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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30일 수요예배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5 ✦
“인생 결산을 위한 기도”
(디모데후서 4장 6~18절)
[들어가는 말]
누구에게나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옵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 이 땅을 떠나든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이 땅의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저번 연합부흥성회 때도 김남수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계속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든지, 이 땅에서 죽어서 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인간의 사망률은 100%입니다. 누구나 반드시 죽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고 공정하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죽는 모습과 시기가 다르다 뿐이지, 누구나 죽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오게 될 인생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맞이하기 원하십니까? 언젠가 올 그 마지막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준비하고 있어야겠습니다. 준비하지 않고 있을 때 갑자기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 용혜원 목사의 시 중에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이란 시가 있습니다.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화려하게 꽃피는 봄날이 아니라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가을이 되게 하소서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사고나 실수로 나를 찾아오지 않고
허락하신 삶을 다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하늘은 푸르고 맑아
내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한 날이 되게 하소서
늙어감조차 아름다워 추하지 않고
삶을 뒤돌아보아도 후회함이 없고
천국을 소망하며 사랑을 나누며 살아
쓸데없는 애착이나 미련이 없게 하소서
병으로 인하여 몸이 너무 쇠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가족이나 이웃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기력이 있고 건강한 때가 되게 하소서
나의 삶에 맡겨주신 달란트를 남기게 하시고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며
가족과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베풀며 살게 하소서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는 날은
주님의 구원하심과 죄 용서하심과 사랑을
몸과 영혼으로 확신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가족들에게 웃음 지으며
믿음으로 잘 살아가라는 말과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남기게 하소서
마지막 숨이 꺼지는 순간 고요히 기도드리며
나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게 하소서
행복한 죽음을 위한 기도라고 느껴지면서, 나도 죽는 순간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해줍니다.
디모데후서는 주후 66년경 쓰인 바울의 가장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죽음을 잘 준비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때는 로마 지하 감옥에 두 번째 투옥되어 마지막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시점이었습니다. 이 편지의 마지막 4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6-8절)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이제 떠날 때가 가까웠다고 합니다. 유언과 같은 말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귀합니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우리도 죽는 순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반면 ‘제대로 할 걸 못하고 믿음도 지키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다 가는구나’ 하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런데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 믿음을 지켰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귀한 고백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지막 순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남기고 싶은 유언과 같은 말씀을 이 편지에서 쓰면서 18절에서는 “아멘”으로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을 예감한 바울의 마지막 인생 결산의 기도가 드려집니다. 그가 마지막 기도에 담고 싶었던 진짜 내용은 무엇이었겠습니까?
1. 용서를 선택하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0-11절)
데마라는 사람이 다른 데 안 나와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세상을 사랑해서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을 그냥 놓아두고 그리스 북부인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레스게와 디도는 버리고 간 것은 아니고 각자 갈 곳, 즉 갈라디아와 달마디아로 갔습니다. 누가는 마지막까지 바울의 곁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를 버리고 떠남으로써 2차 전도여행 시작 때 바나바와 갈라지게 한 그 마가를 그때는 데리고 가면 좋지 않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이미 다 화해하고 같이 사역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4-15절)
이 사람은 같이 사역한 동역자가 아니라 적대적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6절)
여기서 “처음”이라는 말은 로마에 와서 첫 재판을 받을 때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의 편에서 그를 변호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말에서 은근한 서운함이 느껴집니다. 원수들에게 뿐 아니라 친구들 그리고 제자들에게조차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괴로웠던 순간의 기억이 바울에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로마의 공권력이 두려웠기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마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를 버리고 간 사람, 그리고 사역이 바빠 여기저기 흩어진 동역자들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한다’라고 합니다. 그들이 원수이든 친구이든 제자이든 상관없었습니다. 그의 결론은 용서였습니다. 알렉산더에 대한 것도 나쁜 놈이라고 저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위험한 사람이니 주의하라고 합니다.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런 사람까지도 바울은 용서한 겁니다. 용서로 삶을 마무리하신 예수님을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눅 23:34, 새)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조차 용서하셨습니다. 바울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며 마지막 남겼던 기도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행 7:60, 새)
분명히 그들이 행한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용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인생 결산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용서할 사람이 있는데 용서하지 않은 채 인생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면 그 생각을 빨리 없애야겠습니다.
최고의 기독교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벤허>입니다. 저도 중학생 때 교회에서 단체 관람을 갔던 기억이 납니다. 원래 1959년에 나왔던 이 영화는 지난 2016년에 리메이크됐습니다. 1959년의 오리지널 영화보다는 못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오히려 원작에는 더 충실하고 기독교적 메시지의 완성도 면에서 볼 때는 상당한 감동을 안겨준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나온 리메이크 작품이 1959년에 나온 오리지널 작품과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옛날 영화에서는 유대 땅에 로마 총독으로 부임한 사령관 행렬을 벤허 가족이 구경하다가 실수로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데서 문제가 시작된 데 비해, 새 영화에서는 벤허의 집에 숨어든 열심당원이 화살을 쏜 범행이 문제의 발단이 됩니다. 그때 벤허가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묵살한 벤허의 옛 가족 메살라는 그때부터 식민지배자인 로마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고,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는 유대인으로 그려지며 로마와 유대의 갈등을 아주 첨예하게 다루게 됩니다.
그런데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에 있습니다. 옛날 영화에서는 간접적으로 벤허에게 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묘사하지만, 새 영화에서는 예수님의 몸 전체가 나오고 십자가 장면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새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은 바로 용서의 메시지입니다.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용서의 말씀이 강조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벤허는 전차 경기가 끝난 후 부상당한 메살라를 찾아가 용서합니다. 벤허에게 용서를 받은 메살라는 그와 화해하며, 두 사람이 나란히 말을 타고 새 날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가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 됩니다. 벤허의 원작도 사실은 용서의 주제를 강조합니다.
인생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서 혹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용서의 선언과 용서의 기도입니다. 혹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계속 미루다가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후회 없는 결산을 위해, 너무 늦기 전에 용서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평생 주기도문으로 드린 기도가 위선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 6:12)
토요일 새벽예배 때마다 항상 주기도문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은 채 계속 주기도문을 한다면 우리는 위선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빨리 용서를 선언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사역에 대해 감사하라
인생을 마무리할 때가 가까이 오면 평생을 바쳐 일했던 사역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했는가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죽음 앞에서 자연스럽게 주님께서 자신을 만나주시고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실 때 주셨던 사명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사도로 부르시며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 선교였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의 눈을 뜨게 하는 아나니아를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행 9:15-16)
여기 보면, 바울의 첫 번째 사명의 대상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바울은 가장 중요했던 평생의 사명을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7절)
바울이 감옥에서 또 재판정에서 자신을 돕는 사람들이 없었을 때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자기 곁에 서서 그에게 힘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반대가 있을 때 주님께서 곁에 서셔서 담대하라고 하시며 ‘이 성에 구원받을 사람이 많다.’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의 소요로 천부장이 잡아 가두었을 때 그날 밤 주님께서 곁에 서서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삶의 고비에서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을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도와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에게 지금까지 복음의 말씀을 온전히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이렇게 주님께 감사하면서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과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게 된 것만도 감사한데,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게 하신 사명을 주셨다는 것은 더더욱 감사해야 될 일입니다.
사실 사역을 하라고 주신 것은 부담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입니다. 저 영원한 천국에 상급을 쌓아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다 끝나고 말 것만 하다가 끝나는 겁니다. 하늘에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천국에 가져가서 쌓아놓을 수 있는 것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의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는 사람 중에는 일을 마치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다 똑같은 임금을 준다고 했는데, 주인이 그들을 불러 일하게 한 것이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일하고, 어떤 사람은 정오에 와서 일하고, 어떤 사람은 늦은 오후에 와서 일하고, 어떤 사람은 거의 다 끝날 때 와서 일합니다. 그래도 약속한 것과 같이 동일한 임금을 줍니다. 그랬더니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와 다 끝날 때 와서 일한 사람들에게 똑같은 액수를 줄 수 있느냐?’ 하면서 불평합니다.
그러나 품삯을 준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이 돈을 똑같이 받아서 약간의 억울함은 있었을지 모르나, 아침부터 일해서 저녁이면 노동한 품삯을 받는다는 것이 확정되어 안심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불안하지 않아도 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작부터 일을 해서 마음에 평안을 얻고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인데, 똑같이 줬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우리가 무엇을 불평하고, 무엇을 원망하겠습니까? 다만 주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러움이 없도록 조그마한 사역의 열매라도 준비해서 우리 주님 앞에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매주 드리는 주일예배가 그런 시간입니다. 일주일 동안 내가 아무렇게나 살다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내가 알아서 살다가 하나님 계신 교회로 주일에 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그래서 항상 사회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가정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러면서 그 헌신의 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사역하다가, 열심히 일주일 동안 산 것을 가지고 나와서 ‘주님, 제가 일주일 동안 이렇게 살았습니다. 제가 살아서 나온 열매를 주님 앞에 바칩니다.’라고 하며 일주일 동안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던 그것을 들고 나와 드리는 겁니다.
그것이 주일예배입니다. 그렇게 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졸 수 없습니다. 딴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나가면 일주일 동안 또 열심히 그렇게 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일 때는 그렇게 예배하고, 흩어져서는 일주일 동안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면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계속 쌓이다가 마침내 주님 앞에 서는 날 이 모든 열매를 거두어 주님 앞에 열매 바구니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타고르(Tagore)가 남긴 유명한 시 <기탄잘리>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죽음이 그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대는 무엇을 그에게 바칠 것인가?”
(On the day when death will knock at thy door, what will thou offer to him?)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 그 손님 앞에 내 생명이 가득찬 광주리를 갖다 놓으리라.”
(Oh, I will set before my guest the full vessel of my life).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께 드릴 생명의 광주리, 사역의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그것을 준비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결산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3. 영광스런 천국 입성을 위해 기도하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8절)
이 말씀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마지막에 제발 천국 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 내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모든 악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셔서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에 대한 소망을 기도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죽음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인생 경주에서는 출발점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목표 지점에 골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보면 그가 살아온 삶을 볼 수 있다.” 인생의 아름다운 결산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죽음이 오히려 간증이 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죽음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천국 입성의 순간이 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후 67년경 로마 서쪽 성문 밖 3마일 지점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함으로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호흡을 주님께 바치고 눈을 감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목이 잘려 순교할 때 머리가 세 번 땅에 튕긴 곳에서 샘물이 솟아나 ‘세 분수 교회’(Tre Fontane = three fountains), 혹은 ‘바울 순교 기념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위에 ‘성 밖 성바울 대성당(St. Paul’s Basilica Outside the Walls)’도 세워졌습니다.
노르웨이의 신학자 오 할레스비(O Hallesby)가 쓴 고전적 명저 중에 <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거의 마지막에 저자는 자기 부친이 잘 알고 있던 한 믿음의 여인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가족도 친척도 없었던 그 독신 할머니가 어느 날 부유한 이웃집 그리스도인 농부를 찾아가 “내 총 재산이 1,200달러인데, 이것을 받고 나를 당신 집에서 함께 지내도록 허락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농부는 한 마디로 거절하면서 “당신을 돌보아주기 위해선 이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들 것이고 병이라도 걸리면 제가 책임지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결코 병드는 일이 없을 거예요. 제가 그런 문제가 없도록 기도했으니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농부가 할머니의 말을 믿을 리 없었습니다.
그에게 거절당한 할머니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 농부를 찾아가 같은 말로 함께 살게 해주길 부탁했습니다. 뜻밖에 그 부부는 할머니를 기꺼이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건강하고 활력 있게, 그 가정 전체에 축복을 끼치며 여러 해를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할머니가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방문을 열어보니 할머니는 잠자듯 세상을 떠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집에 사는 동안 정말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고, 떠나기 전날 저녁까지도 활기차게 그 가정을 돌보다 떠나셨습니다.
마지막에 오 할레스비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게 기도를 한 이유는 단순히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요?” 할머니는 아마도 자신을 거두어준 이 고마운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고, 또한 더욱 중요한 이유는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그렇게 기도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죽음을 위한 기도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영광스럽게 천국에 입성하기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도입니다. 오래 전 중등부 시절 많이 부르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존 W. 피터슨의 곡 <예수 인도하셨네>인데,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1.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2.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 때에
시험과 환난 많으나 예수 인도하셨네
3. 내 밟은 발걸음마다 주 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 부르며 주를 찬송하리라
[후렴]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셨네
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하셨네
바로 이 가사가 우리 각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의 심정과 같은 이 고백이 바로 우리의 인생 결산의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결단의 기도
1) 인생의 마지막에 ‘용서의 기도’로 우리의 삶을 후회 없이 결산하게 되도록
2) 우리의 인생 결산에 ‘사역에 대한 감사와 열매’가 있도록
3)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영광의 입성이 되기를 지금 준비하며 나아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