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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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일제 치하에 들어가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완용을 가리켜 우리는 매국노라고 부르며 분개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흥분하며 비난하기 전에, 역사의 의미를 알고 깊이 생각해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2시, 창덕궁 대조전에서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고, 거기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왕인 순종, 총리대신 이완용, 그리고 각료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때 안건은 단 하나였는데, 그것은 ‘한일병합조약 체결’ 안건이었습니다.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 체결에 반대하다 끌려 나갔고, 이완용에게 이미 매수당한 나머지 대신들은 모두 안건에 찬성했습니다.
회의 시작 한 시간 후인 오후 3시경, 당시 아무런 힘이 없던 순종은 이완용에게 한일병합조약 체결의 전권을 위임했고, 그는 즉시 왕의 위임장을 들고서 남산에 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의 관저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이완용은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고, 함께 샴페인을 터뜨리며 조약 체결을 자축했습니다.
그때가 오후 5시였으니까, 우리 한민족이 5천 년 동안 지켜오던 나라가 어전회의 시작 후 단 3시간 만에 너무도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술국치’라고 부르면서 지금도 치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한 이완용과 그 일당을 민족의 매국노라고 비난하며 손가락질합니다.
중국에도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인들이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경멸하던 청나라 만주족이 자기들을 지배하게 되자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대학살을 일으켰고, 그때 최소 5천만에서 최대 1억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중국인들에게는 뼈가 떨릴 정도로 치욕적이며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비참한 시대에 중국의 사상가였던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조국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 군사가 밀려오자 무장 항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던 그는 책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왕조가 바뀌는 것은 왕과 신하들의 잘못이지만, 나라가 망하는 것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
한 나라의 왕조가 바뀐다는 것은 요즘의 정권 교체와 같이 자기 나라 안에서 지도층만 바뀌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아예 다른 민족의 식민지가 되어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라 안에서 왕조나 정부가 바뀌는 것은 주로 나라를 이끌던 지도자 계층의 잘못 때문이지만,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할 때는 지도자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 치하에 들어간 것은 단지 이완용과 몇몇 매국노들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왕조나 정권이 바뀌는 것도 전적으로 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지도층의 잘못이 가장 크겠지만, 거기에는 국민들의 잘못도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남의 탓을 너무 쉽게 한다는 점입니다.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남의 탓’이라는 경향이 아주 심합니다. 나라가 잘못 돌아가면 전부 대통령과 보좌진 및 국회의원들 때문이고, 회사에 문제가 생기면 전부 사장과 이사들 잘못이며, 단체가 힘들어지면 단체장과 임원들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경우가 더 많겠지만,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라는 자기중심적 책임 회피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며, 그 주요 원인은 두려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두가 함께 일하며 함께 책임을 지는 ‘공동체 정신’이며, 그것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자기의 책임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