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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8일 수요예배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0 ✦
“큰 환난 중에서의 기도”
(고린도후서 1장 3~11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이나 공동체나 예외 없이 고난 혹은 환난을 통과하게 됩니다. 때로는 평범한 고난이나 환난이 아니라 아주 큰 고난이나 큰 환난 또는 큰 사망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겸손의 골짜기’를 지나며 아볼루온이라는 파괴자를 만나 치열한 영적전쟁을 치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까스로 자신을 지키며 그 골짜기를 벗어나나 했지만, 또 다시 크리스천은 더 큰 고난, 더 큰 환난, 더 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게 됩니다.
우리도 때로는 그런 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때가 있습니다. 사실 교회 전체, 지역사회나 도시 전체, 또는 나라와 민족 전체가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달리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반도에 위치해서 대륙과 섬 사이에 있기 때문에, 섬에서 공격해오는 사람들과 대륙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다 알 듯이 조선의 선조 시절에는 임진왜란(1592-1598)으로 왜국에게 침략을 받아 6년 이상 온 나라가 파괴되고 고통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우리 조상들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38년 후인 1636년 인조 때 청나라의 침략을 받아 불과 59일 만에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습니다. 백성 6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수치를 당했고, 특히 그 중에는 왕자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임진왜란보다 더 수치스러운 역사적 사건이 병자호란입니다. 병자호란 전에는 나중에 청나라가 되는 후금에 의해 공격을 받은 정묘호란도 있었습니다.
청나라의 황제 앞에 임금인 인조가 항복했는데, 인조는 책에 기록하라고 하면서 그래도 체면을 세우기 위해 항복했다고 하지 말고 ‘하성’했다고 쓰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도 나왔습니다. 조선에서 가장 무능한 왕이 인조와 선조였습니다. 그런데 항복할 때 청나라 황제가 앉아 있는 앞에서 세 번 무릎 꿇고 절하며 머리를 땅에 쾅쾅 부딪치는 항복 행위를 하며 굴욕을 당했습니다. 세 번도 청나라가 많이 봐준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전쟁이 난 그 난리 통에도 조정대신들은 계속 싸웠다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싸웠습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죽고 나라가 점령당하는 순간에도 싸웠다는 것입니다. 너무 안타깝고도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미국의 훌륭한 점이 뭔가 하면, 평소에는 서로 갈려 싸우다가 나라의 위기 상황만 되면 하나가 됩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그 다음에 또 싸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조상들은 위기 속에 있는데도 싸웠습니다.
그래도 조공을 바치면서라도 국가의 자주권만은 유지하던 조선이 아예 국가의 자주권을 잃어버리고, 나라와 언어와 이름까지 모두 빼앗겨버린 일이 일어났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일제에게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이후로 우리나라에는 조선총독부가 주둔했고, 우리 민족은 식민지 백성이 되어 35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 시기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큰 환난의 때였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제가 침략의 마수를 뻗쳐오던 바로 그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조선 땅에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한 우리나라 백성들은 나라를 잃은 최대의 환난 속에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큰 환난을 당했을 때 믿음의 길을 열어주셔서 믿게 되었고,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으며, 환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큰 환난의 밤 속에서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1. 건져주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사도 바울이 주후 60년경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 말합니다. 고린도전서는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머물던 기간에 고린도의 신도 대표들 몇 명이 와서 여러 신앙의 질문들을 했을 때 거기에 답을 준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그 후에 디도를 고린도로 보낸 다음 기다릴 수가 없어서 드로아로 갔다가, 거기서 디도를 못 만났기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빌립보에서 쓴 편지라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8절)
그것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큰 사망의 경험이었습니다. 바울이 이것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선동을 하여 소요가 일어나 어려움을 당한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그 후에 또 다른 죽음의 위협을 당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혹시라도 자기가 고난을 과장해서 동정심을 유도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전혀 받지 않기 위해서, 그가 의도적으로 자세한 상황 묘사를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환난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큰 환난의 밤을 통과한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0절)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크고 작은 사망을 연습하며 살아가다가, 결국은 오게 될 죽음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다윗은 그러한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것은 ‘사망의 그림자의 골짜기’(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인데,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에 닥쳐오는 모든 위기가 바로 그런 ‘사망의 그림자’입니다.
심한 질병을 앓게 될 때,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 심리적인 공황상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망의 그림자를 느낍니다. 또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질 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이혼 같은 일이 벌어질 때도 우리는 사망의 그림자를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런 사망의 그림자들로부터 건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를 건지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육체적 또는 심리적 구원의 작은 체험들입니다. 바울도 이런 구출과 건져주심의 체험을 통해서 기도의 소중함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굳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나온 시간에 자기를 이런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현재의 사망에서도 건지실 것이며, 미래의 사망에서도 건지실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과거의 체험이 작은 사망의 그림자에서 건져주신 것이었다 하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도로 체험한 사람은 바로 오늘 내 앞에 닥쳐온 사망의 그림자가 큰 환난이라 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리 크고 무서워도 그림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자기가 급하게 뭘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건져주시는 손길이 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교회가 독립을 위해 기도한 흔적들은 역사 자료 속에 차고 넘칩니다. 그 시절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모일 때마다 누추한 예배당 바닥을 눈물로 적시며 나라의 해방을 위해, 독립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민족에게는 35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기울던 어느 날 저녁 석양이 지던 때에, 자신의 조국 유다를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길 기도하며 하박국 선지자는 절규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합 1:2-4)
악한 민족인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며 하박국 선지자는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외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러한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3-4)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갈라진 남북한이 평화롭게 통일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1945년 해방된 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져서 벌써 74년 이상 분단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답답하지만 우리도 “언제까지니이까?”라며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셨던 말씀과 같이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합 2:3, 새)
우리가 보기에는 급한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분명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이루어지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지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정확한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끔찍하게 사랑하며 이 땅을 위해 중보하셨던 예수원의 고(故) 대천덕 신부님이 계신데, 성공회 신부이셨습니다. 한국에서 오래 사역한 그분에게 누군가가 질문했습니다. “남북한의 통일이 언제쯤 되리라고 예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늘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우리 중보기도의 잔이 차면, 그날이 통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큰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다윗처럼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병에 우리의 눈물이 차기를 기다리며 주님의 건져주심을 위해 우리가 기도해야겠습니다.
민족뿐만 아니라 교회도, 가정도, 목장도, 개인도 큰 환난의 밤을 지날 수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직장이나 사업 면에서, 진로 면에서, 건강 면에서, 관계 면에서, 가정에서, 사역 면에서, 큰 환난의 밤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를 건져주신 주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 더더욱 기도를 쉬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나 혼자 기도가 안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기도를 부탁하는 겁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실 사역이 중요하고, 그래서 목장 사역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2. 기도 가운데 위로의 교제를 나누라
큰 환난 중에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함께 위로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진정으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4절)
큰 환난의 밤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물론 사람의 위로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겠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그래서 이 위로를 경험하게 되면 기도 중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상황 가운데 우리에게 위로를 주실 수 있는 모든 자비의 하나님,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때로 우리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나님만이 아시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을 허용하기도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거기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때에도 반드시 고난과 함께 위로를 넘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5절)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는 교회를 통해 이런 놀라운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울며 기도했고, 교회에서 독립운동의 꿈을 꾸었고, 우리의 언어를 지켰습니다. 실제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환난 중에 위로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환난을 허락하신 이유를 발견하게 해주십니다. 4절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보십시오.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4절, 새)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는 가운데도 바울은 환난 중에 위로를 받아서 환난을 당하는 지체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고난, 더 큰 환난 중에 있는 지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상처를 받았지만, 나보다 더 큰 상처를 입었거나 최소한 비슷한 상처를 입은 형제자매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영성학자였고 많은 책을 써서 한국어로도 많이 번역된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책을 썼는데 책 제목이 바로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입니다. 자기도 상처를 받았지만 남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교제입니다. 환난의 밤에 나눌 수 있는 위로의 교제야말로 크리스천으로서의 특권입니다.
미국의 코미디언 중에 밥 호프(Bob Hope)란 분이 있습니다. 지난 2003년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한창 활동할 때 군대에 수많은 위로공연을 갔습니다. 그가 한 번은 월남전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수용한 병원을 방문해 위로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 공연 무대에서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준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공연하는 무대 맨 앞줄에 군인 두 사람이 앉아 박수를 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은 오른팔이 없고 또 한 사람은 왼팔이 없었습니다. 그 두 사람이 각각 자기에게 남은 오른손과 왼손을 사용하여 두 사람이 서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위로의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다 부상을 당하고 힘들게 살며 세상에서 지치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깨어진 존재들이지만,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줄 수 있고 남아 있는 것을 사용하여 같이 박수를 쳐주는 것이 위로의 교제입니다.
3. 하나님만 의지하라
우리가 환난 중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9절)
종종 인생에서 거의 죽음에 가까운 일을 경험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럴 때도 죽음을 두려워 말라고 가르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교통사고를 한 번 당해보면 ‘아, 이게 죽는 건가?’할 때가 있습니다. 비행기를 탈 때 우르르 쾅쾅 하면서 번개가 치고 비행기가 갑자기 확 떨어질 때, 또는 이전에 제가 경험한 것처럼 잘 가다가 뻥 하는 소리가 나면서 엔진에서 연기가 났을 때 ‘이게 죽는 건가?’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럴 때도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때는 우리의 자아가 죽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자아가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그 죽음의 자리가 부활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
부활이 있으려면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세례의 의미가 아닙니까?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 서 있는 그때야말로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고 부활의 주님을 의지해야 할 때입니다.
제 할머니 세대가 좋아하셨던 찬송가가 있는데 “천부여 의지 없어서”입니다. 처음 이 찬송의 곡은 애국가로도 불렸습니다. 초기부터 부흥회 최고의 은혜 찬양으로 많이 불렸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당시 믿을 나라도 없고 믿을 지도자도 없던 그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고 고백하며 노래하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주님은 민족적 환난의 큰 풍랑을 만난 우리가 다만 주님 한 분만을 간절히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크리스천들이 소수였지만 나라에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런 교회였습니다.
‘거지왕자’ 이야기를 아실 텐데, 약간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지 소년이 왕궁에 들어가 왕자로 살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자기가 의지하며 살아가던 깡통과 담요와 수저 같은 것들을 다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거지소년은 지금까지 자신의 생존 도구이던 깡통과 담요와 수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왕으로부터 ‘이제 나의 아들이 되어라’ 하는 초대를 받고도 궁궐에 들어가 왕의 품에 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모두가 옛사람에 속한 것을 버리지 않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내려놓지 못한다면, 포기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억지로라도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환난입니다. 항상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환난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하시고, 그 환난 속에서 포기할 것을 포기하게 하시고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게 해주십니다.
그럴 때 선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환난 당하고서야 비로소 포기하고 내려놓겠는가, 아니면 왕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기꺼이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고 또 포기할 것을 포기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바로 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붙드심, 그분의 위로, 그분의 능력을 새롭게 체험하며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결단의 기도
1) 우리가 직면한 큰 환난에서 건져주시길 기도 (개인적으로/공동체적으로)
2) 큰 환난 중에서도 진실한 위로의 교제가 나누어지도록 기도
3) 환난 중에 더 이상 자신이 아닌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