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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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주일 설교 때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는데, 복음을 향한 바울과 동역자들의 헌신과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복음을 전하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철철 흐르며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매를 맞고, 심지어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면서도 결코 포기하거나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들고 전진해 나가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정말 눈물이 날 정도의 감동과 도전을 받습니다.
그분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엄청난 고난과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결코 멈추지 않으며 계속 앞으로 전진해나갔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분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며 그토록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던 것입니까?
무엇보다 바울과 동역자들에게는 ‘사랑에 빚진 자’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즉, 죽음의 길로 가던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짜로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집중했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비롯하여, 바나바도, 마가도, 실라도, 또 베드로와 요한과 다른 모든 사도들도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만 머물지 않고, 예수님을 모르는 민족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까지 아끼지 않으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에게 주신 사명입니다(마태 28:18~20). 바로 이 일을 위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고, 그래서 우리에게까지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을 보면, 2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의 사명감이 많이 흐려진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전도를 하고 싶지 않거나 안 믿는 VIP 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싶지 않은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존 교회에서 영혼 구원에 관심을 집중하며 실제로 전도하는 경우는 굉장히 적습니다.
미국만 해도 한인 교회들이 많고 큰 교회들도 꽤 있는데, 전혀 교회를 안 다니던 분이 새로 믿고 세례를 받는 경우가 1년에 한두 명도 안 되는 교회들이 대다수입니다. 특히 오래 된 교회나 전통 교단일수록 새로 믿는 경우가 아주 적은데 왜 그런 것일까요? 이번에 사도행전을 살펴보며 그에 대한 답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의 시각이 소위 ‘유대인 중심주의’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첫 교회도 처음에는 유대인 중심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이방인들도 믿고 성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유대인들만 구원받고 성령 받는 줄 알았는데 이방인들도 믿고 성령을 받으니 놀란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유대인 중심주의와 같이 편협한 시각을 가질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또 장로교회 등 전통 교단에 속한 교회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크고, ‘크리스천 중심주의’ 또는 ‘교회 중심주의’로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끼리 교회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과 믿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데 주로 집중하다보니까 교회 밖에 있는 믿지 않는 분들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그럼으로써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라는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교회들의 시각이 자기 교회나 교단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열매를 거두느냐와 상관없이 우리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 모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 “잘했다, 신실한 종아!”라고 칭찬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