만 강조해 왔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지난 산업화 시대의 필요에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안식의 중요성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일과 안식의 균형은 창세기 1-2장부터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엿새를 일하고 제 칠일에 쉬시면서 동일한 삶의 모범을 십계명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매년 발행하는 <트렌드 코리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난 <트렌트 코리아 2018>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새로운 세대는 워라밸 세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워라밸을 들어보셨습니까? 사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콩글리시단어인데, ‘워크즉 일이고, ‘라이프즉 삶이며, ‘밸런스즉 균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개념은 오래전부터 성경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서구에서 강조되던 가치관이었는데, 한국 사회는 뒤늦게 그 중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워라밸의 회복과 함께 <트렌드 코리아 2018> 책이 제시한 또 하나의 주제는 소확행입니다. ‘작을 소’, ‘확실할 확’, ‘행복 행입니다. 그러니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자는 것입니다. <트렌트 코리아> 책의 공동저자들은 소확행개념이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에 등장한 신조어라고 소개합니다.

 

갓 구워낸 버터 향 나는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행복,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놓은 속옷을 만지고 입어보는 촉감의 행복, 집 근처 카페에서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행복 같은 것을 말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새벽기도 끝나고 방으로 가서 사과 하나를 꺼내어 한 입을 사각 베어 먹는 소확행을 누리고 있습니다.

 

요컨대 소확행이라는 개념은 미래에서 지금으로, 그리고 특별함에서 평범함으로, 한 번의 강력한 자극이 아니라 수시로 되풀이되는 소소함의 행복을 찾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행복이 아닌가 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십시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6:26, 31, 34, 새번역)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4:6-7)

 

무엇보다 우리 주님 앞에 바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도 단지요? 내 입에는 꿀보다 더 답니다.” (119:103, )

 

주 안에서 날마다 열심히 그리고 조용히 일하고, 일을 마무리한 후에는 안식을 즐거워하는 참 행복을 되찾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앞에 나와 조용히 엎드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나아갈 때, ‘소확행을 넘어 대확행’(크고 확실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참된 평화입니다.

 

그렇게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그것을 나누어주는 평화의 도구로서의 삶, 복의 통로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결단의 기도

1)  다시 오실 주님께서 완벽한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주님을 기다리도록 기도

2)  주님은 모든 상황에서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우리 삶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

3)  매일의 삶에서 조용히 일하고 안식하며 참 행복과 평화를 누리도록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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