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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9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 ✦
“중심을 보시는 주님”
(사무엘상 16장 1~13절)
[들어가는 말]
그 동안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오래 전에 보았던 <Goal>이라는 영화입니다. 축구에 대한 영화인데, 제가 축구를 좋아해서 봤습니다. 멕시코 출신 불법 체류자 가정에서 자라난 산티아고 무녜즈(Santiago Munez)라는 청년이 평소에는 아버지의 사업체에서 일하고 밤에는 중국식당에서 또 알바를 하며, LA의 아마추어 축구팀에서 축구를 하는 내용입니다. 워낙 실력이 출중해서 아마추어 리그 경기 때마다 연속으로 골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에서 LA에 사는 자기 딸네 집에 방문을 온 글렌 포이(Glen Foy)라는 사람이 자기 어린 손자가 축구경기를 공원에서 하는 것을 보러 왔다가, 바로 옆 축구장에서 어른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거기서 축구 경기를 하는 산티아고의 경기를 보게 됩니다. 오래 전 뉴캐슬 유나이티드(Newcastle United) 프로 축구팀의 선수였고 또 나중에 스카우트 담당자였던 그는, 아마추어 팀에서 뛰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엄청난 실력자인 산티아고를 알아보고 곧장 뉴캐슬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입단 테스트를 받도록 부탁을 합니다.
결국 영국까지 가서 테스트에 통과한 산티아고는 일단 2군 리그에서 뛰며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데, 그러다 드디어 1군에 올라가게 됩니다. 첫 경기에서 처음에는 벤치에 앉아 있다가 주전 선수가 갑자기 부상을 입는 바람에 교체로 들어가는데, 경기에 투입되자마자 놀라운 실력을 발휘해서 그날 깜짝 스타가 됩니다. 그 후 두 번째 경기에서는 선발로 뛰어서 팀이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골을 넣어 영웅이 됩니다.
이 영화에서 그렇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엄청난 실력자 산티아고처럼, 오늘 엄청난 실력자, 소위 재야의 고수,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던 사람이 혜성 같이 등장하는 것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그의 등장도 아주 갑작스럽고 놀라웠습니다.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집안에서도 무시를 당하던 소년 목동 다윗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10여 년 전에 사무엘상에 나오는 다윗 이야기를 20번에 걸쳐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사무엘상을 마치면서 곧 사무엘하에서도 다윗 이야기를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는 사이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곧장 사무엘하부터 시작할까 했는데, 그 사이 시간이 많이 흘렀고 또 그 사이 새로 온 분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전부 다는 아니고 몇몇 다윗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사무엘상에서 살펴보면서 사무엘하로 연결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주 동안은 사무엘상에 나오는 다윗 이야기 중 주요 사건들을 다루고, 그 후부터는 사무엘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다윗이 등장하게 된 배경 (1-5절)
사무엘상 앞부분을 보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첫 번째 왕이 사울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됩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사울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타락의 길로 가게 됩니다. 사울은 자기가 왕이니까 자기 맘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5장을 읽어보면 사울의 불순종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22-23)
사울이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금방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뒤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15:35b)
처음에는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 그에게 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스스로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선택한 겁니다. 남이 그렇게 시킨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니, 더 자세히 보면 사울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성경을 죽 읽어보면 알게 됩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었을 뿐, 하나님을 정말 믿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때가 되니까 진짜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뿐입니다.
지금 코로나 상황이 2년 가까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2020년 1월부터 시작했으니까 2년이 되었는데, 여기도 곧 3월이면 2년이 됩니다. 짧지 않은 기간이었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당황했지만 곧바로 온라인 예배를 하면서 그래도 예배를 계속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상황이 탁 닥치니까 자신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가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면 진짜 믿음이고 교회에 안 나오면 가짜 믿음이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아마도 그것을 알 겁니다. 내가 어떤 태도로 예배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모여도 마스크를 잘 쓰고 예배하면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처음처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온라인으로만 했는데, 온라인으로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배가 가장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고 말씀대로 사는 것 같았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터지고 보니까 내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 과연 진짜 믿음이었는지가 드러난다는 겁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예배드리는 분들도 많은데 그래도 자기는 못 나오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아프신 분들, 연로하신 분들, 아이가 어린 분들은 당연히 우리가 이해를 합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여건인데 못 나오는 게 아니라 안 나오는 경우, 그럴 때도 온라인 예배가 있는데도 안 하는 경우,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믿음인가, 사울과 같은 믿음은 아닌가 하고 조심해서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겉으로는 믿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진짜로 믿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신다면 얼마나 큰일입니까?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빨리 깨어나야겠습니다. 조금 전 노래한 것처럼 “여호와께 돌아가자” 하며 주님께로 돌아가고 전심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나오고 안 나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잘 점검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울을 ‘너는 됐다. 이제 나는 너를 싫어한다.’ 하고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당신을 버린 사람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으신 겁니다. 사용하고 싶으셔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따를 수 있는 새 왕을 세우려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1절)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 중 하나를 왕으로 보셨다는 겁니다.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그 당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사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를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렇게 하는 데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2-3절)
사무엘은 그저 별 뜻 없이 이곳저곳 다니는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사무엘이 지금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소식을 사울 왕이 듣게 되면 혹시 사무엘이 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즉 요즘 말로 하면 내란, 음모, 반역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면서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들레헴에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하면서 이새(Jesse)를 초청하라 하시고, 그의 아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즉, 왕으로 세우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또 베들레헴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이 그렇게 크지 않은 땅이지만 걸어 다니면 결코 좁은 땅이 아닙니다. 그 전체를 선지자로서 다니며 사역하는 사람이 사무엘인데, 당시 도시도 아니고 촌 동네라고 볼 수 있는 베들레헴에 전설적인 선지자 사무엘이 오니까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4절)
평강을 위하여 오느냐는 게 무슨 말입니까? 사무엘이 오는 것을 본 베들레헴 사람들, 특히 성읍 장로들(리더들)은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서 벌을 주러 오신 건 아니죠?’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혹시 남들 모르게 죄를 지은 게 있나? 우리가 모르게 동네 사람이 죄를 지어서 벌을 내리러 오나?’라고 생각하며 떨었습니다. 사무엘은 단지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나누려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닐 선지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은 곧 기대감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르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5절)
사무엘은 무엇보다 예배하러 왔다는 겁니다. ‘너희와 같이 예배하러 왔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기쁜 일입니다. 당시 제사라는 것은 예배만 하고 가는 게 아니라 축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사람들을 모아 예배를 인도하며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축제를 벌이기 위해 왔다고 하니까 베들레헴 사람들이 좋아하게 됩니다. 마음이 놓이고 기뻐합니다. 이 소식은 곧 온 마을에 퍼져 나갑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사람들이 소를 잡고 바비큐 파티가 벌어진 겁니다. 마을 전체가 지금 시골 장이 선 것을 마무리 하는 파티를 벌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서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기뻐하며 먹고 마시는 축제가 벌어집니다.
2.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 (6-7절)
그런데 사무엘이 이곳 베들레헴을 방문한 것은 당연히 마을 사람들 전체를 모아 단순히 예배를 드리고 축제를 벌이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상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라는 사람과 그의 아들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데, 사람들은 사무엘이 왜 그 집안에게 그런 관심을 가지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축제 분위기에 들떠서, ‘그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우리 동네에 와서 우리와 같이 제사도 드리고 축제도 벌인다.’라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사무엘이 이새의 가족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했고, 또 그들과 만나는 사무엘을 아무도 주목해서 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사무엘은 지금 왜 왔습니까?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이제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 누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차기 왕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이새의 장남인 엘리압이 그에게로 나옵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6절)
사무엘은 엘리압이 오는 것을 보는 순간 ‘야, 이 사람이야말로 다음 왕이 될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엘리압은 용모가 뛰어나고 풍채도 아주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7절)
사무엘은 엘리압의 준수한 외모와 큰 키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하신 말씀은 그가 악한 사람이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택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모와 키’가 무슨 기준입니까? 바로 사람들이 초대왕 사울을 택할 때 가졌던 기준입니다. 사울은 요즘 말로 하면 ‘몸짱’이었습니다. 키가 커서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고, 풍채가 좋고, 장군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기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중심’(heart)입니다. 마음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이 먼저 보는 것은 외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모를 잘 가꾸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습니까? 미국은 특별한 모임이나 교회 예배에 오는 게 아니면 평소에 입는 캐주얼한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런데 한국 같은 곳은 거리에 나갈 때 굉장히 차려 입고 나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외모를 먼저 보기 때문이고, 괜히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몇 년 전부터는 ‘외모가 경쟁력이다.’라는 말도 있고, 회사 면접을 할 때도 굉장히 신경을 쓰고 갑니다. 또 ‘예쁘면 다 용서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람들은 외모를 가장 중요하게 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일 텐데, 오래 전 제가 실제로 티브이에서 본 내용입니다. 뉴욕이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는 곳에서 아주 아름다운 여성이 미니스커트 정장을 차려 입고 화장도 화려하게 한 채로 사과가 잔뜩 들어 있는 봉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사과를 떨어뜨리는 척하니까 지나가던 남자들이 1초도 안 되어 주우며 도와주었고, 저쪽에 있던 남자들도 뛰어와서 집어주었습니다.
바로 한두 시간 후에 똑같은 여성이 이번에는 크고 두꺼운 파커를 입고, 펑 퍼진 바지를 입고, 머리도 부스스하고, 안경도 두껍고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채로 사과 봉지를 똑같이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니까, 지나가던 남자들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면서 그냥 지나가는 겁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그랬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확인하고 싶으시면 한 번 실험을 해보십시오. 요 앞의 몰에 가서 최고급 백화점에 멋진 옷을 입고 외모도 잘 꾸미고 가면 잘해줄 겁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입고 머리도 부스스 하게 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가보십시오. 아마 아무도 거들떠도 안 보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겁니다.
대개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 자기고 판단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형수술 같은 것도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까? 또 피부 관리나 치아 교정에도 엄청난 돈을 들입니다. 운동도 열심히 해서 근육질이나 날씬한 몸매를 가지려고 그렇게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몸짱’이니 ‘얼짱’이니 하는 말도 나온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런 용모와 키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얼짱이냐 몸짱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 어떤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는 너무 인물이 안 좋아.’ 하고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나는 너무 잘생겼어. 나는 너무 예뻐서 고민이야.’ 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럼 정말 고민을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내가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진짜 모습을 감추기 위해 다른 일을 합니다. 뭔가 비싼 것을 삼으로써 자기의 모습을 감추려고 합니다. 비싼 명품이라든지, 고급 자동차 등이 그렇습니다. 또 알코올이나 마약을 함으로 자기의 모습을 감추거나 진짜를 느끼지 않으려고 피합니다. 또는 뭔가에 열중하므로 자기의 진짜 모습을 감추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데 속지 않으십니다.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겉모습이 아무리 뛰어나도, 공항에서 검색대를 통과할 때 보십시오. 두 손을 들고 기계에서 뭔가가 지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의 옷 안에 뭐가 들었는지가 다 보입니다. 물론 그것도 겉 표면만 나오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하나도 안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아무래도 외모를 보니까 외모도 어느 정도 잘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많은 돈, 큰 집, 좋은 자동차, 아름다운 외모, 좋은 직업, 학벌, 자기가 이룬 업적 등을 통해서 자기의 진짜 모습이 가려질 수 있고 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진짜가 다 드러납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보다 마음을 가꾸어야 합니다. 잠언에서도 무엇보다 마음을 가꾸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 마음을 가꾸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 살아야겠습니다.
3. 왕으로 기름 부음 받는 막내 다윗 (8-13절)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8-9절)
첫째 엘리압은 아니라고 하니까, 이새는 그 다음 아들들을 부릅니다. 둘째 아비나답이 지나가고, 또 시므아라고도 하는 셋째 삼마가 지나가도 선택을 받지 못합니다.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까지 지나가도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십니다.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0절)
이때 사무엘은 상당히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일곱 명의 아들들이 와 있는데 다 지나갔지만 아무도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못 들은 것은 아닌가? 내가 이제 선지자로서의 영감이 없어진 건가? 혹시 내가 엉뚱한 마을에 왔나? 아니면 기름 부을 사람의 집안을 잘못 골랐나?’
이렇게 곰곰이 자기 자신을 다시 점검해보아도 그건 아닙니다. 자기는 제대로 왔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여 한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또 다른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1절)
이새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채 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뭐라고 부릅니까? 다윗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막내’라고 합니다. 우리끼리는 막내라고 하면 무시하는 말은 아닌데, 이전에 사용하던 개역한글 성경에 그 표현이 더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말째’라고 하는데, 무시하는 듯한 마음이 거기 들어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막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하카톤, haqqaton)로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중요한 자리에 나서지 말고 빠져야 하는 집안 꼬마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중요한 모임이 갈 때 높으신 분을 만나야 하니까 아주 어린 자녀를 맡기고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윗은 일단 외형적인 조건에서 성공하기 힘든 상황에 있었습니다. 8형제 중 막내였고, 아버지가 부르러 보내지도 않을 만큼 형들에 가려서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존재감이 제로였고 1도 없었습니다. 그는 나이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리더감’으로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얕잡아 보고 그냥 막내 하나 남았다고 제대로 취급도 안 해주었다는 것, 형들은 다 불렀는데 그는 안 불렀다는 것은 그가 집안에서 맡은 일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양치기’였는데, 이것은 농장 일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가장 힘이 덜 드는 일이고, 별로 잘하지 못해도 큰 손해를 끼치지 않는 일입니다.
물론 맹수가 와서 양을 잡아먹으면 손해가 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아들에게 양을 맡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알 수 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찮게 여기는 일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그날 다윗은 양치기로 일하느라 양 떼를 데리고 먼 곳에 가 있었고 또 업신여김을 받는 천덕꾸러기 막내였기 때문에, 그날 그를 베들레헴 집에 데리고 와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축제에 막내는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막내를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역시 지금이나 옛날이나 먹는 게 중요합니다.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이 아니하겠노라.” 그냥 데려오라고 하면 안 데려올까 봐 ‘그럼 밥을 안 먹는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빨리 데려오게 되는데, 다윗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2절)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이 다음 번 왕이 될 사람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을 하다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갑니다. 거기서 안식일이 되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이니까 구약의 말씀을 죽 전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세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행 13:22)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라는 것이 바로 ‘이가 그다.’라는 말씀입니다. ‘내 뜻을 다 이룰 사람이다.’ 옛날에 쓰던 개역한글 성경에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다윗 역시 외모가 뛰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새번역)이었습니다. ‘빛이 붉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부르니까 멀리서 양을 치다가 열심히 뛰어와서 벌개진, 그의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얼굴을 나타냅니다.
‘눈이 빼어났다’는 것은 눈빛이 생기가 있고 살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밤새 술 마시고 놀다가 간신히 깨어난 흐리멍텅한 눈이나 퀭한 눈이 아니라는 겁니다. 늦게 자고 간신히 일어나 예배에 와서 졸림을 참느라 풀려 있는 눈이 아니라, 아주 이글이글 거리고 초롱초롱한 눈입니다.
제가 ‘눈’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 고등부 시절에 수련회를 갔을 때 마지막 날 기도회가 끝나고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가 아침에 간신히 일어났는데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났습니다. 제가 일어난 모습을 본 선배가 제게 “야, 네 눈이 얼음판에 미끄러져 자빠진 송아지 눈 같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이 말씀을 읽고 제가 다윗에게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다음부터는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자빠진 송아지 눈 같다.’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더 눈을 크게 부릅뜨고 다녔더니 왜 째려보느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중에 고2 때 학생증 증명사진을 찍은 것을 보니까 진짜로 제가 눈을 그렇게 크게 부릅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용모와 키’, 즉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외모까지 아주 준수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 나는 너무 잘생겨서 큰일이야. 나는 너무 예뻐서 큰일이야.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는데, 나는 외모가 이리 뛰어나니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어떡하지?’라고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다윗은 외모도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이 택함을 받은 것이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외모가 아니라 그의 마음의 중심이 올바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습니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7절, 새번역)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만’ 보고 판단하지만,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모가 좋으냐 안 좋으냐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외모가 뛰어나도 좋고 안 뛰어나도 괜찮습니다. 마음의 중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외모와 중심 중 어디에 내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다해서 꾸미는 데 더 투자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외모가 어떻든 상관없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에게 명령하십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13절)
여기에 다윗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 전에는 그냥 ‘막내’나 ‘그’로 나왔는데, 이제는 ‘다윗’입니다. 그 동안 집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던 다윗은 이제 “그의 형제 중에서”, 즉 그의 형들이 둘러선 가운데 다 보는 앞에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 동안 자기를 무시했던 아버지와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아니라 자기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안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와 형들도 그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동안 그의 묵묵한 순종과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해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태도를 보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그를 인정해주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게 하십니다.
다윗이 막내로서 집안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도, 목동의 일을 하게 된 것도, 모두 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준비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형편에 대해 낙담하거나 불평하기보다, 그 시간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왜 나한테는 이런 일밖에 안 맡기나? 형들은 우대해주면서 아버지는 왜 나를 무시하나?’ 하고 불평하거나 집안 탓을 하지 않고, ‘나에게 맡겨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것이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다윗의 그러한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발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전까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있던 무명의 소년목동 다윗의 이름이 이제 역사의 한가운데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은 구약 성경에서 600번 이상, 신약 성경에서 60번 이상 반복되는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메시야도 그의 집안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겁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코로나 상황 때문에 한계가 있더라도, 모든 것이 나를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뭘 준비시키시겠습니까? 물론 이 땅에서 뭔가 더 큰일을 하게 하시는 준비가 될 수도 있고, 천국에 잘 올 수 있는 준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별 것 아니라 생각되는 순간도 하나님의 귀한 사명을 위한 준비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정말 믿는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낙담하거나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면 ‘내가 이런 일이나 할 사람인 줄 알아?’라고 하며 화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자기는 큰일을 할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작은 일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요셉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이집트의 총리가 될 야심을 품고 노예생활을 하면서 계획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고, 비록 상황은 힘들지만 순간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을 뿐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때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냥 매순간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고 의지하면서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의 이새라는 사람 집안의 막내아들로 양을 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누가 알아줍니까? 누가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서 압니까?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을 불러 쓰신 적이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작은 일에 소홀히 하지 않고 성실히 할 때 하나님의 큰일에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동안 무시당하며 살았고 중요한 모임에는 초대받지도 못했던 목동 소년은, 이제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주어진 작은 일에 충성하며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기름 부음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매순간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며, 주어진 일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기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시다가 때가 되면 들어 쓰십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이 미국 땅에서 이민자로 또는 유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때 이런 마음이 혹시 드십니까? ‘내가 이런 걸 하려고 여기 왔나?’ 그런 자괴감이나 괴로움도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이겁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을 하러 여기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실하게 하고 있다 보면 하나님이 또 다른 길을 열어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미국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심지어 가족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인정해주십니다. 묵묵히 순종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인정해주십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과 같이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