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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일 수요예배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2

거룩을 위한 기도

(데살로니가전서 523~28)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에서 오랫동안 찬송가 1장으로 불린 곡은 <만복의 근원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초기의 초대 찬송가에서 한동안 1장으로 불렸던 찬송은 지금 8장이 된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입니다.

 

이 찬송가의 작사자는 영국 국교회(성공회) 목사인 레지널드 히버(Reginald Heber)라는 분입니다. 1823년 인도 캘커타 교구의 책임자로 인도 교회를 섬기던 그는, 예배가 끝난 후 인도의 무더위를 식히려고 수영장에 들어갔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43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 후 히버 목사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의 아내는 그가 평소에 적어놓았던 아름다운 찬송 시들을 발견하여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1861,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였던 존 다익스(John B. Dykes)는 마침 삼위일체 주일에 하나님을 찬양할 예배시를 찾다가 히버 목사의 찬송시에 감동을 받았고, 유명한 니케아 신앙고백 후 성도들이 함께 부를 찬송가로 작곡하게 되었습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은 아마도 모든 개신교단에서 시대와 교파를 초월하여 가장 많이 불리는 예배 찬송들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히버 목사는 영국에서나 인도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거룩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이 찬송시를 지었던 것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님

성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거룩 거룩 거룩 주의 보좌 앞에

모든 성도 면류관을 벗어드리네

천군천사 모두 주께 굴복하니

영원히 위에 계신 주로다

 

이 찬송가의 가사는 이사야 6장과 요한계시록 4장에 근거한 시입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젊은 선지자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성전에 들어갔다가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뵙게 됩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6:2-3)

 

한편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다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과 함께 보좌 앞에 서게 되었는데, 역시 여섯 날개를 지닌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4:8)

 

이사야와 요한계시록 사이에는 700년 이상, 거의 800년 가까이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와 사도 요한이 똑같은 천사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날개가 여섯인데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던 천사들입니다. 그들이 모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고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찬송가 8장은 이런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만든 위대한 예배 찬송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동시에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고자 하는 성도들의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거룩에의 갈망을 담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거룩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기대인 거룩

 

사도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거룩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 4:2-3)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대를 말하는 경우인데, 아주 드물게 사용됩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 (6:39-40, )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뜻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같은 차원의 중요성을 가지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누리게 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평생 가장 중요한 숙제로 해야 할 일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3)

 

이 구절을 보면, 우리 존재는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따라 기독교 구원론의 교리도 세 가지 단계 또는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Justification)의 단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의 구원이며 받은 구원입니다.

 

둘째 단계를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을 닮아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정의=인격)의 구원이며 받는 구원입니다.

 

그것이 완성된 셋째 단계를 영화(Glorification)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구원이며 받을 구원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약속하고 있습니까?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4)

 

그런데 같은 맥락의 말씀을 베드로는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5-16)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중에 가장 중요한 부르심이 바로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이젠 내 맘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가 아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되었다는 것이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평생을 통한 끊임없는 과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기대가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때를 암시해주면서 그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23)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마침내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평생 노력해야 하는 과제가 바로 이 거룩 또는 성화의 과제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수시로 우리는 그런 주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실패와 넘어짐을 반복하지만, 그럴 때도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일어나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2.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거룩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이라고 쓴 것은 인간의 존재를 삼분법으로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너의 존재 전체가 거룩해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은 우리의 영적 영역, 혼적 영역, 심지어 신체적 영역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거룩이라고 하면 영적인 영역만 생각할 수 있는데, 혼과 몸도 거룩해야 합니다. ‘은 우리의 지정의즉 지적인 부분, 감정적인 부분, 의지적인 부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인격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의지적으로 원하는 것이 혼이고 인격인데, 바로 이 부분에 있어서도 우리는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도 거룩해야 하고, 느끼는 것도 거룩해야 하고, 원하는 것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된 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것, 세상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의지를 보면,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거룩하게 생각하는가, 거룩한 감정을 갖고 있는가, 거룩한 의지를 갖고 있는가를 보면, 부끄러움 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에 있어서도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거룩한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열쇠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소속통치입니다.

 

먼저, 거룩한 삶은 내가 누구에게 소속되었는지를 알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 소속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다른 데 소속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님 소속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그분에게 소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영어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I believe in Jesus.”라고 하는데, “I belong to Jesus.”가 같은 말입니다.

 

거룩을 향한 첫 번째 열쇠는 소속을 확실히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열쇠는 통치입니다. 나 자신이 주님께 속해 있음을 안다면, 내 삶의 모든 영역,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분의 지배와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가(Who am I)?’를 제대로 알기 원한다면, ‘내가 누구의 것인가(Whose am I?)’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기꺼이 하나님을 매순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또한 인격의 영역, 즉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것들이 다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까? 또 내가 몸으로 하는 모든 활동도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고 있습니까?

 

소위 영적인 생활, 즉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하는 것은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다고 하고, 나머지, 즉 지적인 생각인 감정적인 것이나 의지적인 것이나 몸으로 하는 운동이나 취미활동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는 건 아닙니까?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들도 그분의 뜻 안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형성되고 있습니까? 좋아하는 사람은 만나고 싫어하는 사람은 잘라버리는 건 아닙니까? 내 가정에서 결정되는 모든 일들, 즉 어떤 활동을 하고 휴가를 가고 아이들이 뭘 하는 것도 다 주님의 다스림에 따라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까? 그런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이 강조한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보시고, 문맥을 생각하며 다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살전 4:3-4)

 

이 문맥에서의 거룩함은 부부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함은 부부의 성적인 신실함으로도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주신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아내와의 진실한 언약을 지켜 나가는 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세기 당시에는(물론 그 전과 후에도 그랬지만), 남자들이 결혼 따로 연애 따로 하는 성적 타락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제사를 할 때는 구약 시대 때부터 여사제들이 성관계를 하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해서 아내와 살면서도 그런 데 가서 그런 짓을 하는 성적 타락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것은 거룩한 삶이 아니다.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자기 아내를 대할 줄 알아야 한다.’ 하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세상의 그런 기준으로 살던 데살로니가 성도들,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데살로니가의 초신자들에게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아내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겨라,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라고 가르칩니다.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기대하시는 대로 신실함을 지키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한 거룩

 

그런데 거룩이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나 영성가들에게 두 가지 극단적 입장이 있습니다. 한 극단은,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사실이지만, 거룩하게 사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며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극단은,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거룩함의 과정인 성화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는 두 번째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물론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그것도 하나님이 해주셨다는 은혜를 조금 더 강조합니다. 반면, 감리교는 첫 번째에 더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우리 삶에서 우리의 의지적인 결단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며 인간의 노력을 조금 더 강조하는 편입니다.

 

물론 받은 구원’(영의 구원 = 칭의)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 어떻게 우리가 우리 힘으로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받는 구원’(혼의 구원 = 성화의 과정)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고 주님만 바라보면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은혜에는 언제나 책임 있는 우리의 믿음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8)

 

이것은 흔히 어느 편지에도 쓰는 마지막 축복기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은혜의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는 동시에 그것을 붙들기를 원하는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축복기도입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있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놓치지 말고 붙들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은, 바울이 23절에서 거룩을 이야기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이나 거룩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평강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평강(평화) 즉 히브리어로 샬롬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거룩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짐이 없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세워져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것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어떻게 거룩해지겠습니까?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이 일을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 (24, )

 

이것은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전하는 거룩한 일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도를 부탁합니다.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5)

 

기도를 부탁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초신자입니다. 믿은 지 몇 달 안 되는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이 편지를 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면서 초신자이지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렸으니까 그냥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말씀도 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2:13, )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거룩의 소원(염원)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응답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의 기회를 주실 때 믿음의 반응을 해야 합니다.

 

간증집회 때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하나님께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과수원에 우리를 데려가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과일을 따서 먹으면 됩니다. 따서 먹으면 되는데, 다 데려가주셨는데도 안 따고 가만히 있으면 못 먹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복음주의 영성가익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게리 토마스(Gary Thomas)가 있습니다. 책도 많이 썼는데, 자신의 책 중에 <일상 영성>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하루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가게 되었는데, 그 몇 시간을 활용하여 기내에서 책을 쓰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은 자기 좌석이 가운데였습니다. 가운데 자리는 책을 읽기도, 무엇인가를 쓰기도 불편하기 때문에 좌석을 바꾸어보려 했지만, 꽉 찼는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난감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보니 그의 왼쪽에는 거구의 남자가 앉았고, 오른쪽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았습니다. 그런데 안전벨트를 매기 전부터 옆에 있는 할머니가 말을 걸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주저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으며 하고 대답하자 할머니는 미안해요. 책을 읽으시려고 했군요.”라고 했습니다. 게리 토마스는 웃으면서 정중한 태도로 아닙니다. 괜찮아요. 말씀하세요.”라고 하자, 할머니는 내가 주책이지. 15년 전 남편이 죽고 나서 내가 대화에 굶주려 있었나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게리 토마스의 마음속에 주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친구가 필요해서 내가 오늘 너를 여기 앉힌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치우고 기분 좋게 몇 시간 동안 이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이 오히려 그 순간 자신을 성화의 자리로 이끌어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책에서 고백합니다.

 

그날 게리 토마스는 이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주신 작은 은혜의 기회 앞에 응답을 한 것이고, 거기서 자기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이 놀랍도록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서부에서 동부까지 가려면 다섯 시간 이상 걸리는데, 원래 계획했던 책 쓰는 일은 못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책을 쓰지도 읽지도 못했지만, 대화에 굶주려 있고 너무 외로웠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화를 하면서 그 외로운 마음을 만져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접고 그 영혼을 섬기는 일, 하나님이 원하셨던 그 일을 했을 때 오히려 자기 내면이 새로워지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주시는 은혜의 기회 앞에 믿음으로 신실하게 응답할 때 그분의 거룩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날마다 거룩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매일 주고 계신데, 저도 역시 비행기 타면 무시하고 제 할 일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옆 사람이 뭐라고 말하려 하면 오케이, 오케이하며 그냥 할 일을 빨리 하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어쩌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음으로 잡고, 나는 하기 싫은데 하나님이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하게 하실 때 내가 변화되며 거룩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잡고 나가 거룩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어제 하나님께서 어떤 거룩의 기회를 주셨습니까? 그것을 잘 붙잡고 거룩을 이루는 계기로 삼았습니까, 아니면 그냥 놓쳐버렸습니까? 바로 오늘은 하나님께서 어떤 거룩의 기회를 주고 계십니까? 그것을 우리가 놓칠 것인가 아니면 붙들 것인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놓치지 말고 붙들면서 믿음으로 응답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일도 거룩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거룩의 기회는 사람을 통해 옵니다. 특히 내가 귀찮아 할 만한 상황에서 옵니다. 귀찮아 할 만한 상황이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의 기회인데, 귀찮다고 거부하며 놓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빚으시려는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붙잡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 주시는 거룩의 은혜를 놓치지 않고 매일 잡으며 나아감으로써, 평생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가며 주님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단의 기도

1)  하나님의 가장 큰 기대인 거룩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영적, 혼적, 신체적)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

2)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매일 기회를 주시는 거룩의 은혜를 놓치지 않고 붙들 수 있는 영적 민감성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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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소망을 위한 기도" (롬 15:7-13)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4 (10/23/19) kpccoh 2019.10.24 1529
222 "가치 있는 인생을 향한 기도" (골 1:3-12)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3 (10/09/19) kpccoh 2019.10.10 863
» "거룩을 위한 기도" (살전 5:23-28)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2 (10/02/19) kpccoh 2019.10.03 2038
220 "평화를 위한 기도" (데후 3:6-18)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1 (9/25/19) kpccoh 2019.09.26 504
219 "큰 환난 중에서의 기도" (고후 1:3-11)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0 (9/18/19) kpccoh 2019.09.19 1145
218 "제일가는 믿음: 백부장의 믿음" (마 8장:5-10절) - 간증설교 (5/11/19) - 박명효 장로 kpccoh 2019.09.12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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