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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2일 수요예배
✦ 이단 돌발 질문에 대한 답변 21 ✦
재림의 징조 4
(마태복음 24장 30~35절)
[질문 9] 예수님이 정말 구름 타고 오실까? 그가 타고 오시는 구름은 어떤 구름일까?
이 질문을 보고서 ‘참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구름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이런 것으로 성도들을 현혹하는 겁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0절)
신천지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구름을 타는 것이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비행기도 구름을 뚫고 지나가는데, 예수님이 손으로 잡히지도 않는 구름을 어떻게 타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름은 작은 물방울이 모인 것으로, 사람이 탈 수 없는 물체입니다.
그래서 신천지는 혹시라도 예수님이 구름을 타신다면 어떤 구름을 타실 것이며, 그 구름이 뭉게구름이냐, 나비구름이냐, 실구름이냐 질문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머뭇거리는 기성교회 성도들에게 신천지는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29)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이 말씀으로 그들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런데 신천지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육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본문에서 ‘구름’은 영을 뜻하며,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영으로 강림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한 육체에 임하여 오시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깔린 의도는, 오늘날 예수님께서 영으로 임한 사람이 바로 자기네 신천지 교주 이만희 총회장임을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이만희 총회장이 또 다른 보혜사이고 특별한 약속의 목자인 것은, 예수님의 영이 임하여 함께하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천지는 예수님이 오늘날 이만희 총회장의 육체에 구름을 타고, 즉 영으로 오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떤 성경적 답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고(마 8:16), 물 위를 걸으신 분입니다(마 14:25). 바다와 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구름을 타지 못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신천지야말로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게 아니라 그것은 영적인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은, 단지 과학적인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것은 결코 바른 신앙적 태도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빽빽한 구름이 주변을 덮었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출 19:16)
또한 예수님이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도 구름이 와서 주변을 덮었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마 17:5)
그뿐 아니라, 이사야 19장을 보면 하나님이 빠른 구름을 타고 임하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사 19:1)
셋째, 예수님이 구름을 타신다는 것은 다니엘서에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 즉 예수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즉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예언했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단 7:13)
넷째, 예수의 영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는 영이지, 특정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 또는 고유 명사 단수형인 ‘성령(the Holy Spirit)’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영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15)
한 분 성령님은 오순절 성령과 진리의 성령으로 구분될 수 없습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이 곧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사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구주이심을 선포했으며, 땅끝까지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질문 10] 예수님이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 소리로 온다고 하는데, 그 나팔은 몇 개나 될까?
이것도 역시 참 쓸데없는 질문입니다. 나팔이 몇 개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질문하여 현혹하려는 겁니다.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31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6)
신천지는 이 구절들에 대해 상식적 수준에서의 의문을 제기합니다. 천사가 나팔을 부는데 어떻게 나팔 소리가 전 지구에 다 들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온 세계에 들릴 만큼 많은 나팔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게다가 지구상에는 시차가 있는데, 이런 시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재림을 전 세계가 동시에 볼 방법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러한 질문들 역시 이 말씀이 비유의 말씀이며, 교주 이만희를 가리켜 예언한 말씀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밑 작업입니다.
신천지는 마태복음 24장 31절과 데살로니가 4장 16절의 나팔은 육적 나팔이 아닌 영적 나팔이며, 나팔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육체를 가리키고, 나팔 부는 자는 영(천사)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나팔이 육체인 이유는 이사야가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사 58:1)
그러면서 나팔 소리는 신약 계시록의 성취를 알리는 증거의 말씀이고,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씨로 난 자들, 곧 자기네 신천지 신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첫째,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전부 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일입니다. 본문 31절의 나팔은 ‘하나님의 나팔’(살전 4:16)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은 온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들릴 수 있는 능력의 나팔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의 나팔 소리를 어떻게 온 세상이 듣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럴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9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실 때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함께 매우 큰 나팔 소리가 들리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나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벌벌 떨 정도였는데, 그렇게 사람을 벌벌 떨게 할 정도의 장엄한 나팔 소리라면 얼마나 큰 소리였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말씀이 논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왜곡할 가능성을 크게 만들 뿐입니다.
둘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팔이 불릴 때 예수님이 ‘친히’ 강림하십니다. ‘친히’라는 말은 영이 어떤 육체를 빌려서 신접해 온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이 땅에 그 모습 그대로 직접 나타나신다는 뜻입니다.
셋째, 마태복음 24장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때 택하신 자들, 즉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도 빠짐없이 불러주신다는 데 초점이 있는 반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세상의 종말 때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재림하시고 무덤에 잠자던 성도들의 육체적 부활이 일어난다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
마태복음 24장 31절에는 신자에 대한 마지막 심판과 운명에 대한 말씀이 없는 반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본문이 전달하는 내용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11] 육체의 구원과 영혼의 구원 중 마지막 때의 구원은 어떤 구원일까?
갑작스럽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평소 구원관에 대해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 않은 성도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8-9)
이런 구절을 보면서 크리스천들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나중에 있을 육체의 구원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신천지의 이런 질문에 당황하기 쉽습니다.
신천지가 기성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기성교회에는 육체가 죽지 않는 영생불사의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신천지 사람들이 꿈꾸는 구원은 영생불사하는 육체의 구원입니다. 신천지는 육체가 영생불사(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한다는 구원의 성경적 근거를 이런 구절에서 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요 8:51)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전 15:51-52)
신천지는 종말에 일어날 육체의 영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나와 있다고 하면서, 여기 나오는 영생은 순교자의 영이 믿는 자의 육체에 부어져 순교자의 영과 하나 되어서 영생불사하는 이른바 ‘신인합일(神人合一)’에 의한 영생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 20:4)
여기서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들’은 순교자의 영혼이고,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은 자들’과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은 신천지 사람들을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종말에는 하늘의 순교자 14만 4천의 영혼이 지상의 신천지 신도 14만 4천의 육체에 들어와서 결합하는 신인합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정말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천지의 이런 잘못된 구원론과는 달리, 올바른 구원론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마지막 날에는 몸의 부활을 포함한 전인적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교회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늘 고백합니다.
둘째, 베드로전서 1장 9절 말씀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에서 ‘영혼의 구원’은 영적 구원이 아닌 육체를 포함한 전인적 구원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영혼’은 사람 내면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존적인 자기 정체성을 말하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전인적인 생명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는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ψυχή)’를 ‘생명’ 또는 ‘목숨’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 말씀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이 말씀에서 ‘목숨’의 헬라어 원어가 바로 ‘프쉬케’(영혼)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에게 자신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육체와 영혼이 함께 전인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신인합일의 개념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넷째, 고린도전서 15장은 전인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성도들은 죽지 않고 모두 부활의 몸으로 순식간에 변화된다는 것입니다(고전 15:51). 이때 이미 죽은 신자들, 곧 순교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모두 무덤에서 일어나 육체의 부활을 경험하게 되고, 이 육체와 함께 영혼이 전인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고전 15:52).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 분리된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다시 결합해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다섯째, 마지막 심판 때는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져 심판받게 됩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4)
마지막 심판 때 ‘죽은 자들’ 곧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게 되고, 믿는 우리의 몸을 주관하던 사망의 권세가 사라지고 결국 우리 몸은 새롭게 살아나 우리의 영혼과 결합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천지가 꿈꾸는 영생불사는 올바른 성경적 구원관과는 완전히 거리가 멉니다. 신천지가 말하는 구원은 내 영이 아닌 순교자의 영혼이 자기 몸에 들어오는 접신 구원인데, 성경은 자기의 영과 자기의 몸이 하나가 되는 전인 구원을 말하지, 결코 다른 영이 내 안에 들어오는 접신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완전히 미신적입니다.
무덤에 잠자던 자들 역시 자기 육과 영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순교자도 마찬가지로, 재림 때 순교자의 육체도 부활하여 자신의 영혼과 하나 되어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천지는 요한계시록 20장 4절을 완전히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은 자’, 그리고 ‘이마와 손에 표 받지 않은 자들’은 모두 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내가 또 보좌들을 보니, 그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심판할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나는,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계 20:4, 새번역)
여기 보면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베인 사람들의 영혼’ 은 곧 ‘그 짐승이나 그 짐승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자들’이고, 동시에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모두 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신천지의 주장처럼 순교자의 영혼이 절하지 않고 표 받지 않은 이들의 영혼과 결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0장 4절은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 곧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 받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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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처럼 말장난으로 우리를 현혹하는 이단의 공격에 흔들리지 말고, 평소에 말씀으로 굳게 서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단지 언제 오실지를 알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오신다면 지금의 우리 몸이 새롭게 변화되어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죽은 다음 오신다면, 우리 영이 재림 때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상관없이, 매일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