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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7일 수요예배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3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장 13~18절)
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이 있다면 바로 “예수는 누구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분을 경배하며, 우리 삶을 그분께 드립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훈련을 시킬 필요를 느끼셔서, 그들을 데리고 갈릴리 북부 산지 쪽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3-14절)
제자들이 알려준 내용은 모두 좋은 대답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언급한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보통 사람과는 굉장히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뭐라고 선포했습니까?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 3:1-2)
세례 요한은 이렇게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광야에서 외쳤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드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서, 회개하며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원래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될 때, 즉 개종할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말은 ‘너희는 유대인이 아니다. 너희는 가짜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러니까 빨리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제대로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라.’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도 세례 요한과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 4:17)
이렇게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가운데 세례 요한과 같이 구별된 삶을 사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또 위대한 선지자였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혼자 싸워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습니다. 또한 그는 에녹에 이어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엘리야가 살아서 이 땅에 다시 온 것이 아니냐며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애통하는 마음과 열정, 그리고 시대적인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레미야가 아닌가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그런 위대한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십니다.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들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예수를 위대한 성자, 4대 성인 중 한 사람, 위대한 철학가, 위대한 교육자, 위대한 인권운동가, 위대한 최고경영자 등으로 고백합니다.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2. 복된 성도의 비결은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결정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5-16절)
‘그리스도’란 헬라어로 ‘크리스토스’, 즉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그리스도가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기름 부음 받은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부터 계속해서 “내가 친히 기름 부은 메시아를 보내겠다. 그는 세상 모든 죄를 담당할 구세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위대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자기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시며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은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물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구분되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그 본성이 동일하며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여기서 “살아 계신”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 인간의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놀랍고도 복된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칭찬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7절)
‘바요나’에서 ‘바’(정확하게는 ‘바르’)는 아람어 방언으로 ‘아들’이라는 뜻이니까, ‘요나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셨던 유월절에 같이 잡혀 있던 사람이 강도 바라바인데, 그의 이름이 정확히는 ‘바르아바’, 즉 ‘아바(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는데, 요나의 헬라식 이름이 요한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복 있는(받은) 사람입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성공해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며 믿는 성도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8절)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뜻입니다. ‘베드로야, 네 인생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부족하고, 연약하다. 나는 네가 앞으로 나를 부인할 것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너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별명을 주셨는데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헬라어로 ‘페트로스(Petros)’라는 남성명사이며, 이어서 말씀하신 “이 반석”은 ‘페트라(Petra)’라는 여성명사입니다. 일부러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반석’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그 믿음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공격해온다 할지라도 이기지 못합니다. ‘음부의 권세’란 ‘하데스의 문’ 즉 지옥의 권세, 죽음의 권세, 사탄의 세력을 뜻합니다. 아무리 사탄의 세력이 강해 보여도 결코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결코 인간의 조직이 아니며 주님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세상의 단체나 기업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 값으로 친히 세우시고 주인 되신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올바른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당연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고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실 때, “주님은 성인 중 한 분이십니다.”라고밖에 고백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리스도,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3. 세상 한복판에서 하는 신앙고백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어디서 하셨냐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인데(13),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한 마게도니아의 도시로 빌립보가 있고, 또 바울이 나중에 갇혀 있던 곳이 총독이 있던 가이사랴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빌립보와 가이사랴가 둘 다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도시입니까?
이곳은 대표적인 우상 숭배의 장소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손자 ‘판’(Pan)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곳이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는 ‘판의 도시’라는 뜻으로 ‘파네아스’(Paneas)라고 불렸습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바알 신을 섬기는 수많은 신상들과 신전들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알 신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기 때문에 제사의식이 아주 음란하고 세속적이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보면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대왕의 셋째 아들인 헤롯 빌립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서 로마 황제의 신상을 세워놓고 자기 이름과 가이사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지명을 붙였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바알 신과 판이라는 헬라 신을 숭배하는 곳, 음란함이 가득한 곳,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신상들이 놓인 장소, 엄청나게 화려하고 웅장한 곳에서 떠돌이 랍비의 초라한 행색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잘 차려 입고서 어디 거룩하고 경건한 곳에 가서 그런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속문화의 첨단을 달리며 음란한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던 곳, 그리고 웅장한 우상 신전들이 가득한 곳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신앙고백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중에, 믿는 성도들 가운데 드려지는 신앙고백이 아주 중요합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뿐 아니라, 이 세상 한복판에서 그 대답을 하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의 인생에서 나는 누구냐?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이 가득하고, 하나님보다 돈, 자녀, 좋은 학교, 사회적 위치, 건강, 인간관계, 여가 활동 등의 세상 것들을 더 우선시하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세상은 빌립보 가이사랴와 똑같습니다. 여러 가지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우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서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교회 안에서도 이 질문에 답을 해야겠지만, 밖에서 살아갈 때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백을 지금 듣기 원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말씀, 기도, 예배, 크리스천의 모임에서만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라, 내 삶의 한복판에서도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은 왕, 선지자,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왕이시고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시라는 말입니다.
먼저, 왕은 다스리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은 ‘내 삶을 누가 다스리느냐’입니다. 누가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 나로 하여금 열심히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다스리십니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둘째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셋째로,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 중재하는 역할을 합니다.
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재자가 되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왕들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점투성이인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다윗과 같이 행했다’는 극찬을 들은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같은 사람들도 다 부족한 점들이 많았고 역부족이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이상적인 왕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다윗도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는 나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주는 나의 왕이십니다. 나의 죗값을 감당하신 메시아이십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인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해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내 삶의 한복판에서 이 질문에 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말 예수가 나의 왕이십니까? 정말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4. 삶의 신앙고백이 뒤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야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것을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잡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은 주님만 가시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걸어갈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길을 가면 안 된다고 큰소리치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고 야단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마 16:24-26, 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는 입술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입술의 고백도 중요하지만, 이런 삶의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 고백의 헬라어 앞글자만 따서 다섯 자로 만든 단어가 바로 ‘익투스’(ΙΧθΥΣ, 물고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물고기 표시를 달고 다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익투스’라는 다섯 글자 단어로 오행시를 지어 암호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그 표시를 해놓으면 크리스천의 집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물고기 붙이면 크리스천인 것을 다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표시가 초대교회 신앙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이 표시로써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가이사랴 빌립보처럼 세속적인 이 땅 한복판에 살고 있기에 도전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에게 예수, 나는 누구냐?”
“예수가 나에게 누구신가?”라는 이 질문에 대한 고백이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은 나의 신앙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천국 백성답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매일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예수님이 나의 왕이신가 생각해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왕이시라면 내 삶의 모든 결정권을 주님이 갖고 계셔야 하는데,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가정의 모든 일(자녀,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에서 예수님의 결정을 따르고 있습니까? 내 생업(직장 또는 사업)의 모든 부분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결정합니까? 교회에서의 사역과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결국 ‘누가 내 주인인가’(lordship)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즉 “내가 정말 너의 주인이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내 가정과 생업과 교회에서 누가 결정을 내립니까?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결정권자가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나 자신입니까? 어떤 일을 할 때,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하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합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외치며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 7:21-23, 새)
여기서 핵심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뭔가 놀라운 일을 행한 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는 말씀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와 너희는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과 축사와 기적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주님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서,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고,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안 하는 사람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지, 예수님은 원하지 않으시는데 원하실 거라고 하며 엄청난 일을 행하는 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말로만 주님이라고 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정말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정말 주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라는 단어와 함께 쓸 수 없는 말이 ‘안 됩니다’ 또는 ‘싫어요’ 같은 말입니다. ‘주님, 싫어요.’ ‘주님, 안 됩니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 안 됩니다!”라고 그랬더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싫다고, 안 된다고 하면 누가 주인입니까?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싫고 내가 안 된다고 하니까 내가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안 하든지 ‘주님’이라고 하지 말든지 해야 합니다. 주님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따라야 하고, 내 주장대로 ‘싫어요’, ‘안 돼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할래요’라고 하면 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는 질문은, “오늘 너의 삶의 진짜 주인은 누구냐?”라고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저와 여러분에게 큰 도전입니다. 바로 이 주님의 질문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정말로 삶의 고백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