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영상 설교: https://www.youtube.com/live/h_ZqD8V0Mtk?si=q04xwQ70UXO0DrMk&t=49
2024년 11월 6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9 ✦
마카비 전쟁과 하스몬 가문의 등장
(요한복음 12장 12~13절)
1. 마카비 전쟁의 시작과 결과
구약부터 신약 시대까지 시대를 크게 구분하면 이렇습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가 멸망 당하며 바벨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불과 47년만인 주전 539년 페르시아에 의해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패권을 잡습니다. 그 후 주전 516년에 스룹바벨에 의해 제2성전이 세워집니다.
주전 333년 헬라 제국 알렉산더의 지배를 받으면서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고, 알렉산더가 죽은 뒤 나라가 넷으로 나뉜 다음인 주전 301년부터 주전 200년까지 유대인들은 남방 왕국인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주전 200년부터 북방 왕국인 셀레우코스 왕조가 유대 사회를 지배하는데, 주전 175년이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그리스, 프톨레미, 그리고 셀레우코스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이런 나라들은 속주 주민들의 자치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비록 주권을 빼앗겼더라도 일반 백성들은 주인만 바뀌었을 뿐이지 큰 변화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2성전을 중심으로 평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전 175년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왕위에 올라 유대인들에게 헬레니즘을 강요하면서 유대인들을 박해한 것입니다. 주전 175년까지 유대 사회는 제2성전을 중심으로 예배 공동체를 형성했고, 대제사장은 다윗 시대 때 대제사장이었던 사독 계열이 담당했습니다. 이것이 대제사장의 정통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사회의 지배권이 프톨레미에서 셀레우코스로 넘어가게 되고, 친셀레우코스 유대 권력자들이 뇌물을 통해서 대제사장직에 오르는 일이 175년에 발생합니다. 이때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성직 매매를 통해서 권력자가 임명하는 사람이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르는 변질된 직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은 신약 성경을 이해할 때 굉장히 중요한 관점입니다. 유대 종교의 중심이었던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니라 뇌물을 통해서 권력자가 임명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권력자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이때도 그랬고 신약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이것이 주전 175년부터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경건을 열망하며 광야로 나간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하시딤’이라고 부릅니다. 그때부터 광야라는 공간은 변질된 유대 종교로부터 참된 회복을 갈망하는 공간이 됩니다.
주전 167년 12월부터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전 유대 지역에 헬레니즘 의식을 강요했습니다. 그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에 대한 제사가 금지되고, 제우스에게 분향하는 제사를 지냈으며,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를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게다가 안식일과 할례가 금지되었으며, 율법 책을 봐서도 안 되고 소유해서도 안 됐습니다. 수많은 유대 여인들이 아들을 낳고 할례를 행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습니다.
물론 안티오코스 4세가 율법, 할례, 제사, 안식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보고를 들은 것을 토대로 뒤에서 지시를 내렸을 뿐이고, 유대 사회 내부를 잘 아는 유대인 귀족들이 구체적인 금지 항목들을 찾아서 그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저리 가라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외세 권력에 붙어서 이익을 보는 것이 더 중요했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들의 권력이 더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처럼 헬레니즘의 거친 물결 앞에 유대인들은 억압받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전 166년 유대 지방 모데인이라는 동네의 제사장 맛다디아(마타티아스) 가문이 반란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19 그러나 마따디아(마타티아스)는 큰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왕의 영토 안에 사는 모든 이방인이 왕명에 굴복하여 각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를 따르기로 작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킬 결심이오. 21 우리는 하늘이 주신 율법과 규칙을 절대로 버릴 수 없소. 22 우리는 왕의 명령을 따를 수 없을뿐더러 우리의 종교를 단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소.’ 23 마따디아의 말이 끝났을 때 어떤 유다인 한 사람이 나와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왕명대로 모데인 제단에다 희생 제물을 드리려 했다. 24 이것을 본 마따디아는 화가 치밀어올라 치를 떨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앞으로 뛰어 올라가 제단 위에서 그 자를 죽여버렸다. 2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교 제사를 강요하기 위하여 온 왕의 사신까지 죽이고 제단을 헐어버렸다. 26 이렇게 해서 마따디아는 전에 비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를 찔러 죽였을 때처럼 율법에 대한 열성을 과시하였다.” (마카베오상 2:19~26, 공동번역)
하스몬 가문의 맛다디아는 자신의 다섯 아들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부 하시딤 무리가 합세해서 일으킨 반란이 그 유명한 마카비 전쟁입니다. 맛다디아의 다섯 아들들의 이름은 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입니다.
사실 맛다디아가 저항하게 된 이유는 정치적인 독립의 쟁취가 아니라,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당시 비느하스를 모델로 하여, 율법을 어긴 범죄에 대해서 율법의 열성을 과시하는 것이 마카비 전쟁의 동기였다고 마카베오 상권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반란은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주전 165년에 반란을 시작한 맛다디아는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죽었고, 그의 셋째 아들이었던 유다를 중심으로 싸워서 주전 164년 12월에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게 됩니다. 유다가 워낙 탁월하게 전쟁을 이끌었고 힘이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망치’라고 불렀는데 바로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마카비’입니다.
한편 당시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적으로는 주변의 로마나 파르티아 같은 강력한 나라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재정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압제를 받아 온 유대인들에게는 정규 군대가 있을 리 없었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전투를 하기에는 모든 것이 불리했습니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다 마카베오는 게릴라 전술을 펼쳐 승기를 잡았습니다. 이때 유다 마카베오가 유대인들을 독려한 내용을 보십시오.
“16 그들이 벳호론 언덕 가까이 왔을 때, 유다가 얼마 안 되는 부하를 거느리고 그를 맞아 싸우러 나갔다. 17 유다의 부하들은 자기들을 치러 나오는 적군을 보고 유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적은 수효를 가지고 저 많고 강한 군대와 어떻게 싸워낼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기진맥진해 있습니다.’ 18 유다가 대답하였다. ‘작은 군대가 큰 군대를 쳐 이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려고 하면 군대가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19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다수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내려 주는 힘에 달려 있다.’” (마카베오상 2:16~19, 공동번역)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이 전쟁에 개입하시기 때문에 적은 수의 군대가 많은 수의 군대를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라고 연설한 것입니다. 마카비 전쟁을 일으킨 동기는 율법에 대한 열성이었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동기와 믿음은 여호수아 같은 구약 시대의 전쟁의 연장선상이라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사람들의 인식이었습니다. 여호수아 때도 객관적인 수나 전력으로는 승리하기 힘들었는데, 하나님께서 해를 멈추시거나 우박을 내리시는 등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유대인들은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셀레우코스는 그 당시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지중해 세계에서 세력을 넓혀가던 로마의 등장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란에 대해서 전력을 투입할 여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그저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 그 당시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틈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안티오코스 4세가 주전 163년 사망하자 왕위 계승 문제까지 터졌습니다. 결국 내우외환에 빠져 있던 셀레우코스 왕가는 외교 정책을 통해 마카비 전쟁을 수습하려고 했고, 그것을 위해 아론 계열의 알키모스를 대제사장에 임명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셀레우코스 측이 이런 중재안을 제시하자 마카비 가문과 일부 사람들은 전쟁을 멈추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반면 사독 계열이 아닌 사람이 대제사장직에 오르는 것을 신앙의 변질로 생각하고 절망해서 광야로 나가 진정한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하시딤’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권력을 잡게 되고, 광야로 나간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는데, 바로 이것이 나중에 여러 유대교 종파가 생기는 계기가 됩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 각 유대 종파의 특징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이런 맥락을 모른다면 그것은 단순한 이론적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을 알고 본다면, 성경에 나오는 유대 종파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성경이 우리에게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마카비 전쟁은 신약 시대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특히 유다 마카베오가 유대인들을 독려하며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다수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내려 주는 힘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는 부분은 주목해서 볼 만합니다.
군사력의 열세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마카비 전쟁에서 싸웠고, 결국 승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했습니다. 그때 성전을 하나님께 다시 봉헌하며 새로운 절기가 생긴 것이 바로 ‘하누카(Hanukkah)’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수전절’이라고 되어 있고, 새번역에는 ‘성전 봉헌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때부터 이 절기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 로마의 지배를 받을 당시 요한복음에 수전절이라고 나오는 배경은 유대인들이 마카비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면서 로마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 시몬, 유다 같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런 이름들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하스몬 가문을 떠올리며 ‘이분이 우리에게 독립을 주실 분인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체포되셨을 때, 칼을 빼서 휘둘렀던 베드로의 행동도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겟세마네에 출동했던 병력은 성전 경비대뿐 아니라 로마 수비대도 있었습니다. 강력한 로마 군대 앞에서 칼을 뽑아 드는 것은 일반인이 감히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3)
사실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마카비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마카비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연설한 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렇듯 마카비 전쟁은 예수님 시대에 많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2. 하스몬 왕조의 시작
그렇다면 수전절(성전 봉헌절)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한 이후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마카비 전쟁을 앞장서 이끌었던 유다 마카비의 하스몬 가문은 유대가 일시적 독립을 이루었을 때 유대 권력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마카비 전쟁을 시작한 맛다디아가 사망한 후에 그 권력을 다섯 아들이 넘겨받았습니다. 그중 셋째 아들이었던 유다 마카베오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주전 160년에 죽었고, 그의 죽음 이후 막내아들이었던 요나단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 그 상황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습니다.
## 표: 하스몬 가문
누구보다 야심이 많았던 요나단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사독 계열이 아닌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 알키모스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독 계열의 사람들은 이미 알키모스가 대제사장에 오를 때 광야로 나갔습니다. 유대 종교가 경건의 능력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예루살렘을 떠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중 이름이 안 알려진 소위 ‘의(義)의 교사’라고 불리는 사람을 중심으로 광야에서 쿰란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대제사장 알키모스가 살해됨으로써 주전 159년부터 152년까지 무려 7년 동안 대제사장 자리가 공석이 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던 시절에도 대제사장이 있었는데, 이때 7년 동안 대제사장이 공석이 되어 버린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 종교인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첫 번째, 사독 계열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광야에 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변질된 유대 종교에 맞서서 참된 율법의 회복을 열망했던 무리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에세네파가 됩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이 에세네파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두 번째, 하시딤 그룹 중에서 권력을 잡았던 하스몬 가문 주변으로 다시 돌아왔던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사두개파가 됩니다.
세 번째, 대제사장 직분이 변질된 것에 회의를 느끼고 백성들 속으로 들어간 무리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바리새파가 됩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이 공석이었던 이 7년은 세 가지 종파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기간입니다.
결국 지방 하급 제사장 가문에 불과했던 하스몬 가문의 요나단은 주전 152년 스스로 대제사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비록 권력을 가졌어도 요나단 역시 정통성은 없었습니다. 사독 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0년간 대제사장직을 맡아서 일했습니다.
주전 142년에는 하스몬 가문의 시몬(맛다디아의 둘째 아들)이 셀레우코스 세력을 몰아내고 마침내 온전한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수백 년간 외세의 압제를 받아 오던 유대 사회가 드디어 정치적으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것이 주전 586년이었으니까, 무려 444년 만에, 그리고 제2성전이 건립된지 374년 만에 나라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왕이 되는 동시에 대제사장직도 겸했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때 사독 계열의 사람들도 여전히 광야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정통성이 무너졌음에도 하스몬 가문에 의해 독립을 얻었다는 이유로 다수의 유대인들은 시몬에게 열광했습니다.
“백칠십일 년 이월 이십삼일에 유다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 소리도 드높게 비파와 꽹과리와 거문고 소리에 맞춰 찬미와 노래를 부르면서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민족의 큰 적이 참패를 당하고 이스라엘 땅 밖으로 쫓겨간 것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마카베오상 13:51, 공동번역)
시몬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시몬에게 환호했고, 유대인들은 그를 구원자와 은인이라고 하면서 열광했습니다. 시몬은 왕과 대제사장 직분을 동시에 장악했고, 사독 계통의 정통 대제사장 신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셀레우코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는 이유로 율법의 정통성이나 대제사장 직분의 정통성은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 것입니까?
마카베오서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시몬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큰소리로 환호하며 노래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아주 낯익고 어디서 많이 보던 것입니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2-13절)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주전 142년 시몬이 셀레우코스를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정통성은 큰 이슈가 아니었습니다. 독립을 하느냐 아니냐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카비 시대와 신약 시대가 굉장히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자기들이 원하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면 율법을 무시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짜 주인입니까?
3. 마카비 전쟁에 대한 평가
마카비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유대교’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페르시아 시대 이후로 유대교가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뚜렷한 형태로 등장한 시점은 마카비 전쟁 중이던 때였는데,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줍니다.
믿음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는 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믿음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시련과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주전 164년 12월에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중단되었던 성전 제사를 회복했습니다. 이것이 하누카(수전절, 성전 봉헌절)이고, 이것은 지금까지도 지켜집니다. 하지만 수전절은 율법에 근거한 절기가 아닙니다. 유월절이나 초막절 같은 다른 절기들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지만, 하누카 같은 축제는 이집트의 축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만약 수전절이 율법을 근거로 한 절기였다면 사독 계열이 아닌 요나단과 시몬이 감히 대제사장 직분을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성전을 탈환한 후 율법과 상관없이 이교도의 축제와 비슷한 하누카 절기를 지키면서 그것을 자기 나라의 회복이라고 여겼기에, 독립을 이루어준 하스몬 권력자들이 정통성이 없었음에도 대제사장직을 차지하는 데 아무런 저항감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를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종교인들의 역할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와 같은 방식이 기독교 용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날 때 대중들이 거기에 열광한다면, 그것을 이용하는 종교인들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시딤의 경건한 열망이 성전을 탈환한 이후에도 지켜졌다면, 대제사장 직분이 타락하는 결과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마카비 전쟁 이전부터 사독 계열의 정통성이 성직 매매로 인해 무너졌기 때문에 하시딤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또한 메넬라오스나 알키모스처럼 사독 계열이 아닌 인물이 대제사장을 맡거나 하스몬 가문이 스스로 대제사장직에 오른 것에 분노한 사람들은 광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의 변화를 유대인들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요 10:22-23)
여기 요한복음에서 굳이 ‘수전절’이라는 명칭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마카비 시대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독립을 준다면 율법을 무시하고라도 따르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전 142년에 시몬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유대인들을 보면서, 우리가 말하는 기도 응답과 간증의 근거가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게 됩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회복, 즉 나라의 독립이라는 회복의 개념과는 달리, 예수님이 선포하신 ‘회복’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이 제거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광야’는 어디입니까? 화려함을 드러내며 수전절에 열광하는 곳은 아닐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실 이 시대의 광야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도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의 내용을 보면, 마카비 시대의 유대인들이 회복이라고 착각했던 내용을 사탄으로부터 그대로 요구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셨던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정말로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요구를 들어준다면 누구라도 메시아로 떠받들 준비가 되었던 시대였지만, 예수님은 그 요구대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시고 오히려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
그것을 생각해볼 때 지금 우리가 바라고 열망하며 회복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길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을 때 요구받은 내용인지,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고, 높은 데서 떨어져도 천사가 받아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광야 같은 공간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과 대면하며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