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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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0일 수요예배
✦ 이단 돌발 질문에 대한 답변 25 ✦
약속의 성취 1
(마태복음 6장 9~13절)
신천지는 자기들이야말로 성경대로 이루어진 천년성, 곧 천년왕국의 도성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들은 신천지야말로 이 땅에 이루어진 천국이며, 조만간 성경대로 땅의 신천지에 하늘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그대로 임하여 하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신천지가 특별하고 유일한 구원의 장소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들이야말로 성경대로 이루어진 곳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그중 첫 번째가 주기도문에 관한 것입니다.
[질문 1] 주기도문의 참 뜻을 아는가?
1) 주기도는 예언의 말씀이다?
신천지는 주기도를 단순한 기도문으로 보지 않고, 주기도가 장차 이루어질 예언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주 재림의 때에 성취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신천지가 주기도의 의미를 자기들의 배도, 멸망, 구원의 틀에서 해석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주기도를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으로부터 기도문을 배워서 기도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기도 운동은 메시아를 대망했던 경건한 바리새인들이나 에세네파에게서 종종 일어났던 움직임이었습니다. 당시 각 종파는 고유의 신학과 종말에 대한 소망을 담은 기도문을 만들어 그것을 반복적으로 암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런 기도문에 익숙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문으로 ‘카디쉬’가 있는데,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일 때마다 암송하는, 비교적 내용이 짧은 기도문입니다. ‘카디쉬’라는 말은 아람어로 ‘거룩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카디쉬 기도문을 보면 주기도와 유사한 표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그의 나라가 세워지고 임하는 것, 즉 그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기대와 열망은 특별히 1세기 당시 로마제국의 압제 가운데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열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러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땅에 깔며 나귀 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세기 전인 주전 142년에 마카비 혁명 이후 마카비 집안의 둘째 시몬이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원래 ‘마카비’라는 말은 ‘망치’라는 뜻인데 셋째 유다의 별명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그 집안을 마카비 집안으로 불렀습니다. 그들이 주동해서 일으킨 혁명이 마카비 혁명이고, 그것이 성공해서 셀류코스 왕조를 몰아내고 100년 정도 독립을 이룬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집안의 유다는 일찍 죽고 둘째 시몬이 왕이 되어 완전한 독립을 이룬 것이 주전 142년인데, 그때 시몬이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드디어 독립을 이루었다!’ 하면서 그랬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의 지배를 받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나뉘어져 이집트 쪽의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또 북쪽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독립을 이루고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 들어오니까 너무 기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된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주전 63년에 점령하면서 다시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100년쯤 뒤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능력을 보이시니까 사람들이 또 열광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자기들의 왕이 되실 줄 알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겁니다. 로마로부터 독립을 이룰 것을 기대하며 그랬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이 당시 유대인들의 머리에 꽉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카디쉬 기도문이 주기도문과 비슷한 표현은 있지만 그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자기들이 강한 나라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임하는 것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들의 나라, 유대인의 독립 왕국을 기대한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 역시 유대인들이 독립을 이루고 강력한 나라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그 방향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용이 비슷해 보여도 완전히 다른 뜻의 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기도를 가르친 것은 예언을 선포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담은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이 모두 헛되고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올바른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염원하는 나라는 유대인들이 바라는 대로 로마제국을 대체하는 정치적인 독립 국가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를 가르쳐주신 이유는 중언부언하고 외식하는 방향성 없는 기도를 경계하시고, 제자들에게 기도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주기도문’ 앞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은 기도할 때 주의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다음,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주기도를 제시하십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5)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9절)
그러므로 주기도는 예언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담아 중언부언하며 허공을 치는 메아리 같은 기도로 가득했던 당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이자 표준입니다.
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신천지는 하나님 말씀의 씨로 난 자만이 주기도문의 첫 구절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안에 진리가 없으므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고(요 8:44), ‘주여, 주여’라고 부르기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다는 점을 지적합니다(마 7:21-23).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고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의 씨로 거듭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씨는 신천지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즉, 신천지의 말씀을 깨달은 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장차 두 가지 씨, 즉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릴 것을 약속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렘 31:27)
신천지는 이 ‘씨’라는 단어를 가져다가 예수님이 2천 년 전 처음 오셔서 이 약속대로 ‘씨’를 뿌리셨다고 하면서(마 13:24), 그 내용이 바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씨는 곧 말씀이며(눅 8:11), 씨가 뿌려진 밭은 예수님의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마귀가 가라지, 곧 마귀의 씨를 덧뿌렸으니(마 13:25), 예수님의 교회에는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가 함께 자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재림의 추수 때 하나님의 씨로 난 알곡 성도가 추수되어 곳간인 시온산, 곧 신천지 12지파로 추수되어 오게 되었고, 신천지로 들어온 신천지인만이 하늘 곧 영계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 역시 너무나 황당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신천지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기도는 예언이 아니라 올바로 기도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둘째, 초대교회 성도들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죄 사함을 받고 정죄함이 없는 자입니다(롬 8:1).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 거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양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셋째, 성도라면 하나님을 단순히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넘어 ‘아빠’ 하나님으로 부르는 용기 있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의 ‘아버지’는 헬라어로 ‘파테르’인데, 이것이 아람어로 ‘아바’에 해당하며, 이 단어는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르는 호칭입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여”(막 14:36)”라고 부르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도록 하십니다.
넷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친밀한 언약 백성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출 4:22)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구약시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감히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만드신 전지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조심스러워서,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인데 같은 모음을 가지고 ‘아도나이’라고 하며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 대신 하나님이 계신 ‘하늘’만을 사용하여 ‘하늘나라’라는 말을 사용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먼 하늘에 계시는 두려운 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 유대인 중에는 하나님을 감히 ‘아빠’라고 부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고,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도록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다섯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빠로 고백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이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오셔서 아빠 노릇을 해 주시는 친밀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여섯째, 예레미야의 예언(렘 31:27)이 성취된 결과로 추수된 자가 신천지라는 주장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역사적 배경과 문맥을 무시하고 그냥 갖다 붙인 겁니다.
예레미야 31장 27절에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모두 뿌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서 좋은 씨는 예수님이 뿌리시고, 가라지는 원수가 뿌립니다(마 13:37-38). 따라서 이 두 본문을 예언과 예언 성취의 관계로 연결하는 것은 단순히 비슷해 보이는 ‘씨’라는 말을 서로 갖다 붙인 짜깁기에 불과합니다. 전혀 역사적, 성경적, 신학적 배경도 없이 말만 갖다 붙였습니다.
예레미야 31장 27절은 하나님이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실 때(렘 31:23)’, 즉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귀환하게 하실 때, 황폐하게 된 유다와 모든 성읍에 ‘사람의 씨’(사람의 자손)과 ‘짐승의 씨’(동물의 새끼들)를 모두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역사를 무시하는 무식한(?) 해석입니다. NIV 영어성경은 ‘씨’를 ‘후손’(offspring)으로 번역했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0절)
신천지는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이 땅에 임하는 ‘나라’가 바로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하늘 새 땅’이라 불리는 자기네 신천지라고 주장합니다. 구약에서 영계의 하나님 나라가 모세의 장막에 임했듯이, 예수님의 초림 때는 그 천국이 예수님에게 임했고, 재림 때인 지금은 ‘이긴 자’라 부르는 이만희 총회장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망하는 자들은 이 땅에 임한 천국인 신천지를 찾아가야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어떻게 반증할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습니다. 메시아가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눈에 보이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공동체로서 새롭게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기대를 거부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그대로 임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한국에 있다, 과천에 있다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신천지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가 성도 각자의 마음 가운데 임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 있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이 그 사람 안에 임하심으로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면 거기가 어디인지에 상관없이 예수님이 함께 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두세 사람’은 공동체의 최소단위로,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공동체와 성령으로 함께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영어로 ‘the Kingdom of God’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다른 말로 하면 ‘왕국(kingdo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왕(king)’이 ‘다스리는(dominion)’ 모든 영역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지리적 개념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에 순종하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경험하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하나님의 통치는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영접할 때 그 사람 안에 들어오십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고전 12:3).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내주하시면서 그 사람의 삶을 인도하시고 강건하게 하시고 통치하십니다(고전 3:16, 고후 1:22, 갈 5:18, 엡 3:16). 이런 성령님의 통치 안에서 크리스천은 의,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평강(평화)과 희락(기쁨)을 경험합니다.
신천지는 하나님 나라라고 자처하는 자기네 신천지 안에서 이런 의와 평강과 희락을 경험합니까? 그 반대로 그들은 신천지에 들어감으로써 가족을 원수처럼 여기고, 가족과 불화하여 싸우고 갈라집니다. 그래서 가출과 이혼을 불사합니다.
또한 신천지 사람들은 신천지 안에서도 전도의 열매에 대한 압박으로 끊임없이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피드백을 준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비난과 책망이 난무하고, 단체 대화방에 대답하지 않으면 대답을 종용하며, 상황을 끊임없이 보고하도록 노예처럼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과연 그런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겠습니까?
다섯째,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말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짠맛을 내고, 세상의 어둠 가운데 환하게 빛을 비춤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신천지인들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며 숨어서 지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삶과 미래를 포기하고, 신천지 안에 숨어 들어가 신천지가 천국이라 믿으면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팁니다. 노예처럼 정신없이 살아가며 그곳에서 끊임없이 전도 열매를 강요받고 매주 신천지로 데려갈 사람들을 찾아서 보고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안고 삽니다.
그래서 몸도 병들고, 마음도 병든 채 힘겹게 살아갑니다.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의 능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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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보면, 신천지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게 아니라, 자기네 신천지 교리를 따르며 살아갑니다. 물론 단체마다 정관이 있고 교회에도 헌법과 내규가 있어서 따라야 하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라 가장 높은 권위가 자기네 교리와 교주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된 집단이고 이단인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 순종하며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는 우리가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