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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일 수요예배
✦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5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시편 1편 1~6절)
1.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참된 의미
흑인들의 인권을 개선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는 1968년 4월 4일에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암살당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로 알려진 킹 목사의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그 비극적인 순간의 전날 테네시 멤피스에서 했던 연설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곳의 가난한 사람들을 품는 일입니다. 그 자녀들은 언제나 굶주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우리는 어떻게 그 명령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억압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셨는데, 그때 그들에게 주신 약속하신 것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900년 넘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기반으로 한 바벨론의 침공을 받으면서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은 후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게 하신 지 약 천년이 지난 후에 에스라를 통해 다시 율법을 확립하게 하시면서 그 약속의 땅을 기억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신들이 거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젖과 꿀은 신들의 음료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고대 시대에 가장 비옥했던 이집트 땅이나 유프라테스와 티크리스 두 강 사이에서 풍요로움을 누렸던 메소포타미아(바벨론) 땅이어야 합니다. 이집트는 해마다 나일강이 범람하면서 엄청난 풍요로움을 이집트 땅에 주었고, 언제나 고기를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또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역사 초기부터 가장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곳입니다. 인류의 문명은 모두 메소포타미아를 기원으로 하며, 심지어 그리스 문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문명들에 비해서 가나안 땅은 비옥함과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나안 땅은 천수답입니다. 즉, 하늘에서 비가 제때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짓고 살아갈 수가 없는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그래서 그 땅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비옥하고 풍요로운 이집트와 바벨론으로 인도하겠다는 뜻이겠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원래 의미가 ‘신들이 거하는 땅’인 것처럼, 황폐하고 척박한 가나안 땅이지만 그곳에 들어가 사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거하시고 통치하시는 땅이 되게 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바로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바쳤던 사람들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입니다.
2.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명
고레스 칙령은 정치적인 문서였지만, 동시에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입증하는 문서이기도 했습니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정치적 선전 도구일 수도 있지만, 분명 그 안에는 선지자를 통해 약속된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지난주 ‘베히스툰 비문’에서 살펴봤듯이, 페르시아에게는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지역에서 자주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고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 지역을 정비하고 개선해서 효과적으로 세금을 걷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레스 때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을 파견했고, 나중에 아닥사스다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파견했습니다.
물론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과 아닥사스다 왕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라고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강 건너 땅으로 파견한 것은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그들은 페르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 관점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중요한 시선입니다.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 (스 7:26)
이것은 아닥사스다 왕의 말인데, 여기에는 왕의 명령도 있고 하나님의 명령도 있습니다. 이 기록은 에스라의 이중적인 임무를 보여줍니다. 에스라는 주전 458년에 예루살렘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는 페르시아 왕의 명령에 따랐을 뿐 아니라, 유대인 학자이자 제사장이자 서기관으로서 영적인 사명도 감당했습니다.
에스라는 제2차 포로 귀환을 주도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유대 지역의 종교 시스템을 확립하고(스 7:14), 성전과 관련한 업무도 수행했습니다(스 7:15~20). 또한 이것을 토대로 유대 사회에 율법을 보급하고 교육하여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드는 역할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스 7:25).
에스라보다 13년 후인 주전 445년에 귀환한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위해 총독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와 함께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온 것을 제3차 포로 귀환이라고 합니다. 이미 제2성전이 건립된 지 오래인데(주전 516년), 445년이 되어서야 성벽을 건축하는 상황을 상상해 본다면 당시의 어려웠던 현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포로 귀환 공동체는 스룹바벨이 성전을 세웠던 516년 이후 이때까지 70년 동안 사마리아의 관할 아래 간섭받았고, 성벽도 없었을 만큼 낙후된 환경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 때, 함께 돌아온 포로들은 페르시아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었고 히브리어를 망각한 세대였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사람들은 소수였고, 압도적 다수는 페르시아에 남았습니다. 제2성전이 건립되고 난 이후 페르시아에 남아 있던 유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에스더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 사람들 다수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사람이 살기에 황폐하고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학개 선지자가 언급한 제2성전의 초라함을 생각한다면 성전을 통해 먹고살아야 했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암울한 현실도 느껴집니다. 사실 제사장들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레위인들은 살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초라한 성전을 섬겨야 했던 레위인들은 자기 가족들과 함께 먹고살기에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레위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에스라서와 느헤미아서는 포로 귀환자들의 이름을 지루할 정도로 소개합니다. 사실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왜 그렇게 다 써 놓았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의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명단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시대에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보통 사람들이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본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보면 그들의 명단이 마치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들처럼 무의미한 목록에 불과하지만, 그 시대의 상황을 알게 되면 그들의 이름이 영광스럽고 위대해 보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언급하는 우선순위를 그들은 실제로 지켰고 삶으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공동체 재건을 감당했지만, 그들은 동시에 페르시아 관리로서 그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강 건너편 지방 관리로서 황폐하고 낙후된 땅을 일구고 열매를 거두어 풍족한 세금을 낼 수 있는 풍요로운 지역으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특히 총독으로 온 느헤미야는 그 책임이 컸습니다.
주전 458년에 파견된 에스라가 속주로서 유대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고 영적으로 그들을 일깨우는 역할을 주로 감당했던 반면, 주전 445년에 귀환한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고 사회 제도를 정비하는 사회적 임무에 주력했습니다. 이렇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영적 회복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서 그 땅에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특히 느헤미야는 개혁을 실행해 나가면서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해결하려고 애썼습니다. 총독의 월급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부터 제 삼십이 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느 5:14)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 중에 12년 동안 월급을 안 받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12년은커녕 12주만 못 받아도 굉장히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 정도로 느헤미야는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았고, 단단히 대비하고 온 것입니다.
이렇게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은 말로만 율법을 강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느헤미야가 당시 권력자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감당하려고 했던 것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기반으로 한 제사장들이 경제력을 독점하게 놓아두지 않고,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사각지대에 있어 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던 레위인들의 복지를 개선해서 종교와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보호받는 사회가 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교회가 외치는 회복은 주로 영적인 면만 말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추구했던 회복은 영적인 부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영적 회복’을 강조하는 동시에,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넘쳐서 변화가 시급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사회적 회복’까지 추구했습니다. 결국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영적 회복과 사회적 회복의 간격을 줄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나란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사회 개혁이나 복지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개혁은 인간의 탐욕이나 이기심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씀과 기도와 예배만 강조하고 행동은 없는 부흥, 느헤미야의 사회적 개혁은 없고 에스라의 영적 개혁만 외치는 반쪽짜리 개혁도 곤란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두 축이 동시에 나아가지 않으면 예배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는 허상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천 년 전 십자군 원정 때 교황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라고 명령하면서 자기가 친히 쓴 서신을 보냈습니다. 뭐라고 썼느냐 하면, 누구든지 십자군에 가담하면 천국에 직행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성경에 어디 그렇게 쓰여 있습니까?
그렇게 탈환한 예루살렘이 정말 하나님의 나라였을까요?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을까요? 역사를 살펴보면 오히려 잔혹한 피의 땅이고 살육의 잔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지옥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 과연 진정한 회복과 부흥이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복과 부흥이 단순히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신앙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인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신앙과 현실의 간격을 좁혀야 사회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영혼 구원도 중요하지만, 그 후 제자로 만드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 모든 변화에는 율법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느헤미야 시대는 율법이 체계화되어 확립된 시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 시기에 유대교라는 정체성이 확립된 것으로 봅니다.
신구약 중간기 유대 역사를 다룬 외경 마카베오서에서는 율법이 어떻게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카베오하 2:13-14). 이렇게 에스라-느헤미야 시대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었던 성경들이 모이고 편집되고 체계화되어서 유대교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3. 페르시아 제국 내의 유대인들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사로잡혀 갔던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시대를 맞아 세 차례에 걸쳐서 본국으로 귀환했습니다(1차 주전 536년, 2차 주전 458년, 3차 주전 445년). 1차 귀환 때는 솔로몬 성전을 경험했던 원로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2차, 3차 귀환 때 함께했던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 포로기와 페르시아 시대에 태어난 세대였는데, 당연히 조상의 언어와 관습과 종교를 잃어버린 세대였습니다.
그렇다고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유다 땅에 머물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유산을 잘 지켰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바벨론 시대와 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면서 사마리아 속주에 편입되어 그들 문화에 동화되어서 토착화되고 말았습니다.
“23 그 때에 내가 또 보니, 유다 남자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의 여자들을 데려와서 아내로 삼았는데, 24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절반이 아스돗 말이나 다른 나라 말은 하면서도, 유다 말은 못하였다.” (느 13:23-24, 새번역)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서 세월이 흘러 페르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제국에 동화되었고, 유다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토착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언어도, 율법도, 역사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 주변 민족들과 정략결혼을 했지만, 생존을 위해 했던 선택이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본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그들은 먼저 이방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을 회중에서 분리시킵니다.
“백성은 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섞여서 사는 이방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두 분리시켰다.” (느 13:3, 새번역)
이것은 지금의 국제결혼과는 전혀 다른 의미니까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그 시기에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은 정체성을 내던져버리는 행위와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율법을 위해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주변 민족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당시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개혁은 곧 사회적인 고립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믿음의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페르시아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스더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의 왕비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에는 많은 유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유대인들은 율법도 지켰고(에 3:8),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기도 했습니다(에 8:17).
그런데 3차에 걸쳐 사람들이 본국으로 귀환했지만, 페르시아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고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오히려 페르시아 제국에 동화되어 살아간 흔적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모르드개’라는 이름은 바벨론의 태양신 ‘마르둑의 예배자’라는 뜻입니다. ‘에스더’ 역시 히브리어가 아니라(원래 이름은 하닷사) 페르시아어로 ‘별’을 뜻하는 단어로서 조로아스터교의 흔적이 보입니다. 제2성전을 세운 유다 지파 스룹바벨도 ‘바벨론의 씨앗’ 또는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확립된 유대교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페르시아는 세계를 정복했고, 조로아스터교는 유대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4. 복 있는 사람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는 성전과 회당이라는 ‘하드웨어’만 세워진 것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존재하던 율법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체계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동화되느냐, 고립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던 유대인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믿었던 참된 회복과 부흥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전과 율법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곳곳마다 율법을 낭독하고 회당에서 예배하는 형태가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될 것이다. 4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5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6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시 1:1-6, 새번역)
이 시편 1편은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이 시편을 수없이 낭독하며 읽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시편에 있는 150개의 시 중에서 이 시가 제일 앞에 1편으로 배치된 의도가 무엇인지 그 맥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 유다 사람들 대다수가 페르시아나 주변 나라에 동화되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진짜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힘들었을 율법 지키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이야말로 복 있는 인생이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인생이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을 알고 보면 시편 1편은 그저 평온하고 아름다운 노랫말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외치는 처절한 헌신과 결단의 고백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영적 회복만 외치지 않았고, 실생활에서 모순된 부조리와 불의를 제거하며 참된 회복과 부흥을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0:24)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셨는데,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어떤 땅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적 만족감만 누리는 땅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회복과 사회적 회복의 간격이 사라지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 억압받고 차별받는 일이 사라지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란, 단순히 교회 안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영혼들이 구원받도록 돕고, 또한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제자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도 그런 제자로 자라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적 회복과 부흥을 이루고 동시에 사회적 회복도 이루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가 되도록 애쓰며 나아가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에스라의 영적 개혁과 느헤미야의 사회적 개혁을 동시에 이루어가는 제자, 또 그러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우리 모두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