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_iO393YcKtE?si=cm0oPEAncTnRka17&t=85
2024년 10월 16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6 ✦
알렉산더의 등장과 헬레니즘 시대
(다니엘 11장 1~4절)
1.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가면 알렉산더의 흉상을 볼 수 있습니다.
## 그림 1: 알렉산더의 흉상 (대영박물관)
천재적인 전략가였던 알렉산더는 밀집대형인 ‘팔랑크스 전법’을 통하여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 그림 2: 그리스 군대
반면 페르시아관에 가면 불사부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그림 3: 페르시아 불사부대
고대 역사 기록에도 등장하는 불사부대(Immortals)는 페르시아 왕을 호위하는 만 명의 엘리트 부대로서, 항상 만 명 규모를 유지했습니다. 혹시 병력 손실이 생기면 상비군으로 보충했기에 언제나 만 명의 최정예 부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래서 불사 부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알렉산더의 밀집대형과 페르시아의 불사 부대가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리스가 이겼습니다.
주전 333년 11월 5일, 아나톨리아 남부 이수스 평원에서 세기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나톨리아는 오늘날 튀르키예(터키) 지역으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이미 동서양의 충돌은 주전 490년 마라톤 평원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사이에 벌어졌는데, 페르시아가 그리스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내가 참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보라 바사에서 또 세 왕들이 일어날 것이요 그 후의 넷째는 그들보다 심히 부요할 것이며 그가 그 부요함으로 강하여진 후에는 모든 사람을 충동하여 헬라 왕국을 칠 것이며” (2절)
여기 나오는 바사의 세 왕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고레스, 캄비세스 2세, 스메르디스를 가리키는 것 같고, 그 후에 일어나는 부요하고 강한 넷째 왕은 다리우스 1세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며 그리스 정복의 꿈을 품게 되었고, 마침내 그리스로 진격하여 마라톤 평원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패배입니다.
다리우스 1세가 죽으면서 자기 아들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에스더의 남편)에게 그리스 정복의 꿈을 넘겨주었고, 그래서 마라톤 전투에서 패한 지 10년 후인 주전 480년에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약 150년이 지나며 공수가 바뀌어서, 이제 그리스가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스 연합의 변방이었던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는 그리스를 통일하고,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치면서 세계의 정복자로 등장했습니다.
## 그림 4: <이수스 전투>,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1529)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가 그린 <이수스 전투>는 1529년 작품입니다. 그림에 보면 그리스 군대와 페르시아 군대가 뒤엉켜서 운명을 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보면 뭔가가 떠 있고,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군대의 보병 십만 명과 기병 일만 기를 죽이고 마지막으로 다리우스를 격퇴했다. 다리우스는 기병 일천 기와 함께 도망쳤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포로로 잡혔다.”
1529년 유럽 작가가 그림을 통해 약 1860년 전에 알렉산더가 거둔 승리를 그린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당시 오스만 제국이 유럽 사회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림 속의 문구를 통해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도를 담았습니다. 이렇게 알렉산더는 고대에는 물론이고 역사 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성경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라” (3절)
이렇게 ‘능력 있는 왕’으로 역사에 등장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와 전투를 벌입니다. 주전 333년 이집트로 향하는 길목이었던 이수스에서 알렉산더의 그리스 군대와 이를 저지하는 다리우스 3세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군대가 맞붙은 것입니다. 그리스는 3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원정을 떠났는데, 알렉산더는 그동안 자기와 함께 산전수전을 겪어왔던 네 명의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카산더, 리시마코스와 함께 이수스로 향했습니다.
## 그림 5: 이수스 전투 지도
이에 맞서 나온 페르시아 군대는 다리우스 3세의 불사부대와 60만 대군이 함께 왔습니다. 60만이나 되는 병력을 보유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는 3만 5천 명밖에 안 되는 그리스 군대와 인해전술을 통한 소모전을 벌이더라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전략 없이 전쟁에 임했던 반면, 알렉산더는 필살기를 들고나왔습니다.
## 그림 6: 그리스 전술
알렉산더는 중앙을 어떻게 해서든지 밀집대형으로 버티고, 기병을 우회시켜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오직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만 공격하는 전략을 들고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문용어(?)로 일명 ‘한 놈만 팬다’ 전략입니다. 알렉산더가 그 옛날 이미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의 그리스 기병들에게 밀리면서 퇴각했고, 장수가 사라진 페르시아 대군은 전열이 무너지면서 이수스 전투에서 패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나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더의 그리스 군대와 싸웠지만, 거기서 완전히 패하면서 페르시아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 다리우스는 도망가고 가족들은 사로잡혔는데, 알렉산더가 다리우스의 가족들을 잘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리우스가 항복하면서 알렉산더에게 고마워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2. 알렉산더와 디아도코이 시대
그렇게 알렉산더는 화려하게 역사에 등장했지만, 다니엘서 11장을 보면 그의 나라가 갈라져 나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의 사후에 그러한 역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알렉산더는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에게 승리한 후 10년만인 때, 또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세계의 패권을 잡은 지 8년만인 주전 323년 6월 10일, 단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고 맙니다.
그러자 그의 수하에 있던 네 명의 장군들이 저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서로 대립했습니다. 계승자들이라는 의미로서 나라가 분할되는 이 시기를 가리켜 ‘디아도코이(Diadochoi) 시대’라고 부릅니다. 알렉산더와 디아도코이 시대가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강성할 때에 그의 나라가 갈라져 천하 사방에 나누일 것이나 그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주장하던 권세대로도 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나라가 뽑혀서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것임이라” (4절)
갑작스런 왕의 죽음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알렉산더의 측근 중 한 명이었던 안티고노스(Antigonos)가 스스로 자기가 왕이라고 선언했고, 그러자 네 명의 디아도코이(계승자들)는 힘을 합쳐서 그를 몰아냈습니다. 그 후 그 4명은 영토를 나누어 각자 통치하게 됩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그림 7: 디아도코이 시대
카산더 장군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지역을 차지했고,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와 소아시아 지역을 차지했고, 셀레우코스(셀류코스)는 광활한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지역을 차지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미)는 이집트와 유대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일어난 세력 다툼은 훨씬 복잡하지만, 우리의 초점은 유대 땅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을 토대로 그동안 유대 땅을 누가 지배했는지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주전 586년부터 바벨론 지배 (47년)
* 주전 539년부터 페르시아 지배 (206년)
* 주전 333년부터 그리스 제국(알렉산더) 지배
* 주전 301년부터 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미) 지배
* 주전 200년부터 셀레우코스 지배
유대 사회는 이렇게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페르시아 시대에 제2성전을 재건하여 ‘중앙 성전과 지방 회당’이라는 구심점을 세웠고, 이 사회 구조는 신약 시대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인 독립만 얻지 못했을 뿐이지, 페르시아나 그리스, 심지어 로마도 속주로서 유대 사회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회에서 예루살렘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면 지배자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큰 변화 없이 시간이 흘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페르시아 이후 알렉산더에 의해 헬레니즘의 물결이 유대인들에게 들이닥쳤고, 디아도코이 시대에 그 흐름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런 변화를 그리스 출신 역사가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대개 플루타르크로 알려진 사람)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처음으로 군중들이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를 왕으로 예우했다. 따라서 안티고노스는 즉각 그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왕관을 썼으며, 데메트리오스는 부친으로부터 머리띠와 함께 그를 왕으로 호칭한 서한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자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추종자들 역시 그들대로 그에게 왕이란 칭호를 주어, 패전으로 인해 의기소침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이 경쟁적으로 그렇게 행동하자, 그 행태는 다른 후계자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뤼시마코스가 머리띠를 두르기 시작했고, 이미 전에 왕의 이름으로 비(非)그리스인을 상대했던 셀레우코스가 그리스인들을 만났을 때도 같은 행동을 취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데메트리오스전, 18.1~2)
우리는 디아도코이라는 말보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이 더 익숙합니다. 실제로 이 시기를 거치며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헬레니즘 시대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합니까? 그 시대를 살펴보겠습니다.
3. 헬레니즘 시대의 잔잔한 파도와 거친 파도
‘헬레니즘’이란, 독일의 역사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Johann Gustav Droysen)이 만들어낸 개념으로, 대략 주전 333년 알렉산더의 등장부터 기독교가 일어난 시기까지를 말합니다. 제2성전기보다는 짧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 둘이 겹칩니다.
이 시기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융합’ 또는 ‘통합’입니다. 그리스 문화와 속주(식민지)들의 문화가 서로 섞이는 겁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모두 속주들에게 관용 정책을 취한 것은 맞지만 특징은 달랐습니다. 페르시아 시대가 동서 문화의 ‘공존’이라면, 헬레니즘 시대에는 ‘융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페르시아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살자.’라는 정책이었던 반면, 그리스는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라는 정책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즉 세계 시민화를 꿈꿨기에, 그의 시대에 동서 문화가 뒤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알렉산더가 정복한 세계는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그리스 문화가 급속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세계가 하나 되는 ‘세계 시민화’를 꿈꿨기 때문에 자기 밑의 그리스 병사들을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하게 했고, 본인 역시 록사나(Roxana)라는 페르시아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며 융합 정책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알렉산더의 정복 전쟁이 시작되자 예루살렘 역시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흰옷을 입은 백성들과 대제사장의 모습을 보고는 손수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먼저 대제사장에게 안부를 물었다. (중략) 알렉산드로스는 꿈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났다면서 대제사장을 존중해 주었다. 그는 대제사장과 나란히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대제사장의 지시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한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다니엘의 예언’이 적혀 있는 다니엘서를 접하게 된 알렉산드로스는 그 그리스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마음이 흡족한 알렉산드로스는 백성들을 해산시킨 후 그다음 날 다시 불러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자기들은 조상들의 율법을 지키기를 원하며 매 7년마다 내는 조공은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한 바벨론과 메디아에 사는 유대인들도 그들의 고유 율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들어주겠다고 승낙했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1.8.7.37)
이렇게 유대 사회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속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리스 언어와 문화가 확산되며 유대인들은 자원해서 그리스 군대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영향이 있었습니까?
주전 301년부터 디아도코이 시대가 열리고, 지중해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서고, 남쪽 이집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자리하게 되었습니다(헬라어로 프톨레마이오스이지만, 우리가 익숙한 프톨레미로 부르기로 함). 두 나라가 육로로 마주치는 중간이 코엘레-시리아(유대) 지역이었습니다.
## 그림 7: 디아도코이 시대
한 마디로 유대 땅의 위치는 두 강대국의 전쟁터였는데, 이곳은 강대국들의 길목이었고, 지중해 무역을 통해 아라비아 내륙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시장이기도 했습니다. 다니엘 11장의 예언처럼,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미는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여러 번 전투를 벌였습니다.
프톨레미의 지배를 받던 유대가 셀레우코스에 넘어간 것은 주전 200년 6월에 벌어진 파네이온 전투 때부터였습니다. 이것이 제5차 시리아 전쟁이었으니, 유대 땅을 두고 두 나라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나라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사실 유대 사회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 내부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러다 유대 사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서 사회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때가 찾아왔습니다. 주전 175년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즉위하면서 유대 사회에 헬레니즘을 강요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을 두고 어느 학자는 주전 175년 이전을 ‘헬레니즘의 잔잔한 파도’로, 그 이후를 ‘헬레니즘의 거친 파도’로 표현했는데 매우 적절한 비유입니다. 헬레니즘의 거친 파도는 결국 마카비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헬레니즘의 압박을 못 견디고 유대 사회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게 되니까, 오늘은 먼저 ‘잔잔한 파도’의 시기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주전 301년부터 200년까지 유대 사회는 이집트에 기반을 둔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통치자들의 주요 특징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프톨레미 1세(주전 323~283년): 이때 프톨레미 왕조가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2) 프톨레미 2세(주전 283~246년): 구약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습니다(70인역).
3) 프톨레미 3세(주전 246~221년): 이 시기 이집트에는 이미 유대 회당의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4) 프톨레미 4세(주전 221~204년): 유대 땅의 지배권이 셀레우코스 왕조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5) 프톨레미 5세(주전 204~180년): 유대 지배권을 완전히 셀레우코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프톨레미 3세 때 이집트에서도 회당 흔적이 발견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부터 회당은 곳곳에 존재해 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즉, 주전 516년 이후 유대인들은 본국에 있든, 디아스포라에 있든 모두 성전을 통해 율법으로 연결되었고, 회당을 중심으로 일상에서 종교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로마와 셀레우코스 왕국의 수도인 안디옥에도 회당이 들어설 정도였습니다.
회당의 예전은 토라를 낭송하는 것이 중심이었는데, 이 시기의 공용어는 헬라어였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낭송되는 히브리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느헤미야 시대에도 율법을 낭독할 때 히브리어를 몰라서 통역이 필요했는데, 헬레니즘 시대로 넘어오면서 통역의 필요성은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회당마다 헬라어로 낭독하자는 요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번역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70인역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프톨레미 2세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지으면서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두겠다는 욕심 때문에 유대인들의 경전도 놓으려 했는데, 히브리어로 되어 있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헬라어로 번역해달라고 해서 70인역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유대인들도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헬라어로 번역해달라는 요구가 있을 때였고, 이 두 가지 필요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이 쓰던 언어가 ‘아티카 그리스어(Attica Greek)’라면, 흩어진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저잣거리에서 통용되던 ‘코이네 그리스어(Koine Greek)’였습니다. 그런데 70인역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코이네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서 상스러운 언어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일상생활의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만일 성스러운 언어로 고집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상스러운 언어로 성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는 역설을 나중에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70역의 번역으로 인하여 고대 히브리 개념이 공용어로 소통되기 시작했습니다.
*****************************************
이것을 보십시오. 이렇게 세계 역사는 강대국들과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요동치고 패권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계속해서 바뀌었습니다. 자기들이 세계를 이끌어간다고 자기들도 생각했을 것이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인간이 한 일이겠습니까?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고요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입니다. 이것이 번역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던 이방인들도 하나님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그들이 듣고 금방 이해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인간이 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이끌어가십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것인 줄 알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고요히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매일 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세상과 인생을 보는 하나님의 시각을 배우고, 그 시각으로 세상과 주변과 내 삶이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