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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9일 수요예배
✦ 바울에게서 배우는 성화의 기도 13 ✦
“가치 있는 인생을 향한 기도”
(골로새서 1장 3~12절)
1. 가치 있는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죄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가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보석상에 강도가 침입했는데, 이상하게도 강도인데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 강도는 보석상의 모든 제품 앞에 진열된 가격표들을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다음날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형편없는 싸구려 제품들이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팔렸고, 엄청나게 비싼 제품들은 형편없이 싼 가격으로 팔렸습니다.
성경은, 영적 강도 마귀가 한 일이 바로 그렇게 했다고 알려줍니다. 마귀는 이 세상에서 가격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 가치관이 전도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무엇이 무가치한 것인지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것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가치한 것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헛된 것을 따라 사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나오는 것만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르지, 인생에서 추구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인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보다는, 결국은 무가치한 이 세상의 재물과 성공을 좇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다 없어지는 것들에만 목을 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해줄 것들에는 투자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마 6:19-20, 새)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보물을 땅에 쌓으나 하늘에 쌓으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물론 안타까워하시거나 기뻐하시겠지만,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하늘에 쌓아야 합니까? 땅에는 도둑이 들지만 하늘에는 도둑이 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결코 빼앗기지 않고 영원합니다. 이 땅의 것은 다 없어집니다. 그런데 도둑이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하늘의 보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하늘에 쌓아둘 보물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먼저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늘 아버지가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다 채워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의 가치를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보석인 줄 모르고 땅의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작 가장 중요하고 귀한 것은 놓쳐버리고, 엉뚱한 것만 따라 인생을 낭비합니다. 지금 그런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교인들 중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미술상들이 미술 진품을 분별하고 작품에 가격을 매기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작가의 서명이라고 합니다. 그림이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워도, 거기에 진짜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있느냐, 반 고흐의 서명이 있느냐, 피카소의 서명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모조작가도 아주 똑같이 그립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서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술품 시장에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서명하신 작품이 등장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라고 쓰인 작품이 시장에 나왔다면? 그런데 실제로 그런 작품이 등장한 것을 아십니까? 그 작품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고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번 주어진 삶을 살면서 자신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작품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골로새 성도들이 가치 있는 인생이 되도록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0절)
여기서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가 영어성경 NIV에는 이 구절이 “so that you may live a life worthy of the Lord”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인생을 살도록 기도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합당하게’로 번역된 우리말이 영어로는 ‘worthy’(가치 있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순간부터 우리는 주님의 가치를 나의 가치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가치에 합당한 인생을 살 때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2. 가치 있는 인생을 향해 나아가도록 기도하라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렇게 가치 있는 인생을 향해 나아가도록, 사도 바울은 무엇을 기도한다고 말씀합니까?
1) 알아야 할 것을 아는 신앙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닙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며 사역하는 동안에 에베소에 와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골로새 사람 에바브라가 설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6-8절)
바울은 자신을 통해 예수님을 믿어 제자가 된 에바브라를 통해 복음을 받음으로써 영적 손자와 같이 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9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골로새 성도들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알아야 할 것이 많은데, 그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이전에 부목사로 섬기던 디트로이트 지역에 작은 성경대학(Bible College)이 있었는데, 그 학교의 표어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The will of God, nothing more, nothing less, nothing else.” (하나님의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이 전부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하나님의 뜻은 선한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며, 온전한 것입니다. 그 뜻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우리가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두고 기도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9-10)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마 26:39, 새)
조금 전 그 성경대학의 표어인 “하나님의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그 어떤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우리도 자신의 삶의 표어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어떤 것이 최선인지 우리보다 잘 아십니다. 그래서 최선의 길을 가도록 우리에게 도전을 주시고 결단하게 하셔서 인도하십니다.
지난번 곽인순 목자님이 오셔서 하신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여러 가지인데 그 중 하나가 이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절대 못 이겨요.”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을 우리가 꺾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막 고집을 피우면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으로 보일 때도 있고, 성경에도 그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살겠다고 결정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행복하게 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살아감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2) 행해야 할 것을 행하는 신앙
바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10절, 새)
이제는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는 삶이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는 삶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교회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교회 예배뿐 아니라 인터넷과 유튜브 등에서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런데 그 중 행하는 것은 얼마나 됩니까? 들은 것이 100이라고 하면 행하는 것은 1이 될까 말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을 속이는 자”라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한다면,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쓴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입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기뻐하고 갈망하며 그 뜻을 이루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루도록 도와주십니다.
20세기 초 댈러스제일침례교회(First Baptist Church of Dallas)에서 47년 동안 목회한 존경받는 목회자며 위대한 설교자였던 조지 트루엣(George W. Truett) 목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늘 이 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To know the will of God is the greatest knowledge. To do the will of God is the greatest achievement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가장 위대한 지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먼저는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머리에 담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암송을 할 수 있을 만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안에 새겨진 거룩한 지식이 우리의 존재 전체를 이끄는 행동이 되고 또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에만 머물지 말고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삶입니다.
우리가 더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 가치 있는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할 뿐 아니라, 바로 그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왜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됩니까?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마치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설교자가 가장 위험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할 때 마치 나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오래 교회를 다녔을수록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라도 실행하도록,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행동에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최고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이 있지만, 한마디로 ‘자아실현’입니다. 더 쉬운 말로 하면 ‘자기만족’입니다. 지금 온통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에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상관없고 나만 만족하면 됩니다. 좋은 면도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 신념대로 살면서 소박하게 자기만 만족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만족을 느끼기 위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최고 가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뜻의 실현’입니다. 조지 트루엣 목사께서 남긴 유명한 말이 또 있습니다.
“There is no failure in God’s will and no success outside of God’s will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실패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밖에서는 성공이 없다).”
조지 트루엣 목사는 회의를 주재할 때마다 빙그레 웃으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Thy will be done)이라고 했고, 말년에 건강으로 고생할 때에도 누군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면 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의 인생을 담은 책을 내면서 그 책 제목을 <Thy Will Be Done(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이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가치 있는 인생은 행해야 할 것을 행하는 삶입니다. 최고로 가치 있는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입니다.
3) 견뎌야 할 것을 견디는 신앙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알고 행해야 할 것을 행하면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1절)
바울은 모든 선한 일이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견딤과 오래 참음입니다. 희생과 고난 없이 저절로 맺히는 열매는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없었다면 오늘의 교회, 오늘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가능하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고난과 죽음을 마지못해 당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 12:2, 새)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가치 있는 인생, 가치 있는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기도하는 가운데 기쁨으로 견딤과 오래 참음의 과정을 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영광의 힘으로 도우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에 우리가 고난을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그나마 복음화 비율이 높은 나라가 미얀마입니다(구 버마). 인구의 거의 7%가 기독교 인구(약 300만 명)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특히 미얀마 카렌족, 카친족, 진족의 복음화 비율은 거의 절대 다수입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는 미얀마 최초의 선교사였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의 희생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미국의 명문인 브라운 대학(Brown University)을 졸업한 야망 있는 청년이었는데, 학교에 다니면서 한 친구의 영향으로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졸업을 앞두고 떠난 여행에서 그 친구의 허무한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주님 앞에 마음을 열고 신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천로역정>을 읽다가 크리스천이 된 앤이라는 여인을 만났고, 그녀의 부모에게 편지로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저희는 이 땅에서 두 분이 따님과 다시는 만나실 수 없을지도 모르는 선교의 길로 나아가려 합니다. 결핍과 슬픔, 모욕과 박해 그리고 고난과 죽음의 위험이 있을지 모를 곳이지만, 우리가 그곳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떠나게 허락해주십시오.”
의외로 결혼 허락을 받은 아도니람 저드슨은 1812년 2월 5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날 목사안수를 받은 다음, 13일 후 배를 타고 아내와 함께 선교지로 떠납니다. 1813년 미얀마에 입국해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그는, 6년이 지난 후에야 첫 번째 신자를 얻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열대성 열병으로 수십 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고,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했습니다. 그 후 선교 사역을 위해 재혼했는데 두 번째 아내와도 또 사별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자녀들을 잃어야 했습니다. 한때는 스파이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은 채 21개월이나 억울한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난 중에서도 그는 미얀마어로 성경을 완역하고 미얀마어 사전을 편찬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37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그를 통해 미얀마에 63개 교회, 21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견딤과 오래 참음을 통해 열매를 맺는 인생이야말로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그가 사실 하루에도 몇 번씩 ‘집으로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안 했겠습니까? 그러나 견딤과 오래 참음으로 37년을 견디고 마침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렇게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런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마지막 순간 결코 후회 없는 삶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아픔, 오늘의 고통, 오늘의 수고를 기쁨으로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며 나아가는 발자국마다 그런 땀과 눈물이 가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이 땅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고, 이 땅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 잘했다고 칭찬받는 주님의 종들이 될 것을 믿습니다.
➤ 결단의 기도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도록
2)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3) 견딤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열매 맺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