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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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설교 중 인터넷 연결이 끊기면서 동영상이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설교 동영상 1: https://youtu.be/Ola1QLdqP8A?t=2050
설교 동영상 2: https://youtu.be/5WQP056OPPk
2022년 2월 27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8 ✦
“강렬한 유혹을 이겨낸 사람”
(사무엘상 24장 1~15절)
[들어가는 말]
우리가 <말씀의 삶> 공부도 하고 있지만, 성경을 죽 읽다 보면 여러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 중 믿음으로 승리한 신앙의 인물들을 가만히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고난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쉽게 된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힘들게 살았고 그것도 약간 힘든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런 혹독한 고난을 맞아서 망가지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고난을 통해 더욱 놀라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고통의 순간을 통과하면서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세워졌으며 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한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개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어떻게 그것을 표현합니까? ‘내 속이 썩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속이 썩는 것을 경험합니다. ‘내가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는 말이 있듯이, 고난 때문에 내면이 망가지고 무너집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고난을 통해 정금 같이 단련되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다윗도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이가 많은 사람도 아니고 20대의 젊은 나이인 황금기에 10년 동안 매일 칼이 언제 자기 목을 베어버릴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는 항상 도망자 생활을 하면서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무엇을 했겠습니까? 목을 먼저 만져보면서 ‘아직 붙어 있구나. 하나님, 생명을 연장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엄청난 마음고생을 하며 10년을 도망 다녔습니다. 말이 10년이지, 그것이 얼마나 긴 기간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러한 고난을 통해 넘어지거나 무너지거나 망가지거나 상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빛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시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냥 쉽게 나온 시들이 아닙니다. 극심한 고통과 환난 속에서 나온 그의 믿음의 고백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그토록 불안한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올 수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1.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다윗
지난번 23장 끝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윗을 거의 다 잡았을 때 갑자기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와서 어쩔 수 없이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기를 그치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랬다가 어느 정도 전쟁이 마무리되고 다시 다윗을 잡기 위해서 유다 광야로 돌아옵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1절)
그 사이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니다가 엔게디 광야에 숨게 됩니다. 저번 안식월 때 이곳을 가보았는데, 엔게디는 사해 옆의 황무한 광야 근처에 있습니다. 아주 황량한데 놀랍게도 조금 들어가면 작지만 폭포들도 있고 물도 많고 나무도 많은, 아주 천연 요새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다윗이 거기 있다고 사울에게 고발하여 사울은 다시 다윗을 잡으러 갑니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2절)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고 재판을 행하며 나라의 국방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이스라엘 왕 사울은, 오직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나라 일들을 다 제쳐놓고 자신의 권력에 가장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는 다윗 한 사람을 잡아 죽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 즉 최고 정예 군사들, 요즘 말로 하면 특전사나 특수부대를 뽑아서 갑니다. 사울의 마음은 오직 다윗을 죽이겠다는 생각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3절)
‘들염소 바위’, 즉 들염소들이 사는 바위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듣고 가던 사울은, 갑자기 길옆에 있는 양의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양의 우리’는 사막 유목민족인 베두인들이 밤에 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임시 우리를 말합니다. 그 우리 옆에 굴이 있는데, 사울은 다윗을 찾다가 갑자기 혼자 그 굴로 뛰어 들어간 겁니다.
그 이유는 “뒤를 보러” 들어갔다고 아주 원색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사실은 이 말이 원래 히브리어 원어로는 ‘발을 가리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옷이 길기 때문에 볼 일을 볼 때 겉옷을 입은 채 앉으면 발을 가리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전에 사용하던 개역한글에는 “발을 가리러”라고 되어 있는데, 새번역과 개역개정에서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그것을 의역해서 아주 친절하게(?) ‘뒤를 보러’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이때 사울은 아마도 상당히 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을 다 놓아두고 혼자 급히 굴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굴의 깊은 안쪽 공간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숨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거기 있던 그 많은 굴들 중에 하필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때 다윗과 그 일행은 깜짝 놀랐을 겁니다. 자기들이 숨어 있는 곳에 누군가가 갑자기 들어오니까 ‘아, 들켰구나. 이제 끝장이다.’라고 생각했을 텐데, 가만히 보니까 혼자입니다. 게다가 잘 보니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사울 왕이고, 그는 자기들이 여기 있는 것을 모릅니다.
지금 사울은 급하게 주저앉아 볼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누가 봐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지금 사울을 제거하자고 제안합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4절)
여기서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까지 인용해가면서 바로 지금이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그에게 건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하들이 인용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다윗에게 하신 말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여기서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부하들이 말하는데,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던 것이 어느 시대의 특징입니까? 바로 극심한 혼란으로 어려웠던 사사시대의 특징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마음대로 하니까 얼마나 극심한 혼란이 있었겠습니까? 그게 사사시대의 특징인데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의 부하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울을 죽이자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여기 4절을 조금 풀어서 이야기하면 부하들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것입니다.
“대장님, 우리는 도망하면서도 기회가 날 때마다 사울을 공격하여 그를 죽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대장님은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주셨는데, 언젠가 때가 되면 네 원수를 네 손에 붙여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셨다. 그러니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지금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많은 굴들 중에서 왜 사울이 하필 이곳에 와서 무방비 상태로 저러고 있는 겁니까? 이것은 정말 원수를 갚으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자, 빨리 죽여 버립시다.”
이 얼마나 말이 됩니까? 정말 합리적이고 정말 설득력 있고 정말 옳다고 느껴지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들으며 다윗은 분명히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솔직히 자기가 생각해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 슬그머니 다가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몰래 잘라 옵니다.
그런데 이때 어떻게 사울의 겉옷을 벨 수 있었겠습니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발을 가린다’는 표현은 있지만 불편하니까 사울이 겉옷을 벗고 볼 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사울이 볼 일을 본 후에 너무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하며 곤한 잠(power nap)을 잘 때 겉옷 자락을 벤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이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사울이 무방비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2.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
다윗은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대신 칼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벱니다. 이때 감정적으로는 ‘죽일까, 말까?’ 하고 얼마나 고민이 되었겠습니까? 나중에는 이 겉옷을 잘라서 보임으로 ‘보십시오. 내가 죽일 수 있었는데도 안 죽였습니다.’ 하고 보일 수 있는 증거물도 되지만, 그래서 다윗이 믿음의 사람인 겁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할 수 있는 순간에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겁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그래서 일단 겉옷 자락을 벱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지, 사울을 죽여 버리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는 겁니다. 속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것이 정말 주신 기회입니까, 아니면 다른 겁니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다윗의 마음에 찔림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5-7절)
이 이야기는 제가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많이 들었던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어릴 때 특히 남자아이들은 플라스틱 칼이나 총을 들고 싸우는 놀이를 많이 합니다. ‘야, 죽어라! 이 원수!’ 하면서 노는데, 그렇게 놀던 아이의 입장에서는 ‘아니, 원수인데 왜 안 죽이나?’ 하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대개 영화나 사극에 보면, 그런 원수를 죽일 기회를 얻을 때 보통 어떻게 합니까?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심판한다!’ 하면서 통쾌하게 죽이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런 것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항상 스토리가 그렇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다가 원수를 죽일 기회를 얻고, 그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이기 때문에 원수를 쳐서 물리치고 스토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어린이 만화영화의 주제도 대부분이 그런 겁니다. 악당이 나오고 고난을 당하다가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고 끝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도망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다윗은 왜 이렇게 답답하고도 멍청한 짓을 한 겁니까? 왜 끝낼 수 있는 것을 안 끝냅니까? 이때 끝냈으면 더 고생을 안 해도 되는데 왜 그렇게 선택을 합니까?
다윗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구약학자들이 여러 가지 해석들을 내놓았습니다. 먼저는,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는 그대로입니다. 그는 신앙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셨는데 자기가 마음대로 죽일 수 없다는 신앙적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은 이미 자기를 기름 부어 세우셨고 사울은 폐하셨고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단순히 그냥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 아래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지금 사울이 왕인데 만약 그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통성 시비가 벌어집니다. 그걸 감안했다는 겁니다. 사울을 죽이게 되면 다윗 자신은 왕이 되기는 되지만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울을 따르는 세력이 있고, 특히 다른 지파들은 몰라도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만큼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고 계속해서 반역하고 반대할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다윗이 만일 자기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사울 왕을 찔러 죽이게 되면 신하가 왕을 죽이는 전통이 세워진다는 겁니다. 지금 자신이 사울을 죽이면 그것을 직접 목격한 부하들 중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기분이 나빠질 때 반역해서 자기나 자기 아들과 후손을 찔러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씀의 삶> 때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짧은 순간에 그런 계산들을 다 하고서 죽이면 안 되겠다고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다면 그는 초인간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그 짧은 순간에 그 모든 것을 다 정치적으로 계산하고 후손까지 계산해서 자기가 왕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까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성은 있지만 무리가 있습니다.
분명히 그런 생각이 스쳤을 겁니다. 또 나중에 보면 결과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이 짧은 순간에 다 내다보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그때 그렇게 행동한 것은 정치적인 결단이었다기보다는 신앙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신앙의 결단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 계산해가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 결단은 자기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하는 것입니다. 첫째, 둘째, 셋째 하고, 얼마인지 따지면서 하고, 나에게 뭐가 돌아올지 계산하며 한다면 그것은 신앙적인 결단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이때 한 가지를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다 들어왔겠지만 그 중에도 특별히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간 겁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평소에 계속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시편들을 보면 그는 여러 위기와 고난의 순간에 계속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 순간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옷자락을 베었는데 그때 찔림이 왔습니다.
오순절 때 성령이 오시고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는 성령님이 다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 나가려고 할 때 우리에게 찔림을 주십니다. 이때는 오순절 사건보다 약 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 성령이 믿는 사람 안에 계속 계시는 때가 아니었지만, 이때 성령께서 분명히 다윗에게 찔림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이때 다윗은 한 가지를 생각한 겁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아, 이것은 유혹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유혹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마귀의 이름 자체가 ‘미혹(유혹)하는 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타락했습니까? ‘저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된다.’라고 유혹했는데 거기 넘어가서 타락했습니다. 로마서에서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고 하는데,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이 바로 유혹(temptation)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는 가장 큰 유혹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돌아가시기 전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세족식을 하십니다. 그때가 목요일이라고 해서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라고 합니다. 그 세족식을 하실 때 일단 유혹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저는 못 씻기십니다.’라고 했을 때 ‘그래, 난 너를 안 씻으련다. 너는 조금 있으면 나를 부인할 놈이야. 나는 너를 안 씻겨.’ 그러시면서 안 씻기실 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이제 곧 자신을 은 30에 넘겨줄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너를 안 씻기련다. 너는 나를 배신할 놈이야.’라고 하셔도 되는데 씻어주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갈 때 ‘가서 네 할 일을 하라.’라고 하시고 나갔는데, 그때도 때려눕힐 수 있으셨지만 그냥 두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신 것도 유혹을 이기신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안 지겠습니다.’ 하고 도망갈 수도 있으셨는데 그것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 사람들이 잡으러 왔는데 예수님이 ‘너희가 찾는 사람이 나다.’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이 다 넘어집니다. 그러면 그들을 다 때려눕히고 도망갈 수도 있으셨는데 그냥 잡히십니다. 그것도 유혹을 이기신 겁니다.
체포되어 공회에 가셨을 때 그들을 논리로 반박하고 그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창피를 주시면서 벗어날 수도 있으셨는데, 아무 말 없이 잡히시고 사형 선고를 받으십니다. 빌라도 법정에 가셨을 때도 빌라도의 모든 것을 다 아시니 죄를 드러내시고 다 이야기하심으로 깜짝 놀라게 하시면서 ‘내 말을 잘 들으면 너는 더 성공할 것이다.’라고 타협할 수도 있으셨는데, 그냥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어땠습니까?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조롱했습니다. ‘남들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네.’ 하며 비아냥거리고 조롱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십니까? 천군천사가 와서 싸울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타임아웃 하시고 ‘잠깐 기다려라.’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내려가 다 때려눕히시고 다시 십자가에 올라와서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도 있으셨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다 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혹이 가장 강력한 유혹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에게 가장 강렬한 욕구는 식욕과 성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혹은 먹는 것이나 성적인 것으로 올 때가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 및 예수님은 먹는 유혹으로 왔고, 요셉과 다윗은 성적인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이겼는데 다윗은 넘어갔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명예욕, 유명해지고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권력욕, 사고 또 사고 싶은 소유욕, 또 쾌락의 유혹이 있습니다(도박, 마약, 술, 담배 등). 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유혹들이 많은데,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유혹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을 때 그것은 그의 믿음을 다시 세워주시기 위한 테스트였지 유혹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윗 앞에 놓여 있는 유혹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오늘 제목이 ‘강렬한 유혹을 이겨낸 사람’인데 이게 무슨 유혹입니까? 다윗이 지금 어떤 유혹을 받고 있습니까? 그런데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느 경우에 가장 마음이 괴로우십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느 경우에 마음이 가장 괴로워집니까?
성경 말씀을 봐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직접 또는 간접 경험을 봐도 그렇고,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가 언제인가 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입니다. 지금 코로나 때문에 힘들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 고통이 떠나지 않습니다. 계속 생각이 나고 괴롭습니다.
지금까지 죽 목회를 하면서 보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워할 때처럼 힘든 때가 없고, 서로 갈등할 때처럼 지옥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부부 사이든, 부모와 자녀 사이든, 성도 간의 관계이든, 아니면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든, 인간관계의 갈등이 사실 가장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 율법의 여러 계명들을 둘로 요약해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전심으로(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아예 하나로 줄여서 모든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들어 있다고까지 했습니다(롬 13:9-10). 하나님 사랑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합니다.
가장 괴로운 순간은 관계가 틀어졌을 때입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유혹, 가장 강렬한 유혹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특히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것, 더 나아가 미워하게 만드는 것, 틀어진 관계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가장 강렬한 유혹입니다.
그런데 사실 가장 강렬한 유혹은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을 넘어서, 보복하고 복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강렬한 유혹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혹시 ‘아니, 무슨 복수가 가장 큰 유혹인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다윗을 통해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사실 복수가 유혹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러나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유혹입니다.
유혹은 본질상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단련해서 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주시기 위함이지만, 마귀의 유혹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망가뜨리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유혹입니다. 복수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세워지는 것 보셨습니까? 보복하고 나서 ‘나는 너무 평안해.’라고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보복하고 나면 저쪽에서 또 공격을 안 하나 하고 항상 불안해집니다.
억울하게 당하거나 상처를 받을 때 나도 그 사람에게 보복하고 원수를 갚고 싶은 유혹은 가장 강한 유혹입니다. 복수하는 순간 삶이 지옥으로 변하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어느 나라가 무력으로 점령했을 때 ‘우리는 100% 복종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겉으로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뒤에서는 계속 보복하고 테러를 합니다.
보복이 보복을 낳습니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어? 어디 좋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하며 보복하고 원수를 갚는 그 순간, 그렇게 하는 사람은 죄가 자기 삶에 날개 치며 역사하는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이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중 18세기 초부터 중엽까지 활동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신학자였고, 프린스턴 신학교의 총장이었으며, 대단한 설교가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에 대해 연구해서 박사 학위도 받는 사람들도 많고, 학자들이 지금도 계속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교회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한 명만 뽑으라고 하면 이 사람입니다.
그가 주도한 신앙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것이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인데, 바로 이 SVM을 통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나왔고 그 중에 한국에 복음을 전하여 우리가 잘 아는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있습니다. 그 에드워즈가 20세도 되기 전에 70개의 결단을 쓴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단”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의 결단 내용을 보면 사실 많은 부분이 보통 사람도 결단할 만한 내용입니다.
“나는 결단한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을. 나는 결단한다,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나는 결단한다, 내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게 될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을.” 이런 식으로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한 결단입니다. 그런데 14번째 결단은 아주 놀라운 내용입니다. “나는 결단한다, 복수를 하기 위한 것은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을.”
20세도 채 안 된 청년이 이런 말을 썼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자 영성의 대가인 에드워즈가 결코 복수하지 않겠다는 결단까지 했다면, 복수야말로 가장 강한 유혹이라는 것을 그가 젊은 나이에 벌써 깨달았던 겁니다. 누구나 그 정도는 괜찮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사소해 보이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도, 그것이 복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망가뜨리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죄가 자기 삶에서 활개를 치게 되고 하나님과는 멀리 떨어지게 됩니다.
다윗이라고 이 순간 사울을 죽일 마음이 전혀 없었겠습니까? 사실 사울이 얼마나 못되고 비열한 인간입니까? 이런 인간을 죽여 없애면 사실 이스라엘에도 좋은 일이 아닙니까? 지금 그를 죽여 버리면 이제 더 이상 도망자로 살지 않아도 됩니다. 상황이 끝납니다. 지금까지 사울 때문에 한 고생과 또 사울 때문에 받은 상처와 괴로움을 생각하면, 그냥 죽여 버리고 싶고 또 죽이면 다 끝납니다. 다 해결됩니다.
실제로 다윗은 여러 시편에서 사울을 원수라고 표현할 정도로 아주 극심한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괴롭히는 인간이 지금 자기 눈앞에 무방비 상태로 있으니까, ‘정말 주님이 기회를 주셨구나. 이제 죽여 버리면 다 끝난다.’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하게 다가왔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것을 유혹이라고 느낀 겁니다.
바로 그 유혹 때문에 일단 다윗은 사울의 겉옷을 베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겁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다.’
복수는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혹시 세상이 다 괜찮다고 하고, 다들 하는 거라고 하고, 그런 놈은 죽여 없애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더라도, 어쨌든 복수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며 그것은 죄의 길로 가는 길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거기서 멈춥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3. 모든 것을 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사울이 굴에서 나간 후 다윗은 바로 따라 나가 외칩니다.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8절)
사울에게 “내 주 왕이여”하고 외치면서 사울이 보는 데서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그는 뭐라고 합니까?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9-11절)
누가 보아도 저 겉옷 자락은 자기들의 것을 슬쩍 잘라서 왕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왕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자기 것이고 겉옷을 보니까 베인 자국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의 결백을 외친 다윗은 자기가 복수를 하지 않는 본질적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12-15절)
여기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12)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12). 또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15)라고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억울하고 분하고 힘들어도 보복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고 합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자신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실 일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거부하기가 정말 힘든 유혹입니다. 대개 복수의 대상은 멀리 있는 테러리스트나 악한 독재자가 아닙니다. 우리 복수의 대상은 대부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시부모가 될 수도 있고, 자녀가 될 수도 있고, 다른 가족이 될 수도 있고, 교회 성도가 될 수도 있고, 목장식구가 도리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되갚으려 하고 말로 쏘아주고 그럽니다.
사실 ‘복수하지 말라’는 말에 대해 ‘내가 누구에게 복수를 하겠나?’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가서 갚아 주는 것만 복수가 아닙니다. 여러분, 사실은 저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모두가 복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복수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적극적으로 복수를 안 하니까 ‘나는 복수를 안 하는데?’라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소극적인 복수, 소심한 복수를 늘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인가를 안 함으로써 복수하는 겁니다.
뭔가 교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서운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안 나가는 겁니다. 복수입니다. 목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장에 안 나갑니다. 복수하는 겁니다. 나를 섭섭하게 한 사람이 모임을 주관한다고 할 때 그 모임에 안 나가는 겁니다. 복수하는 겁니다. 해주어야 되는 일이 있는데 슬쩍 핑계를 대면서 안 해주는 것도 복수입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어떤 일을 하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을 열심히 안 하는 것도 복수입니다. 또 사업을 할 때 손님이 미워서 물건을 살짝 망가뜨리는 것, 가격을 살짝 높게 받는 것, 남들은 디스카운트를 다 해주는데 이 사람은 모르고 있으니까 말을 안 하고 제 가격을 받는 것도 복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끊임없이 복수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복수이든 복수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해 하는 것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겁니다. 어떤 복수이든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복수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났는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것이 복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복수를 하게 되면 신앙에서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마귀의 지배를 받는 삶이 되어 버립니다.
목사인 제가 강단에서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아 설교한다면 마귀의 지배를 받는 겁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한 사람을 생각하며 비난하는 설교를 하면 마귀가 그 순간 저를 지배하는 겁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보고 슬쩍 피해서 지나간다면, 그 순간 마귀가 그것을 통해 내 삶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래서 그 삶은 더욱 죄로 인해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복수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특히 우리는 소심한 복수도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꼭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설교’에서 잘 보시면 인간관계에 대한 말씀을 아주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 한 군데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 5:43-48, 새번역)
예수님의 이 말씀을 너무나 잘 깨달은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에서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4, 17-21)
예수님이 왜 그토록 이웃을 사랑하라,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왜 이렇게 말씀했겠습니까? 그것이 내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사실 죽습니다. 이렇게 살 때 살아납니다. 복수를 꿈꾸지 않고 나아갈 때 진정한 용서의 길이 열리고,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이고 소심해 보여도, 보복을 할 때 죄의 길이 열립니다.
복수를 꿈꾸지 않는 삶, 바로 그것이 도망자로 쫓기는 삶을 살면서도 망가지지 않고 오히려 성숙해지고 아름다워진 다윗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외치고 나자 사울은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잘못을 고백합니다(16-21). 그러나 나중에 26장을 보면 또 비슷한 상황이 일어납니다.
아마 다윗은 두 번째 같은 일을 당했을 때 갈등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안 죽이고 살려주었는데 어떻게 인간이 또 나를 죽이러 올 수 있는가? 이번에는 정말 확 죽여 버릴까?’ 그러나 다윗은 그 유혹을 또 다시 물리칩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배웁니까? 이렇게 복수를 꿈꾸지 않겠다고 신앙적인 결단을 하고 나아가면,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지더라도 또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복수를 꿈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복수는 안 하더라도, 소극적인 복수를 얼마나 많이 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복수를 하는 순간 삶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복수의 유혹을 거부하고 돌이키며 용서의 길로 나아가는 순간, 삶 가운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쫓기는 삶 속에서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지는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