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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4일 수요예배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4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기 3222~32)

 

1.   인생을 묻는 심오한 질문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인생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해되지 않았던 과거가 해석되고, 인생에 의미가 생깁니다. 진정 예수님을 만난 인생은 자신이 지금 어디 서 있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 쪽으로나 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야 할 목적지를 바로 보게 되고 그리로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27)라는 영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으시는 이유는 이름을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잘 아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에 담겨 있는 그 사람의 존재와 인생의 의미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시지만, 스스로 생각을 해보라고 질문을 하십니다.

 

특별히 야곱의 이름에는 야곱의 인생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심으로써 너의 인생은 무엇이냐? 너는 어떠한 인생을 살고 있느냐? 너의 존재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야곱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당시 야곱은 큰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의 집을 떠나서 20년 넘게 타향살이를 하다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그가 집을 떠나게 되었던 것은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자기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에 에서가 거기에 격분하여 야곱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쌍둥이인데 형이 동생을 죽이려 했으니 얼마나 비극입니까.

 

그러한 원한이 있었던 형 에서가 이제 자기를 죽이려고 군사를 400명이나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야곱이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생명이 위태로운 그 순간 야곱은 가족들과 가축들을 먼저 다 강을 건너보내고 홀로 남습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2-23)

 

두 아내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의 여종인 실바와 빌하, 그리고 열한 명의 아들들로 하여금 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는 혼자 남았습니다. 위기 가운데 있으면 홀로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옆에 사람이 있어도, 가족이 있어도, 위기 때는 자기가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 혼자였고, 주님이 부르실 때도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됩니다. 아무리 배우자가 믿음이 좋아도 같이 서는 게 아닙니다. 혼자 섭니다. 사랑하는 가족, 이웃, 성도와 함께 있어도, 극심한 고난 가운데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외로움과 슬픔과 고통으로 눈물 흘릴 때가 있습니다. 야곱도 똑같았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4)

 

홀로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씨름이라는 것은 한국 전통 씨름처럼 샅바를 잡고 룰에 따라 벌이는 씨름이 아닙니다. 규칙이 없는 격투기처럼 치고받고 마음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슨 씨름이고, 상대는 누구였습니까? 호세아 12장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모태에 있을 때에는 형과 싸웠으며, 다 큰 다음에는 하나님과 대결하여 싸웠다. 야곱은 천사와 싸워서 이기자, 울면서 은총을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베델에서 그를 만나시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12:3-4, )

 

야곱과 씨름한 사람이 천사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신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인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에게서 온 존재인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깁니다. 그리고 울면서 간구합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5-26)

 

그런데 이 내용이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호세아서에 보면 야곱이 천사와 싸워 이기자 울면서 은총을 간구했다고 되어 있는데, 야곱이 맞아서 다리가 너무 아파 울면서 구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분명히 야곱이 싸워서 이겼는데, 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울면서 은총을 구합니까? 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라고 합니까? 보통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을 축복해주면 이해가 가는데, 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축복해달라고 합니까? 참 이상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갑자기 누군가가 공격을 하니까 엉켜서 뒹굴며 싸우게 된 것인데, 한참 싸우다 보니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맞아보니까 알았습니다. 25절에서 야곱과 씨름하던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해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엉덩이뼈, 골반, hips)을 치니까 그곳이 탈골되었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사실은 여기서 쳤다고 하지만 아주 강하게 팍 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골반 뼈가 빠질 정도면 아주 강하게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쳤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세게 때린 것이 아니라 그냥 살짝 만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살짝 만졌는데 골반 뼈가 탈골된 겁니다.

 

에서는 밖에서 활동하는 사람이고 야곱은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중에 우물가에서 돌을 옮기는 것을 보면 야곱도 힘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가 힘이 세서 이 사람을 이긴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슬쩍 만져도 뼈가 빠지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사람이면, 자기를 이기지 못한 게 아니라 일부러 져 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만약 누가 와서 내 어깨를 슬쩍 만졌는데 어깨뼈가 쑥 빠졌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두려우면 빨리 가라고 해야 하는데 붙들며 축복해달라고 하는 것은 뭔가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야곱은 이 사람이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신가, 아니면 천사가 아닌가 하며 신적인 존재로 깨닫고서 붙들고 늘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를 이스라엘로 만든 믿음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나를 빨리 떠나주십시오.’라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붙들면서 나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못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 갔을 때 군대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주셨습니다. 그때 귀신들이 나가서 돼지 떼에게 들어가 수천 마리가 몰살했습니다. 그때 거라사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를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못 갑니다.’가 아니고 빨리 떠나주십시오.’ 더 같이 있다가는 또 무슨 손해를 볼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빨리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떠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붙들면서 나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못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를 이스라엘로 만든 믿음입니다. 그가 축복을 구했다는 것은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야곱은 정말 하나님을 꽉 붙들었습니다. 그냥 대충 붙든 게 아니라, ‘지금 이분을 보내면 절대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누군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해도 분명히 하나님이 보낸 분인데, 그래서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울면서 그를 꽉 붙들고 매달린 것입니다.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붙든 겁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이런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 것, 때로는 정말로 절체절명의 위기가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고 엄청난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위기가 닥쳤는데도 멀쩡하고 태연한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위기가 찾아왔으면 간절히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이것을 안 해주시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슬슬 하거나, 그 사람들처럼 빨리 떠나주십시오.’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위기 가운데서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붙드는 사람에게 놀라운 소망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나 위기 상황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며 느긋하고 부드럽고 평화롭게 기도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뭔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하나님을 정말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그렇게 절박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2.   눈물이 기도와 만날 때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7)

 

지금 축복해달라고 했으면 알았어, 알았어, 축복해줄게. 그 다음에 나를 놓아줘.’라고 하면 되는데, 엉뚱하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야곱은 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뒤꿈치를 붙잡다입니다. 태어날 때 쌍둥이 형인 에서의 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속이는 자’, ‘사기꾼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야곱은 저는 속이는 자입니다. 저는 사기꾼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야곱은 정말로 속이는 인생, 다른 사람의 뒤꿈치를 붙잡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의 장자권이 탐나서 팥죽을 끓여 그것을 두고 형과 거래를 했습니다. 또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렇게 한 것이기는 하지만, 야곱은 눈이 잘 안 보이는 아버지 이삭까지 속여가면서 장자의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몸에 짐승의 털을 붙여서 마치 털이 많은 에서인 것처럼 변장하고 들어가서 축복을 가로챘던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형 에서의 분노를 일으켜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죽임 당하기 전에 집에서 빨리 도망쳐 나간 겁니다.

 

홀로 도망쳐 나온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20여 년 동안 온갖 고생을 했습니다. 속이는 인생인 야곱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라는 말처럼 한 수 높은 사기꾼인 라반에게 여러 번 속임을 당했습니다. 라반의 딸이자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 동안이나 열심히 일했는데, 라반에게 속아서 라헬의 언니 레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라헬을 포기하지 못한 야곱은 라헬과도 결혼하는 조건으로 또 다시 7년을 더 일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이름을 제가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마치 이렇게 고백한 것과도 같습니다. ‘저는 속이는 인생을 살았고, 또 속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참 허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28-29)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야곱에게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네 인생의 주인이 너 자신이었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네가 주인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삶이 속고 속이고 허망했고 복잡했던 것이다. 이제 삶의 주인을 너 자신에서 나로 바꾸어라. 그 의미로 이름을 먼저 바꾸어라.”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다투면서 살고, 세상을 붙들며 씨름을 합니다. 이제는 그런 싸움 말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인생을 살라고 하십니다. 자기가 해결해보려고 아등바등하거나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부르짖으며 매달리는 인생을 살아보라고 하십니다.

 

눈물과 통곡과 아픔이 있을 때 그것을 누가 해결해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해주겠습니까? 하나님께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해결해주십니다. 내가 남을 열심히 속이는 인생을 살아 봐야 남는 것은 불안과 염려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슬쩍슬쩍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하면서 자기 이득을 취하면 똑똑한 것이고 안 하면 바보라고 세상에서 이야기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거기에 혹해서 동조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럼 그 결과가 좋은가? 씁쓸함과 불안과 염려 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 길입니다.

 

구약의 인물들 중에 느헤미야가 있는데, 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세월이 한참 지나서 페르시아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페르시아로 바뀐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부르셨습니다. ‘느헤미아야!’라고 부르신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포로 중에서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으로서 왕에게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일을 맡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텐더가 칵테일 만들어 바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비서실장 같이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술에 독을 타서 독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술을 맡았다는 말은 왕의 생명을 맡았다는 말입니다. 굉장히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성공하여 페르시아에서 별 불편함 없이 살던 느헤미야였지만, 그는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다에 남아 있는 자기 동포들이 고생이 아주 심하고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은 다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아 그렇구나. 안 됐네. 나는 여기서 편안하니까 됐지.’라고 한 게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슬펐습니다. 그래서 수일 동안 슬피 울며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먼저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회개합니다. 자기가 지은 죄입니까? 아닙니다. 조상들이 잘못한 것인데, 그가 대신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회복시키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면, 쫓겨난 우리가 하늘 끝에 가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거기에서 우리를 한데 모아서, 주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이제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들은 주님께서 크신 힘과 강한 팔로 건져내신 주님의 종이며, 주님의 백성입니다. 주님, 종의 간구를 들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주님의 종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제 주님의 종이 하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여 주시고 왕에게 자비를 입게 하여 주십시오.” (1:9-11, )

 

얼마나 간절합니까? 자기와는 별 상관도 없는데 그랬습니다. 실제로 바벨론 이후 페르시아에서의 생활이 너무 편해서, 고레스 왕이 유다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지만, 그곳 생활이 너무 편해서 그냥 남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느헤미야는 3차 귀환 때 돌아간 사람인데, 자기가 자원해서 유다 총독으로 갑니다.

 

누구에게나 슬픔이 찾아오고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단순히 눈물을 흘리며 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저앉아 통곡한다고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위대한 이유는, 그냥 슬퍼하고 울면서 끝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며칠 동안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데 있습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학사(율법학자)였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냥 시민이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에스라가 목회자였다면 느헤미야는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놀라운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지금도 리더십에 대한 책들 중에 많은 책들이 느헤미야 리더십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그냥 슬퍼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가지고 눈물로 금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호소했다는 것이 그의 위대함입니다.

 

야곱의 축복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고통스런 위기의 순간에 기도를 배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별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산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믿음의 조상들 중에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모습이 가장 많지 않습니까? 별로 믿음의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요셉 같은 사람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게 아니고, 야곱 같이 형편없는 사람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고통스런 위기의 순간에 기도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 가서 세상과 씨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울음과 눈물도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운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새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도 새가 운다고 표현합니다. 기차가 막 소리를 내면서 가는 것도 기적이 운다고 합니다. 천둥이 치면 천둥이 운다고 합니다. 심지어 옷이 쭈글쭈글한 것도 옷이 운다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한국말에는 운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만약 울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라면, 우리 민족에게는 벌써 엄청난 일이 일어나서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울음이나 눈물이나 슬픔이나 한탄이나 통곡에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살아가다가 우리에게 슬픔이나 아픔이나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 우리 믿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예배의 자리,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떠나버리고 신앙을 멀리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더 큰 아픔과 고통과 문제를 가져올 뿐입니다. 지금 당장은 혹시 뭔가 잘 풀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그 길은 아픔과 고통과 문제를 더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고난은 축복이다.’ 또는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난이 축복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위기가 기회일 수 있습니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가 야곱처럼 하나님을 꽉 붙들고 늘어지면서 간절한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야곱이 하나님께 구하고 싶었던 기도제목이 많지 않았겠습니까? ‘저의 생명을 지켜주십시오. 형 에서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십시오. 제가 가나안 땅에 돌아왔는데 제 앞길을 열어주십시오. 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십시오. 제 자식들을 돌보아주십시오.’ 하고 아뢰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한 약속 이전에 먼저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환경이나 상황이나 상대방이 바뀌는 것, 그리고 축복을 받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나 그 어떤 것이 바뀌는 것보다도, 바로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밖이 아무리 바뀌어도 내가 안 바뀌면 소용이 없고 똑같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 이끌어가는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인생,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삶 속에 어떤 아픔이나 눈물이나 염려나 위기 상황이 있다면, 다른 것과 씨름하거나 다른 사람을 붙들고 씨름하지 말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과 씨름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예배하면서 하나님과 씨름해보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성경 인물 중에 또 한나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을 보면, 한나도 정말 한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남편 엘가나에게는 한나 외에 브닌나라는 아내가 또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아이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브닌나는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런 일은 한두 번 있고 끝난 게 아니라 매년 거듭되었습니다. 특히 엘가나 가족이 매년 한 번씩 성막이 있는 실로에 제사(예배)하러 갔는데, 그렇게 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예배의 자리로 가는데도 그렇게 괴롭힙니다. 왜냐하면 엘가나가 한나에게 배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여인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이고 저주였습니다. 그렇게 절망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놀랍게도 한나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통 우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브닌나를 붙들고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 번 해보자!’라고 하거나, 엘가나를 붙들고 당신이 책임져라!’ 할 텐데, 한나는 사람과 씨름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눈물과 탄식을 가지고 성막에 나아가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였다. 한나는 서원하며 아뢰었다.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삼상 1:10-11, )

 

한나는 브닌나와 씨름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엘가나와 씨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자신의 눈물과 아픔과 고민과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통곡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한 한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셔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을 아들로 허락해주셨습니다. 사무엘을 바친 후에 다른 자녀들을 많이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바꿔 주십니다. 대충 하거나 느긋한 기도가 아니라,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히 나아가며, 정말 하나님 외에는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이 없다고 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놀라운 응답으로 역사해주십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을 가리켜 가난한 심령이라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3.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사는 인생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0)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한 장소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정하는데, ‘브니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는데도 살았다고 고백하며 그렇게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의 얼굴에는 빛이 임합니다. 그러자 더 이상 에서의 얼굴을 보는 일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무섭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기도하며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상황은 똑같을지 모릅니다. 여전히 에서는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뭡니까? 하나님과 씨름하기 전에는 너무 두려웠는데, 하나님을 만나 씨름한 후에는 두렵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31-32)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습니다. 아침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밤새도록 씨름했고, 해가 뜨려고 할 때 이 사람이 도망가려 했으니까 새벽에 기도한 것입니다(26). 새벽은 밤과 아침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절반은 어두움이고, 절반은 빛입니다. 새벽은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하루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벽기도를 합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시점에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자기 이름에 담긴 운명을 바꿔 달라고 하나님과 씨름했고, 간절히 통곡으로 기도했으며, 결국 응답을 경험했습니다. 이 얍복강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된 야곱에게 놀랍게 역사해주십니다.

 

원래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으로 오던 형 에서의 마음을 녹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쌍둥이 형제 사이에 20여 년간 쌓였던 분노와 증오가 사라지고, 야곱과 에서는 서로의 목을 어긋 맞추어 입 맞추면서 눈물로 상봉하게 됩니다(33:4). 400명을 왜 데려왔겠습니까? 원래는 가서 치겠다고 그런 건데, 중간에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다시 말해서, “너는 스스로 사람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는 인생이냐? 너의 결정에 의해 사람과 또 세상과 싸우는 인생이냐? 아니면 나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는 인생이냐?”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찬양곡 중에 주만 바라볼지라의 후렴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바라며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은 귀가 밝으시고, 눈이 좋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과 모든 형편을 다 보고 계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 사랑의 주님 앞에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고, 야곱과 같이 이름이 바뀌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나 자신이 이끌어 가는 인생은 여러 가지로 꼬이고 복잡하고 힘든 인생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삶을 놀랍게 인도해주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어보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이 질문에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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