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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1일 수요예배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5 ✦
“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느냐”
(마태복음 14장 22~33절)
1. 흔들리는 세상에서 확신을 묻는 질문
주님께서 물으시는 다섯 번째 영적 질문은 “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느냐”입니다. 본문 그대로 하면,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곧 “왜 믿지 못하고 의심하느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곤고함과 염려와 두려움과 삶 속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리이며, 우리 삶에 큰 능력이 됩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면 정말로 능력이 나타납니다.
공생애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은 큰 권세가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들었습니다. “새 교훈이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새롭다(new)’는 게 아니라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2-23절)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마자 예수님은 무리를 해산시키십니다. 요한복음 6:15에 의하면, 그들이 억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해산시키신 다음 산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제자들에게는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4-25절)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는 중에 강한 바람이 일어났고, 그래서 물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24)고 표현할 정도로 힘겹게 노를 저었습니다. 이 때는 가장 어두운 시간인 “밤 사경”, 즉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의 시간입니다. 그때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세상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믿음이 없든지 있든지, 믿음이 약하든지 강하든지 상관없이 풍랑은 찾아옵니다. 바다 위에 있는 한 풍랑은 찾아옵니다. 믿음이 좋고 나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실 때 환호하고 열광하던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풍랑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물론 바다가 잔잔할 때도 있지만, 바다는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풍우가 몰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바다가 항상 움직이는 것처럼, 세상도 항상 움직입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같은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집채만 한 파도가 우리를 덮칠 수도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 닥쳐서 굉장히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폭풍이 몰려와 침몰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고나 환경적인 문제는 그나마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에 파악할 수 있고, 서로 위로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의 곤고함, 영적인 문제, 염려, 무너지는 마음, 흔들리는 믿음 등은 나누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혼자서 끙끙거리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은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혼자서 끙끙거릴 때 점점 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래서 외부의 풍랑보다 내면의 풍랑이 더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며 또 다 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모르시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인간은 풍랑이 몰려오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견고하게 지키기 위하여 신뢰할 수 있을 만한 뭔가를 막 쌓아 두고 그것을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물질(돈)이고, 또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며 인맥을 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력을 쌓아서 이겨내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많이 쌓아놓으려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뭔가 하면, 우리 인생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배 안에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놓아도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배 안에 아무리 엄청난 것을 쌓아놓아도, 바다가 흔들리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쌓아놓아보아야 인생은 흔들립니다. 바다 같은 세상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배와 같은 인생 안에 쌓아 둔 것을 가지고는 우리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타이태닉(Titanic) 호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신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라고 호언장담한 배였는데 작은 얼음조각 하나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 배 안이 얼마나 호화롭습니까? 없는 게 없습니다. 다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가 흔들리면 아무리 좋고 비싼 게 있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배가 뒤집어지고 침몰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남들 좋은 일만 하는 겁니다. 배가 침몰해서 바닥에 가라앉으면 그것이 보물선이 되어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가져갑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기초 위에 사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2. 흔들리는 우리 인생을 찾아오시는 주님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니까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6-27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많은 명령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명령이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모세가 죽고 나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처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였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인생인 것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는 것은 아주 정상적입니다. 인생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이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혹시 내 인생이 별 큰 문제가 없이 잔잔했더라도, 결국 인생은 마지막 순간 죽음이라는 두려운 사건 앞에 무기력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풍랑이 몰아치는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계속 만나주고 계십니다.
사실 오늘 본문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보통 상황 같았으면 배를 타고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풍랑 속에서 물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배를 혼자 타고 오실 수도 없고, 제자들이 위험하니까 도와주려고 그렇게 오셨습니다. 도와주러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문제 가운데 빨리 우리를 찾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자연법칙을 거슬러서라도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랍게도,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놀라운 믿음의 요청을 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28-29절)
베드로가 조금 후에 바로 물에 빠지기는 했지만, 인간으로서는 예수님 이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 위를 걸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기 베드로의 말을 잘 보십시오.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지금 너무 캄캄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폭풍이 치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니까, 불을 가져왔어도 꺼졌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나타나니까 제자들이 다 혼비백산하며 유령이라고 무서워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믿음이 있든 없든,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나타나시면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폭풍이 불고 파도가 치니까 잘 안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들렸을 것이고, 그래서 저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은 베드로는, 예수님이라면 능력의 주님이시고 저렇게 물 위를 걷는 분이시니까, 자기에게 물 위로 걸어서 오라고 명령하시면 자기도 걸을 수 있을 것을 믿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참 단순합니다. 단순한 사람이 이렇게 잘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라” 하시니까 베드로는 순종해서 믿음으로 물 위에 발을 내딛습니다. 인간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베드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자기는 어부인데, 아무리 평생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 일을 했어도 언제 그가 물 위를 걸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때 그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믿음의 발을 내딛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믿음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실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풍랑을 우리 힘만으로 견딜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폭풍 속에서도 바다 위로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도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 베드로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0절)
29절에 보면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라고 하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면서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물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풍랑이 일고 파도가 크게 치는 것을 보니까 두려워서 물에 빠진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로 발을 탁 내딛었을 때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했는데, 그의 시선이 주님에게서 바람과 파도치는 것으로 옮겨지니까 무서워서 물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잘 보십시오. 물 위를 걸을 때와 물에 빠질 때, 상황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상황은 지금 똑같습니다. 물 위를 걸었을 때나 물에 빠졌을 때나, 똑같이 사나운 바람이 불었고 똑같이 큰 물결이 일었습니다. 상황은 똑같습니다. 그럼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베드로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보았을 때는 걸었는데, 다른 데를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30절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단순히 시선을 주님에게서 바람으로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즉 무서워서 빠졌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강한 폭풍과 큰 물결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없었을 때는 물 위를 걸었고, 두려워했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원인과 두려워했던 원인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는 두렵지가 않았고, 바람을 보았을 때는 두려웠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는 무섭지가 않으니까 물 위를 걸었고, 바람을 봤을 때는 무서워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물에 빠진 원인은 두려움이었고, 두려움을 가지게 한 원인은 주님이 아니라 바람을 본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실제로 어떤 문제가 너무 힘들어서 우리가 세상의 바다에 빠지고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문제가 진짜 어려워서 우리가 망가지는 게 아닙니다. 먼저는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결정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상황을 보게 되면 두려워집니다. 두렵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이겨낼 수 있는데, 두려워하게 되면 문제에 빠져들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도 보십시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모두 유령이라고 외치며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사랑만 있고 능력이 없다면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있지만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분이 되십니다. 그러나 능력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풍랑 위를 걸어서 우리에게 오시는 분입니다. 풍랑 위에 서 계신 주님, 문제 위에 서 계신 주님, 나의 모든 문제보다 크신 주님이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비록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며 물에 빠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베드로가 잘한 것이 있습니다. 물에 빠져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부르짖었다는 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1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외침에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꺼내 주셨습니다. 솔직히 저 같았으면, 해보겠다고 난리치며 다른 제자들 앞에서 우쭐하는 베드로가 믿음이 작아서 물에 빠지는 것을 보았을 때, 머리를 잡고 물을 몇 번 먹인 다음에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정신 좀 차려!’ 하고 야단치는 기회가 되었을 텐데, 예수님은 정말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냥 꺼내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무서워한 것을 가리켜 의심했다고 표현하십니다. 그럼 베드로가 뭘 의심했다는 말씀입니까? 결국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했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었습니까? 바람을 보고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아니라 바람, 즉 자기 삶의 상황에 집중하게 되면 두려움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두려움이 생기면 주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의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럼 그 결과로 물에 빠지고 맙니다. 즉 삶의 문제로 인해 넘어지고 쓰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 삶에 어떤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어려움은 절대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두려움입니다. 왜 두려움이 생깁니까? 주님을 보지 않고 상황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내가 무너지는 것이지, 문제가 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닙니다. 두려움, 염려, 불안, 걱정 속에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 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지, 문제 자체는 별 게 아닙니다. 엄청난 문제라도 주님 앞에서는 별 게 아닌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문제에만 집중하며 상황만 보고 주님과 멀어질 때 문제에 빠져들어가고 무너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겁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겁니다.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겁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베드로의 외침이 아주 다급한 기도 아닙니까? 그것은 베드로가 참 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이 없는 자’라고 하지 않으시고 ‘믿음이 작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는데 아직 작다는 것입니다. 작으면 클 수 있습니다. 없으면 클 수도 없지만, 작으니까 크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풍랑과 파도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세상의 폭풍과 바닷물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만약 지금 어떤 문제가 있는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나름대로 세상 방법으로 어떻게 해결이 되었다면, 그게 다가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문제 하나가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계속 문제의 연속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겁니까?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계속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고, 평생 염려, 불안, 걱정만 하다가 가는 겁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세상 유혹과 염려라는 풍랑에 휩쓸려서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놀랍게도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걱정하거나 상황만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맡기든, 상황을 보고 있든, 지금 내 어려움은 똑같을 수가 있습니다. 별로 바뀌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바뀝니다.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두려움이 없느냐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상황은 같은데,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윗도 골리앗보다 육체의 힘이 더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골리앗보다 훨씬 연약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놀라운 승리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소년이었던 다윗의 믿음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저주하는 골리앗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주님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겨주실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사람의 주검을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 또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이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모조리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삼상 17:45-47, 새)
당시 불과 십대 소년이 이런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이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신 게 우연이 아닙니다. 이때 다윗은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왕 사울과 강한 장수들은 뭘 하고 있었습니까?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이라는 엄청난 거인만 보고 있으니까 두려움이 생긴 겁니다. 하지만 골리앗이라는 상황은 똑같은데, 더 크신 하나님을 보니까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이 차이입니다. 어디를 보느냐, 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겁니다. 나 자신의 진로 문제, 가정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또 어떤 문제든지, 그것만 계속 바라보며 ‘어떡하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와서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를 신뢰하라. 내가 해결해줄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려주실 줄 믿습니다.
3. 인생에 풍랑이 일 때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임재
가장 사나운 풍랑을 만났던 성경 인물 중에 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욥은 모든 면에서 아주 잘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고,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쌍,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있고, 종도 아주 많이 있었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 (욥 1:1-3, 새).
이렇게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던 거부 욥이, 거대한 인생의 폭풍을 만나서 하루아침에 전 재산이 다 날라가고 자녀들도 다 죽었습니다. 욥 자신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나서 몸을 박박 긁으면서 죽지 못해 사는 고통 가운데 놓였습니다. 얼마나 그 모습이 안 좋았으면, 그의 사랑하는 아내마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점은, 욥기가 모두 42장인데 3장부터 37장까지, 즉 욥기의 대부분 내용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인생의 폭풍과 풍랑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욥이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욥기 38장에서야 나타나신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의 내용입니다. “네가 왜 고난받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너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할지 아느냐?” 하시면서, 욥의 질문에 대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주권과 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우리도 어려움을 당하면 많은 질문들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이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실까? 왜 이런 어려움이 내게 찾아왔을까? 아니, 사랑의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나?’ 등 여러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전체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아주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체를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는 이런 것들을 아느냐?’ 하고 욥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전체를 못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비록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더라도, 그 모든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를 묶고 있던 모든 결박이 풀립니다. 결국 하나님의 임재가 해결책입니다. 풍랑 가운데 사투를 벌이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32-33절)
예수님이 함께 오시니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어려움과 고통을 만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들이 참 많습니다. 가끔 보면, 인생의 풍랑이 일어날 때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지 않고 자꾸 다른 데로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문제가 혹시 해결되어도, 그 다음 문제가 또 몰려오면 어떻게 해결을 받습니까?
지금 내 삶의 풍랑은 여전히 불고 있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내가 기도할 때 주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내가 찬양할 때 하늘의 평화를 누립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위로와 평안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풀무불에 던져졌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세상 어느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말씀해주실 때, 우리 삶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기도제목이 될 뿐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 하시며 믿음을 언급하십니다.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으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욥기를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이 욥을 믿어주십니다. ‘나는 욥을 믿는다.’ 하시며 욥을 신뢰해주십니다.
사탄은 욥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았지만, 믿음을 빼앗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다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 위로 걸어서 “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베드로를 믿어주신 것입니다. 사실 믿을 만한 인간이 못 됩니다. 그런데도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를 믿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에서 거대한 풍랑이 일면 다 쓰러집니다. 홍수가 나고 비바람이 불면 다 무너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인생은 의미 없이 허무하게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인생은 다르다고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울수록 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붙들고, 또 말씀대로 행할 때, 바다 위를 걷는 믿음으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