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1tTRnG1fQEM?si=8V_fwwt3PKxzlaeS&t=93
2024년 10월 30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8 ✦
헬레니즘의 거친 파도
(다니엘 11장 28~32절)
1.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지금까지 우리는 제2성전 건립과 페르시아 시대, 알렉산더에 의한 헬레니즘 시대와 알렉산더의 뒤를 이은 네 명의 디아도코이(계승자들) 시대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신구약 중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마카비 전쟁에 대해 살펴볼 텐데, 그에 앞서 여기서부터 신약 시대까지 성경의 역사성을 증언할 역사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입니다.
## 그림 1: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이전에도 종종 언급했던 요세푸스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에 태어난 유대 역사가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은 <유대 전쟁사>인데, 요세푸스는 주전 167년에 일어난 마카비 전쟁과 주후 66~70년에 벌어진 유대 전쟁을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본 역사가였습니다. 그의 관점으로 역사를 본다면 마카비 전쟁부터 유대 전쟁까지 230여 년간의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주후 37년경 예루살렘에서 유대 귀족 가문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유력한 제사장 가문이었고, 모친은 마카비 혁명을 이끌고 독립을 쟁취하여 집권했던 하스몬 왕가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소위 금수저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는데, 귀족들이 누리던 헬레니즘 사상과 문화를 접했고, 그로 인하여 유대 역사를 상당히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으니까 유대교와 율법에 통달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본명은 마티아스 요세푸스(Matthias Josephus)입니다. 놀랍게도 주후 66년 제1차 유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유대인들을 이끌고 로마 군대에 대항하여 싸운 군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요타파타(Jotapata)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하면서 포로로 잡혔고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투항했습니다.
## 그림 2: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는 주후 70년 로마 황제가 된 인물인데, 요세푸스는 투항한 이후 바로 이 로마 황제의 측근이 되었습니다.
유대에서 주후 66년 반란이 일어나자 그 악명 높은 네로(Nero)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파견하여 유대 반란을 진압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네로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한 채 주후 68년 갈바 장군의 반란 때 위기를 느끼고 자살하여 죽었습니다.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이어져 오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혈통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유력자들이 황제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게 되면서 약 2년간 내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갈바(Galba),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 같은 장군들이 짧은 시간 차례로 황제에 올랐습니다. 각각 몇 달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1년 사이 무려 4명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로마의 복잡한 상황을 지켜보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유대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아들 티투스에게 유대 반란 진압을 맡겨놓고 자기는 로마로 갔습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서 비텔리우스를 물리치고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주후 69년에 평민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황제 자리에 오름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요세푸스에게는 평민 출신의 황제를 위해 해야 할 분명한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새로 시작한 플라비우스 왕조를 위한 ‘프로파간다(propaganda)’, 즉 여론을 친 황제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도 어용 언론이 있는데, 친정부 언론도 있고 반정부 언론도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친황제 쪽으로 글을 쓰는 역사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황제에게 고용된 황실 역사가가 되었고, 이름도 마티아스에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요세푸스가 황실에 고용되어 월급을 받으면서 주후 77년 무렵에 썼던 <유대 전쟁사>에는 베스파시아누스와 아들 티투스의 행적을 높이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 반란을 진압하러 간 장군이었으면서도 유대인들에게 연민을 가졌다고 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모습, 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자기가 그렇게 했으면서도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린 티투스의 모습이 기록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랬다기보다는, 그들을 띄워주기 위해 아부성으로 그렇게 쓴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요세푸스가 변절자로 보였겠지만, 황제에게 아부하는 내용을 포함한 것은 사실 역사가로서 <유대 전쟁사>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 그가 지불해야 했던 일종의 비용이었습니다. 자기도 내키지 않았겠지만, 아부하는 내용을 쓰면서 유대 전쟁사를 기록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안 썼으면 책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세푸스는 플라비우스 가문을 위한 활동을 충실히 감당하며 찬양하는 글을 썼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아부와 검열의 거품을 걷어 내고 본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 보화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대 전쟁사>는 유대 전쟁과 관련된 유일무이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역사 자료 중 유대 전쟁에 관한 자료는 이 <유대 전쟁사>밖에 없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주후 79년 죽은 후 그의 아들이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과 2년 후인 81년에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그를 이어 티투스의 동생이자 제2의 네로라고 불리던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666’이라고 칭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아주 악명 높은 황제였고, 악하게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가 다스리던 주후 80~90년대는 이전과 다른 시대였습니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로마제국이 안정되어 아부하는 내용을 써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요세푸스가 90년대에 쓴 <유대 고대사>, <자서전>, <아피온 반박문>과 같은 책들은 주후 1세기의 신약 시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약 성경이 여전히 편지 형태였고, 주후 397년이 되어서야 정경으로 확정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요세푸스가 남긴 기록은 교회사에 너무나 중요한 기록입니다.
2. 마카비 전쟁과 유대 전쟁
요세푸스의 시선을 따라 마카비 전쟁부터 유대 전쟁까지의 시간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표를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앞으로 성경을 볼 때 무척 큰 도움이 됩니다.
## 그림 3: (표) 마카비 전쟁과 유대 전쟁
주전 333년에 알렉산더가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헬레니즘 세계를 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유대 사회에도 헬레니즘의 잔잔한 파도가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전 175년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4세가 즉위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전 175년을 중심으로 그전까지가 헬레니즘의 잔잔한 파도라고 한다면, 175년부터는 헬레니즘의 거친 파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 사회에 헬레니즘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주전 167년에 마카비 전쟁이 일어났고, 주전 142년에 유대인들은 마침내 바라고 바라던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카비 집안이 제사장인데도 왕이 되어 다스린 하스몬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80년 정도로 짧았습니다. 마카비 전쟁까지 합치면 100년 정도입니다.
그러다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면서 유대인들은 또다시 외세의 압제를 받게 됩니다. 그때부터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활동하신 기간을 보통 ‘공생애(公生涯)’라고 하는데, 대략 주후 30년 무렵에 3년 정도 활동하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후 70년에 제1차 유대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 이 표입니다. 표를 보면 마카비 전쟁과 유대 전쟁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에 예수님의 공생애 시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를 중심으로 두 전쟁이 이중으로 겹치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마카비 전쟁으로부터 이어진 생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역사와 무관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카비 전쟁, 하스몬 왕조, 로마의 점령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우리 식으로 표현할 때 ‘근현대사’에 해당합니다. 바로 그 시기가 신약 시대이기 때문에, 그때를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이 시대는 유대 전쟁이라는 시기에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요세푸스가 유대 역사를 기록한 것이나,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 시대를 기록한 것 모두 유대 전쟁 전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록 활동은 유대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그들이 기록할 당시의 시대 상황과 영향을 모두 생각할 때 성경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두 개의 전쟁이라는 이중 시대의 관점에서 보아야 신구약 중간사의 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3. 마카비 전쟁의 전후 상황
알렉산더가 이룩한 헬레니즘 세계는 거대한 시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드라크마라는 화폐가 통용되었습니다. 성경에도 드라크마가 나옵니다. 그리고 세계는 무역, 금융, 문화, 언어를 공유하며 연결되었습니다. 그 시기 유대 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를 연결하는 길목이었고, 지중해 지역에서 아라비아 내륙과 홍해로 들어가는 상업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땅은 아주 기가 막힌 위치에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오든,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든, 남쪽에서 위로 오든,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항상 강력한 나라들의 침입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그 반대로 생각하면 상업이 아주 발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때는 길을 막고 통행료를 받아서 수입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보면, 누구나 탐내는 지역이라는 겁니다.
유대의 지방 시골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별로 상관이 없을 수 있지만, 예루살렘 같은 대도시에서는 헬레니즘에 적응한 사람들이 상류층으로 발돋움할 기회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유대인 귀족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헬레니즘 교육을 시켰습니다.
스룹바벨의 제2성전이 건립된 이후 대제사장 가문의 정통성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손들, 즉 사독 계열에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중 오니아스 가문은 대대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사회의 실세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상업 도시로 급부상하면서 속주(식민지)의 세금을 비롯한 경제를 모두 맡아서 주관할 사람의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대제사장이 세금을 거두거나 교역하는 것까지 주관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이런 역할을 대대로 감당해 온 토비아스 가문이 급부상합니다. 이들이 했던 일은 ‘세금 징수 관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토비아스 가문의 요셉 벤 토비아스(Joseph ben Tobiah)는 주전 3세기 유대 사회의 핵심 인물이 됩니다.
이 토비아스라는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토비아스는 주전 5세기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 귀환 공동체를 방해했던 ‘산발랏과 도비야’(느 4:7)의 바로 그 도비야 혈통입니다. 그 가문의 후손이 200년 정도 지난 주전 3세기에 와서도 유대인들의 경제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역사의 악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정리한 표를 보십시오.
## 그림 4: 두 왕조와 유대 사회
프톨레미 4세(주전 221~204년) 때 유대 지역에 대한 통치권이 점점 셀레우코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유대는 주전 200년까지 프톨레미의 지배 아래 있었다가, 주전 200년 5차 시리아 전쟁이었던 파네이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가 승리하면서부터 유대 사회의 주인이 바뀌어 셀레우코스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전 204년 대제사장이 된 오니아스 3세는 친프톨레미 성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역에 대한 지배의 무게 중심이 점점 셀레우코스로 기울어 가는 것을 본 토비아스 가문은 재빠르게 친셀레우코스 노선을 취합니다. 결국 토비아스 가문의 바람대로, 주전 200년부터 셀레우코스가 유대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에게는 어려운 시기가 다가온 것입니다.
제2성전이 세워진 뒤로는 줄곧 사독 계열 대제사장이 성전의 책임자였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대제사장은 하나님이 임명하셨고, 한 번 되면 죽을 때까지 종신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대제사장 직분을 뺐고 빼앗기는 참담한 상황이 시작됩니다.
“북방 왕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리니 그는 마음으로 거룩한 언약을 거스르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본토로 돌아갈 것이며” (28절)
주전 175년부터는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서 헬레니즘의 거친 파도가 밀려들었습니다. 북방 왕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가 남방 프톨레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방에서 빼앗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자기 본국인 셀레우코스로 돌아갔는데, 돌아가는 길은 유대 땅을 지나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구약의 외경인 마카베오상 1~2장에 보면, 여기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는데, 폭군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죽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소문에 힘입어 유대인들은 유대 땅에 주둔하고 있던 셀레우코스 군사들을 내쫓았습니다. 그 소식이 이집트에서 돌아오고 있던 안티오코스 4세에게 들려왔고, 그는 이것이 명백하게 자기에 대한 반란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 유대인들에게 아주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28절에 나온 대로 거룩한 언약인 율법을 거스르며 자기 마음대로 한 것입니다. 먼저 그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명령에 거역하는 유대인들을 다 죽였으며,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박해를 가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본토로 돌아갔습니다.
그러한 헬레니즘의 물결에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는 소극적으로 대처했는데, 그것에 불만을 가졌던 그의 동생 야손이 형을 몰아내고 셀레우코스의 힘을 등에 업고 대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뜻대로 대제사장이 임명되는 성직 매매도 발생합니다. 야손은 소위 자기를 ‘꽂아준’ 사람들의 의도대로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김나지움(gymnasium)과 경기장과 극장을 건축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은 이때부터 그리스의 한 폴리스(polis)처럼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토비아스 가문에게는 그보다 더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대제사장이 임명되어 정말 자기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안티오코스 4세 입장에서도 토비아스 가문이 강해야 세금 걷기가 더 편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전 172년 친셀레우코스 성향이었던 메넬라오스가 야손 대신 꼭두각시 대제사장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독 계열이 아니라 다른 아론 계열의 제사장이었기에 정통성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페르시아나 알렉산더 시대에도 없던 일들이 주전 175년부터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헬레니즘의 거친 파도가 유대 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대제사장 직분을 타락하게 만들었기에, 율법을 목숨처럼 여긴 사람들은 자기들의 경건한 신앙을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경건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을 가리켜 ‘하시딤’이라고 합니다. 하시딤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시대를 언급한 마카베오하의 기록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23 삼 년 후, 야손은 앞에 말한 시몬의 동생 메넬라오스를 왕에게 보내어 돈을 전달하고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의 결재를 받아오게 하였다. 24 그러나 메넬라오스는 왕을 만나서 자기가 가장 큰 권위를 가진 것처럼 꾸며 야손보다 은 삼백 달란트를 더 바쳐 대사제직을 차지하였다. 25 그는 왕명을 받들고 돌아왔지만 대사제직을 맡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고, 잔인한 폭군의 기질과 야수같이 포악한 성격을 지닌 자였다. 26 이렇게 야손은 자기 형을 몰아냈다가 자기도 다른 사람에게 몰려나서 암몬 사람들의 고장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마카베오하 4:23~26, 공동번역)
이렇게 대제사장의 정통성이 돈 앞에 무너지고, 하나님이 아닌 권력자가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이런 흐름은 예수님 시대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신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로마가 파견한 총독이나 헤롯 같은 권력자들의 입맛대로 세우고 폐하는 직분이었으니, 예수님 시대의 종교인들에게 진정한 주님은 과연 누구였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헬레니즘 물결은 유대 땅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유대인 귀족들은 회당에서 율법을 배우는 것보다 김나지움에서 그리스 교육을 받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또한 올림픽 제전 같은 그리스 경기가 도입되었고 종교인들은 예배보다 운동 경기에 열광하게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 경기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그리스 신들을 섬기는 제전의 일부였습니다. 또한 그리스 경기는 나체로 진행되었기에, 유대인 참가자라면 금방 표시가 났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 사이에 할례를 감추는 수술이 유행하게 되었으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헬레니즘의 거친 파도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다시 묻게 되었습니다.
“29 작정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 30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면서 맺은 거룩한 언약에 분노하였고 자기 땅에 돌아가서는 맺은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들을 살필 것이며” (29-30절)
안티오코스 4세는 세 번째로 남방 왕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집트에서 자기들을 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대군을 일으켜 남방에 쳐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라고 기록된 것처럼 되었습니다. 30절을 보면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라고 되어있는데, 깃딤은 지금의 키프로스(바나바의 고향 구브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로마 군대가 그 싸움에 개입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남방 왕, 즉 프톨레미가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니엘이 본 환상처럼, 셋째 나라인 헬라 제국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넷째 나라인 로마가 역사 속에 강력하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이때는 이미 로마가 이집트에 와서 섭정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지방을 쳐들어갈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로마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장군이자 영사인 가이우스 포피리우스는 안티오코스 4세에게 나아가서 로마 원로원이 준 편지를 전달했는데, 그것은 이집트에서 물러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로마와 전쟁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자기 아버지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에 패했고 그래서 자기도 한때 로마의 인질로 잡혀 있었던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의 강함을 알았기에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면서” 중간에 있던 유대 땅에 그 분풀이를 대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엄청난 핍박이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서쪽 해안의 배들이 그를 치러 올 것이고, 그 때문에 그는 낙심할 것이다. 그는 퇴각하는 길에, 거룩한 언약을 맺은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할 것이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저버린 사람을 뽑아서 높이 앉힐 것이다.” (30절, 새번역)
그는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했고, 제사도 드리지 못하게 했으며,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약 성경을 모두 찢어서 불살랐고, 혹시라도 성경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면서 “거룩한 언약을 저버린 사람을 뽑아서 높이 앉힐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 것과 같이 그대로 행했습니다. 즉, 자기의 정책에 동조하는 유대인들을 높은 자리에 앉혔던 것입니다.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31절)
안티오코스 4세는 주전 169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기금을 약탈해서 자신의 재정 상태를 만회했고, 동시에 본격적으로 유대 사회에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시대 이후로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던 박해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안티오코스 4세와 유대 지도자들이 대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안티오코스 4세를 통해 권력과 이권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자진해서 헬레니즘을 유대 사회에 들여왔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 그림 5: 주전 2세기 예루살렘 지형도
이 지도는 예루살렘의 지형과 성벽을 보여 줍니다. 성벽 인근에 ‘다윗의 도시’라는 그리스식 폴리스가 건설되었고, 요새화되었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친셀레우코스파 대제사장 메넬라오스와 토비아스 가문을 비롯한 귀족들은 유대 사회에 헬레니즘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요새에서 유대인 민중들의 반발에 맞섰습니다.
이 시기의 종교 지도자들과 귀족들의 성향은 신약 시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이들은 셀레우코스 왕조를 의지했고, 신약 시대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를 의지했다는 것뿐입니다.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착 붙었던 친일파들이 있었고, 오늘도 친미파나 친중파가 존재합니다.
그들만 그렇겠습니까? 그들은 정치 세력이 착 붙었지만, 우리도 하나님보다 뭔가를 더 의지하며 사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친일파를 얼마나 싫어합니까? 그런데 나는 정말로 친하나님파인지, 아니면 친재물파나 친명예파는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부흥의 불길이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이런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 이루어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도 세상이 복잡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쓰임받도록 기도하며 나아가야겠습니다. 매일매일 나는 정말 누구를 의지하는가를 돌아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둘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