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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일 수요예배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10

하시딤의 등장과 유대교의 변화

(요한복음 119~23)

 

[들어가는 말: 역사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성]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님은 광야로 나가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이사야는 광야를 예언했고, 마카비 시대에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 광야로 나가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3:1-3)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그 당시 광야에 있었던 무리들은 누구였을까요? 왜 성경은 세례 요한을 이사야의 예언과 연결합니까?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몰려들었고, 그것을 본 요한은 그들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3:7)

 

이렇게 세례 요한으로부터 강하게 질책받는 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이 보통 위선자이며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이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정말로 모두 위선자들이었을까요?

 

신약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의 역사를 모르면 신약 성경의 진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구약 성경에는 나오지도 않는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 종파들을 단순히 위선자들이라는 프레임에 넣어 일반화시킨다면, 자칫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세기 전에 일어난 마카비 전쟁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1.   거친 파도의 시작

 

스룹바벨이 제2성전을 건립한 주전 516년 이후부터 주전 175년까지 유대 사회는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배하는 나라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그리스로, 또 프톨레미와 셀레우코스로 바뀔 때도 유대 사회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주전 175년에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즉위하면서 유대인들은 극심한 핍박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거친 파도가 밀려온 겁니다. 이전까지는 헬레니즘 시대이기는 해도 큰 박해 없이 완만한 시대였던 반면,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극심한 신앙의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주전 175년 전후로 지중해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지중해 세계의 절대 강자로 부상한 로마가 유대 지역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반대편에서는 옛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회복한 파르티아 왕국이 로마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그사이에 끼어 있는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4세는 살아남아야 했고, 그러기 위한 결단이 바로 헬레니즘 문명으로 국제화를 시도하며 시대의 조류에 발맞추려는 정책이었습니다.

 

사실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 신앙을 금지하고 헬레니즘을 강요하며 박해했던 것은, 유대교를 말살하려는 의도였다기보다 헬레니즘으로 통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회를 하나의 사상으로 결속시키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속주에 이전처럼 자율권을 부여하지 않고, 친셀레우코스 성향의 유대인 엘리트들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3세기에 프톨레미 왕국으로부터 세금 징수권을 확보하여 유대 사회의 실세 역할을 했던 토비아스 가문입니다. 바로 느헤미야 때 대적이었던 산발랏, 도비야, 게셈 가운데 도비야의 후손입니다. 이 가문은 프톨레미가 약해지기 시작하자 재빨리 셀레우코스 쪽으로 줄을 갈아타면서 여전히 예루살렘의 실세 노릇을 했습니다. 아주 기회주의자들입니다.

 

이때 대제사장 가문은 어땠을까요? 이전에 다루었던 대제사장의 변화를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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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마카비 전쟁과 대제사장의 변화

  

잠깐 복습하자면, 친프톨레미 성향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주전 204~175)가 있었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그를 폐위시키고 그의 형제이자 열렬한 헬레니스트였던 야손(주전 175~172)을 대제사장에 임명하는데, 야손이 뇌물을 바치고 자기 형을 내치면서 대제사장직을 차지한 것입니다. 둘 다 사독 계열이었고 형제였지만, 이때부터 대제사장직이 외세에 의해 임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야손은 친헬레니즘 정책을 펼치는데, 예루살렘에 원형 경기장이 세워지고 김나지움과 헬라식 건물들을 세웁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분위기에 대해 유대 문헌에서 밝히기를,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기보다 올림픽 같은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제가 목사인데, 목회와 설교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나가서 축구만 하고 골프만 친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심한 경우였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종교가 소홀히 되어서, 귀족들도 자기 자녀들을 성전과 회당에서 율법을 배우게 하기보다 김나지움에서 헬레니즘식 교육을 받게 하는 데 더 열정적이었습니다.

 

사실 올림픽은 단순히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가 아니라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종교적인 제전이었고, 남자들이 나체로 경기를 벌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바로 이런 경기가 벌어진 겁니다. 특히 안티오코스 4세 때 성전 안에서 레슬링 경기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나체로 경기하면 할례 때문에 육체적으로 표시가 납니다. 하지만 헬레니즘의 거친 파도라는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랑스러워해야 할 유대교와 할례를 오히려 수치스러워하는 정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때 에피스피즘이라는 재건 수술이 유행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것이 당시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율법을 자랑스러워한 게 아니라 수치스러워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비난을 많이 당해서 교회 다니는 것이나 크리스천인 것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데, 그보다 훨씬 더 심한 경우입니다.

 

이어서 비사독 계열의 메넬라오스(주전 172~162)가 대제사장에 임명됩니다. 그 전에 야손에 의해 예루살렘은 그리스의 폴리스처럼 헬라식으로 변해버렸고, 토비아스 가문의 입맛에 맞는 메넬라오스는 뇌물을 바치며 야손을 끌어내리고 대제사장이 됩니다. 야손은 뇌물을 바쳐서 자기 형을 내치고 자기가 대제사장직에 올랐는데, 메넬라오스에 의해 똑같이 당합니다.

 

이렇게 유대 사회가 변질되어 갈 때 등장했던 경건한 사람들이 바로 하시딤입니다. 이들은 하스몬 가문을 중심으로 주전 167년에 마카비 혁명을 일으키고, 주전 1641225일에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하누카를 지키게 됩니다. 그 후 주전 142년에는 하스몬 가문의 시몬이 마침내 정치적 독립까지 쟁취했지만,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신약 시대의 유대는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주전 175년부터 신약 시대까지 대제사장은 권력의 시녀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하시딤 무리의 반발이 있었지만, 유대의 엘리트들은 예루살렘 외곽에 다윗의 도시라는 요새를 만들어서 유대를 헬레니즘화하는 전초 기지로 삼았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일제의 조선총독부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주전 167년부터 제우스 숭배를 강요하며 할례, 율법, 안식일 지키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종교의 변질은 외부의 문제 때문입니까, 아니면 내부의 문제 때문입니까? 교회가 타락하는 것은 외부의 문제 때문입니까, 내부의 문제 때문입니까? 외부의 공격도 어렵지만, 결국 내부의 문제 때문에 무너지는 것임을 봅니다.

 

결국 모데인이라는 작은 동네의 지방 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가 자기의 다섯 아들을 데리고 마카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요한, 시몬, 유다(마카비), 엘르아살, 요나단이었습니다. 전쟁에 마카비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셋째 아들 유다의 별명이 마카비/마카베오(망치)였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힘이 세고 강력한 지도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비판하며 갈릴리에 나타난 나사렛 예수가 요한, 시몬, 유다 같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실 때 유대인들은 그분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카비 시대를 회복시켜줄 분이 아니신지, 진짜 메시아가 아니신지 새로운 희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2.   마카비 전쟁과 대제사장의 변화

 

마카비 전쟁 당시 대제사장들의 변화를 보면 이 시기 유대교 종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오니아스 3, 야손, 메넬라오스, 알키모스로 이어지는 대제사장직의 변화 과정을 언급했는데, 대제사장의 정통성이 상실되고 변질되면서 경건을 추구하는 하시딤이 등장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마카베오상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40 ‘만일 우리 모두가 이미 죽어간 형제들을 본받아, 우리의 관습과 규칙을 지키느라고 이방인들과 싸우지 않기로 한다면 멀지 않아 그들은 우리를 이 지상에서 몰살시키고 말 것이다.’ 41 그날,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우리를 공격하는 자가 있으면 안식일이라도 맞서서 싸우자. 그래야만 피신처에서 죽어간 우리 형제들처럼 몰살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42 그러자 일부 하시딤 사람들이 모여와서 그들과 합세했다. 그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고 모두 경건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마카베오상 2:40~42, 공동번역)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시딤은 경건한 자라는 의미로, 구약 성경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하시딤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토라를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주전 175년에 변질되는 유대교에 반발해서 나타났고, 무엇보다 조상들 때부터 지켜온 경건을 계속 이어서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 하시딤은 하나의 종교 분파라기보다는 경건을 열망하며 나타난 무리를 가리키는 표현이며, 나중에 등장하는 여러 종파들의 모태가 됩니다. 그래서 조금 전 마카베오상 2장 구절에서 일부 하시딤이라는 문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 중 마카비 전쟁에 가담한 무리가 있고, 그렇지 않은 무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카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셀레우코스는 이에 맞설 경제적, 정치적 여력이 없었습니다. 로마와 파르티아의 세력이 팽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하누카를 기념하는 선에서 그것을 허락하며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했고, 주전 162년 메넬라오스의 후임으로 알키모스를 대제사장직에 앉히려고 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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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마카비 전쟁과 대제사장의 변화

 

이 표를 다시 한번 보시면, 알키모스가 사독 계열이 아니라 아론 계열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마카비 전쟁이 끝났으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끝까지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을 세워서 영적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셀레우코스는 163년에 안티오코스 4세가 갑자기 죽고,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에 빠졌습니다. 마카베오하에서는 당시 셀레우코스의 권력을 노리던 데메트리우스(Demetrius)와 대제사장 알키모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5 데메드리오(데메트리우스)가 알키모스를 의회에 초청하여 유다인들의 태도와 계획에 관해 물었을 때에 알키모스는 자기의 무모한 계획을 성취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6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하시디인(하시딤)이라는 유다인들은 전쟁을 일삼고 폭동을 일으키며 국가의 안녕질서를 교란하고 있습니다. 7 그렇기 때문에 나도 내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영예, 즉 대사제직을 빼앗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마카베오하 14:5~7, 공동번역)

 

이것은 162년 알키모스와 데메트리우스의 정치적 관계를 보여 줍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대화에서 하시디인이라는 유다인들이라는 언급은 하시딤의 일부가 마카비 전쟁에 합류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입장의 차이는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후에 유대 사회의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3.   하시딤과 하스몬 가문의 분열

 

마카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비결은 하시딤 그룹이 합세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전쟁의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하스몬 가문이 로마 원로원과 외교적인 관계를 맺어 정치적으로 셀레우코스에게 압박을 가한 원인도 있지만, 보다 실제적으로 유대인들을 전쟁에 가담시킨 원동력은 하시딤이 보여준 경건에 있었습니다. 경건한 하시딤이 전쟁에 참가하니까 일반 백성들도 따라서 참가한 것입니다.

 

이때 셀레우코스는 알키모스라는 협상 카드를 제안했고, 이 제안이 하시딤의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알키모스가 사독 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스몬 가문과 일부 하시딤은 그렇게 하자며 알키모스를 대제사장으로 올리는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하시딤 그룹의 다른 무리들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의의 교사라고 불리는 사독 계열의 인물을 중심으로 광야로 나갔습니다. 바로 이들이 유대 역사에 등장하는 쿰란 공동체입니다.

 

유대 분파 중 하나인 에세네파와 쿰란 공동체가 같은 그룹인지 아니면 다른 그룹인지에 대해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에세네파가 넓은 의미의 종교 분파개념이라면, 쿰란 공동체는 사해 옆에 있었던 지역개념으로 보면 됩니다.

 

광야로 나가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영적 정통성을 갈망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결국 주전 159년 하스몬 가문의 막내아들 요나단이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제사장 알키모스를 살해했고, 그 후 주전 152년까지 7년 동안 유대 역사에서 대제사장이 공석이 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7년 동안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같은 유대교 분파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전 152년부터는 아예 요나단 자신이 대제사장을 겸직했고, 그가 죽자 그의 형제인 둘째 시몬이 그 자리를 계승한 후 주전 142년에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전에도 셀레우코스가 약해져서 상당히 자유로웠지만, 이제는 완전히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정치적 독립이 해결되고 나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할렐루야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고 예배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습니다. 막상 독립하고 나니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정통성은 더 이상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은 대충 해도 되는 문제가 되었고, 대제사장은 권력의 시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몬이 주전 134년에 죽고 나서 그다음 세대인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때 하스몬 가문이 대제사장 직분을 겸직하는 것에 반대했던 무리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에서 밀려나 백성들 안으로 들어갔고,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율법의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실 백성들에게 아주 존경받던 사람들입니다.

 

반면, 하스몬 가문과 결탁한 사람들이 바로 사두개인을 형성하게 되는데, 예수님 시대와 그 이후 신약 시대에 사두개인들로부터 대제사장이 발탁되는 배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의 성향이 형성되는 시기가 바로 요한 히르카누스 1세 때입니다. 이제는 유대 사회에 강력한 유대교를 강요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스몬 가문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에 반대하던 바리새인들을 권력에서 밀어냈고, 이방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유대 사회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억지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불과 한 세기 전에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서 강제로 유대교를 금지당했던 그들이,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다스리면서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유대교를 강요하는 시대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하는 짓이 똑같았습니다. 지금은 유대교이고 그때는 헬레니즘을 강요했던 것만 다릅니다.

 

그렇게 광야로 나간 에세네파는 기존 종교와 분리되어 광야에 머물렀고, 바리새파도 정치에서 분리되어 백성들 안으로 들어갔으며, 사두개파는 권력과 결탁하여 대제사장을 배출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아니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0-23)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단순한 지역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그동안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겠습니까? 종교는 타락하고 권력도 타락한 상황에서 100년 전에 로마가 들어와서 로마 아래 있는데, 이제는 무엇을 갈망하겠습니까? ‘메시아,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실 분입니다. 마카비처럼 자기들을 구원해주실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요한이 와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와서 당신이 그리스도냐?’라고 묻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종교가 변질되어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주신 약속과 계획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그 예언의 성취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모든 것이 단절된 것처럼 보여도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은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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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구약 중간사를 계속 살펴보는 가운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 강한 사람들, 부자들이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신구약 중간사를 공부하면서도 그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신약 성경을 읽을 때 분명히 하나님은 구약의 예언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보며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며 매일 신실하게 주님과 동행하며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쓰임받는 도구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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