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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z8SSIvXhi9Y?t=2079

 

 

20211121일 주일예배

추수감사절 메시지

감사와 기쁨과 확신

(빌립보서 13~7)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병원에 입원하신 분을 찾아뵈러 갔다가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거기 티브이가 켜져 있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는데, 그 시간에 방송되는 프로그램이 굉장히 웃겼습니다. 이게 무슨 개그 프로그램인가 하고 보니까, 놀랍게도 개그가 아니라 퀴즈 프로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퀴즈 프로그램이 퀴즈는 별로 안 하고 전부 개그만 하고 있었습니다.

 

방송 관계자들에 따르면 한국 지상파 방송에서는 조금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어도 안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코미디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 지상파 방송에는 예능 프로그램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요즘 한국 프로그램들을 많이 보실 텐데, 요즘 예능 프로그램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들어보지도 못한 프로들이 많은데 전부 예능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별로 내용도 없는 시시한 말장난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재미있다고 웃습니다. 또 같은 사람이 여기저기 겹치기로 나오니까 더욱 무슨 프로그램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든 프로가 다 코미디화가 되어서, 퀴즈 프로그램도 웃겨야 하고, 드라마도 웃겨야 하고, 심지어 다큐멘터리에도 코믹한 요소가 들어가야 사람들이 봅니다.

 

그런데 이처럼 웃기는 프로그램들이 요즘 굉장히 많은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한국에 이렇게 웃기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많이 웃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를 많이 표현하는 말 중 하나가 다들 화가 나 있다.’입니다. 이렇게 웃기는 게 많은데 왜 다들 화가 나 있습니까? 웃기는 웃는데 기쁨은 없습니다. 웃고 나면 허탈합니다.

 

사실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으로 현실을 잊게 만들고 웃게 만들어서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없다는 사실을 애써 가려보려고 하는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프로그램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은 사실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이 사라져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분명히 재미는 있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재미와 기쁨은 다릅니다. 유사품에 속으면 안 됩니다. 재미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프로그램들은 전부 재미를 추구하니까, 재미있게 보고 나면 허탈합니다. 아무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기쁨을 갈망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인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내가 기뻐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소유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라는 짧은 편지에 기뻐하라는 말이 30번이나 나옵니다. ‘나도 기뻐한다. 나와 함께 기뻐하라.’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기쁨의 편지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기뻐하라고 하는 바울이 그때 어디 있었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을 뿐 아니라, 나이가 들어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상태이고, 재산도 하나 없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특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평소에는 감사하지 않았어도 오늘은 감사해야 하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항상 감사합니다.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습니까? 혹시 기쁨이 없다면 왜 없습니까?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인데, 기쁨은 감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이 누렸던 기쁨의 이유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기쁨의 근거가 되는 감사 (3-4)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3-4)

 

1)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

 

사도 바울의 기쁨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감사하니까 기뻐한다는 겁니다.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함으로 주님께 기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 혹시 지금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는 감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으면 기뻐합니다. ‘감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기억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103:2,)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감사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기억하는 것도 감사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그 사람이 잊어버리고 전혀 감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기분 나쁘고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해준 호의와 사랑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유명한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밑인 7층에 배은망덕한 사람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스승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 자기 생명의 은인이었던 줄리어스 시저를 배반한 브루투스 같은 사람이 거기 있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배신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을 가두는 곳이 지옥의 가장 깊은 7층이라고 책에서 썼습니다.

 

이전 유행가 중에 <나쁜 남자>라는 노래가 있었고,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여자들도 있는데, 정말 나쁜 사람은 터프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 배은망덕한 사람입니까? 사실 우리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도 어떤 일이 생기면 주님, 도와주십시오. 이것을 해결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다 주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 일이 해결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금방 잊어버리고 제대로 감사를 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다 또 문제가 생기면 다시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렇게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배은망덕한 사람이고 가장 나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하나하나 생각해보십시오. 은혜가 아닌 줄 알았는데 은혜인 것이 많습니다. 사실은 전부 다 은혜입니다. 그것을 잘 생각해보면 속에서 기쁨과 감격이 솟아납니다. 지난 주 동안 무엇이 감사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뭉뚱그려서 묶어서 범사에 감사하다.’라고 하지 마시고, 하루 중에도 사건별로 또 시간별로 잘라서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감사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일어난 사건이 되고 해프닝이 되고 우연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하나하나 기억하기 시작하면, 그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셨구나!’ 하고 깨닫게 되어서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진짜로 경험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주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감사를 하나하나씩 살펴보면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삶을 살면 주님은 정말로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내 삶에 벌어진 모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배려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감격이 넘치게 되고 기쁨과 감사의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아까 부른 곡 가사 중에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하나 따져본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안 따져본 사람은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내 삶에 정말 당연한 게 하나도 없었구나. 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로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보통 뭐라고 합니까? ‘오늘은 하루가 그냥 지나갔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또는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가.’라고 말할 때도 많습니다. 50대는 50마일로 달리는 것 같고 60대는 60마일로 가는 것처럼 빨리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시간이 빨리 지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생각 없이 살아서 그렇습니다. 특히 감사하는 생각이 없어서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니까 시간이 죽은 시간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휙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장 오늘 밤부터 자기 전에 기도하시면서 아침부터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감사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날은 정말 살아 있는 날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매순간 그렇게 사랑하시고 지켜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으면 그 시간은 죽은 시간이 되고, 별 의미 없이 확 지나간 날이 됩니다. 감사하며 살아갈 때 살아 있는 시간이 되고 알차게 보낸 날이 됩니다.

 

 

2)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

 

바울은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으로도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3-4)

 

우리는 사실 나 자신을 위해 하나님이 해주신 일도 잘 감사하지 않고 넘어갈 때가 많은데, 바울은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신 일을 인해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 삶입니다. 자기만 위하는 삶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이 행복을 줍니다.

 

우리도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어떻게 해서든 그분이 주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로 우리와 함께 자라가도록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지난 수년간 많은 분들이 우리의 적은 섬김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며 섬기다가 자신이 섬기던 그분이 마음을 열어서 드디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고 세례를 받는 날, 우리는 함께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지금 너무나 감사한 것은, 새로 오신 분들 중에 미국에 와서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이 이번에 <생명의 삶>도 하시는데, 믿음의 결단을 하시고 다음 주면 세례를 받으시게 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믿음의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인만의 기쁨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며 섬기던 분들과 온 교회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바울은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렇게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하면서도 내가 너희의 소문을 듣고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의 편지들은 언제나 감사로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로 인해 감사할 뿐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자기가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그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역사하신 것까지도 감사합니다. 그러한 그가 그토록 위대한 사도가 되고 그렇게 쓰임을 받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늘 감사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이것을 보아도,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로 감사해서 하는 말이면 대단한 믿음입니다. 어떻게 범사모든 일에 다 감사를 한다는 것입니까? 모든 일이 뭔지를 다 알아서 그렇게 말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을 쓰지 말고 그냥 감사한 일에 대해서만 감사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모든 것 때문에 감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기쁨을 잃어가는 온 세상을 향해서 기쁨을 가르치는 기도, 특별히 감사의 기도를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역사하신 일에도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감사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쁨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2.   감사의 내용 (5)

 

바울이 그렇게 감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5)

 

바울이 감사하고 기뻐했던 성도들의 삶의 모습은, 그들의 참여즉 교제였습니다. 함께 교제하며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감사했던 것입니다. 이 삭막한 세상에서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결혼하신 분들 중에 연애결혼을 한 분도 있고, 소개를 받아서 데이트를 하다가 결혼에 이른 분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데이트하며 서로 웃으며 대화를 했을 것입니다. 결혼한 지 오래 되신 분들은 내가 그때 그랬나?’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그때 그랬던 것은 확실합니다.

 

결혼한 분들은 이전에 연애했던 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내가 데이트하면서 뭘 했나?’ 만약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의 기술로 만든 스마트폰을 가지고 가서 내가 데이트하는 장면을 몰래 카메라로 찍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겠습니까?

 

지금 만약 그것을 주면서 보라고 하면 정말 한심하게 느껴질 겁니다. 아니면 정말 민망해서 보기가 힘들 겁니다. ‘아니, 도대체, 저런 것을 가지고 왜 웃었지? 웃을 게 없어서 저런 말에 웃었나?’ 웃기지도 않은 것에 웃고 실실거리며, 정말 한심한 모습이 많이 담겨 있을 겁니다. 게다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을 해대는데, 정말 민망하고 창피할지 모릅니다.

 

옛날에는 그런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는 도둑이야.” “?” “내 마음을 훔쳐갔으니까?” 이런 것은 정말 고전입니다.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 이게 사실 다 우리가 했던 겁니다. 진짜로 찍어놓았으면 그런 말을 다 했을 겁니다.

 

자기는 피곤하겠어.” “?” “하루 종일 내 마음속을 뛰어다니니까.” 또 자꾸 눈을 피하니까 말합니다. “자기,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어? 왜 내 눈을 자꾸 피해?” “자기가 눈이 부셔서 쳐다보지를 못하겠어.” 그와 반대로 뚫어지게 쳐다보니까 말합니다. “아니, 사람 민망하게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거울 보는 거야. 자기의 맑고 큰 눈에 내가 비치잖아?”

 

만약 이런 것을 비디오로 찍었다가 틀어준다면 얼마나 민망합니까? 또 얼마나 한심합니까? ‘아니, 내가 저런 말을 어떻게 했나?’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서 웃고 대화하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데, 그냥 좋아서 서로 웃는 겁니다. 그 사람이 좋으니까 무슨 말을 해도 좋은 겁니다. 그 사람이 좋으니까 남들이 보면 미친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손발이 오글거릴 만한 말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니까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좋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들을 볼 때 그냥 좋으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교제를 보면서 기뻐합니다. 별다른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냥 기뻐합니다. 단순히 그들과 교제하고 그들이 서로 교제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만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교제가 제대로 되어 가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어떻게 교제했다고 합니까?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 즉 복음으로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모여서 웃고 떠들고 즐겁게 지내는 교제뿐 아니라, 복음 전파라는 목적을 위하여 마음을 합해서 함께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목장이 바로 그런 모임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복음 중심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선교사님과 기도와 물질로 협력하는 것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 중심의 교제가 아니라면, 아무리 믿는 사람끼리의 모임이라고 해도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서 만나서 너무 좋다고 하며 따로 밖에서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보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저러다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거의 대부분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문제가 생깁니다. 복음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익 때문에 만나고 재미 때문에 만나면 반드시 깨지거나 서로 등을 돌리게 됩니다.

 

사이가 좋은 것과 복음의 동역자인 것은 서로 다릅니다. 부부가 사랑하고 좋을 수 있지만, 부부끼리 동역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뜻이 같지 않거나 삶의 방향이 다르면 그렇습니다. 같은 사랑, 같은 뜻을 가지고 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는 교제가 가장 좋은 교제입니다. 그렇게 복음 안에서, 복음을 중심으로 교제하는 것을 보면서 바울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3.   기쁨의 이유 (6-7)

 

사도 바울이 복음으로 교제하는 것을 그렇게 기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교제는 반드시 아름다운 결실을 맺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6)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는데, 그 기쁨의 근거는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와 복음을 위한 교제에 있었습니다. 또 그 복음을 위한 교제는 마지막에 귀한 결과를 확정 받았기 때문에 더욱 기뻐한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7)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 헌신한 것이 자신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옵니다.

 

바울이 성령께서 막으심으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 아시아는 당시 로마제국의 아시아 주를 말합니다. 지금의 터키 서쪽 지역입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계속 길이 막히니까 이리저리 흘러가다가 드로아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우리가 이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유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드디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데, 유럽에 들어가 처음으로 도착해서 사역한 도시가 바로 빌립보였습니다. 거기서 강가에 기도하러 갔다가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는데, 루디아가 거기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믿게 됩니다. 바울이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분명히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거기서 귀신 들린 여종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냈다가, 그 주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억울하게 잡혀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원래 로마 시민은 재판해서 판결이 확정된 후 형을 집행해야 하는데, 재판을 하기도 전에 매를 맞고 갇혔습니다. 그런데 밤에 기도하고 찬송할 때 땅이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곳을 지키던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그것이 자기 책임이니까 너무 두려워서 자살하려고 하는데, 바울이 당신의 몸을 해치지 말라!” 하고 외칩니다. 그러자 간수는 두려워 벌벌 떨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바울이 유명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16:31)

 

빌립보에서의 그 모든 역사는 주님이 시작하신 일입니다. 빌립보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런 것도 주님이 시작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루디아, 간수 집안, 또 귀신 들렸다 쫓아내주었던 여종 등이 주축이 되어 그들을 통해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이 시작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시작과 더불어 과정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인도하셔서 결국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있지만 하나님께는 없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기적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지만 주님께는 전혀 기적이 아니라 일상입니다. 하나님께는 우연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는 도중하차용두사미같은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시작하셨으면 반드시 끝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고 다 불확실합니다. 30년 전쯤인 1990년에 일본이 아주 자신만만했었습니다. 경제대국이고 아시아의 선진국인데, 그때까지 쌓아 놓은 부의 축적을 가지고 앞으로 50년간은 외국에 수출하지 않고 내수만으로도 안정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6개월 정도 지나고 일본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 있게 나아가다 잘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교만하면 언제나 안 좋습니다.

 

한국 제품들이 미국에서 굉장히 인기를 끌고 잘나가게 된 것이 한참 되었습니다. 가전제품도 잘 팔리고, 특히 코로나 사태가 된 히우 한국 자동차들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돈을 더 얹어주고 줄도 길게 서야 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Tesla)가 아주 잘나가고 있습니다. 아마존(Amazon)도 옛날에는 작았는데 지금은 엄청난 공룡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들이 10, 20, 30, 50년 후에도 최고 기업으로 남아 있으라는 것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거대 기업이었던 IBM도 거의 다 무너졌다가 아주 힘겹게 일어나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기업으로 바뀌었습니다. 옛날에는 많이 쓰다 지금은 안 쓰는 코닥(Kodak)도 그렇고, 최근에 시카고에서 위용을 자랑하며 시어즈 타워(Sears Tower)를 만든 시어즈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타워도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대단했던 기업들이 몇 십 년 못 가서 파산하고 망하고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영원히 계속 갈 것처럼 지금은 느껴져도 그런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시작하신 일을 주님이 반드시 끝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셨으면 반드시 끝내십니다.

 

바울이 개척했던 다른 교회들은 중간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다 지원이 끊어졌지만, 빌립보 교회는 끝까지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내며 사랑으로 지원하고 협력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로마제국 앞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들이 바울에게 계속 선교헌금을 보내서 바울이 선교활동을 잘할 수 있도록, 여기저기 다니며 사역할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을 금액으로 따지면 엄청난 것이었겠습니까? 요즘 회사가 움직이는 돈에 비해도 아주 적은 액수였을 겁니다.

 

로마제국 앞에서 빌립보 교회가 한 일은 마치 바람 앞에 꺼져가는 촛불 정도로 아주 미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시작하신 분은 자기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끝내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들이 계산해서 지금 돈이 얼마가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얼마가 있고, 얼마를 보내야 하고, 얼마는 할 수 있고 얼마는 할 수 없고...’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돈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시작하셨으니 주님이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그냥 동참하는 것이다.’ 이런 확신으로 했기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이 확신을 바울도 가졌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가졌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약속 때문에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기 전에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1:8)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도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통해서? 바로 너희를 통해서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무슨 기적으로 하시는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하겠다고 분명히 이야기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쓰겠다.’ 주님이 하겠다고 하셨으니까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신 말씀을 그들이 믿고 동참한 것입니다. 끝까지 신실하게 동참한 겁니다. 주님이 하시겠다는데 막을 세력이 어디 있습니까?

 

로마는 300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고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검투사나 맹수와 싸우다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박해를 했는데도 복음이 계속 전파되어서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우리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망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레닌이 소련(Soviet Union)을 만들면서 이 땅의 미신은 뿌리를 뽑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스탈린은 잔혹하게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처형했습니다. 스탈린의 방향을 따른 모택동도 문화혁명을 통해 중국 전역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목사들은 잡아 가두고, 성경은 불태우고, 교회는 문을 닫고, 선교사는 추방하고, 온갖 박해를 다 했습니다. 결국 크리스천들이 한 나라에서는 70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는 50년 동안 박해를 당했습니다. 다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숫자로만 따지면 세계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놀랍게도 중국입니다. 개방하고 보니까 문을 닫았을 때보다 적게는 10, 많게는 50배로 크리스천이 늘어났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사람이 한 게 아닙니다. 정말 주님이 하셨습니다. “내가 하겠다.”라고 하셨는데 누가 막겠습니까?

 

빌립보 교회의 몇 안 되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며 선교에 협력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몇 천 명, 몇 만 명 되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몇 명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예배하며 선교에 동참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하는 일에 그냥 동참한 겁니다. 바울이 하는 일에 함께 한 일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뭔가를 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립니까?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확신이 없습니까?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기쁨이 없습니까?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기쁨이 생기고, 기쁨이 솟아나면 확신이 생깁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는 바로 그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랬지만,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감사하니까 기쁨이 생겼고, 기쁨이 생기니까 확신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제가 미국에 이민 오기 직전까지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는 개척하자마자 1년 후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1980년대에는 3천 명 정도 되는 제법 큰 교회였지만, 개척하고 나서 1년 만에 교인 수도 적고 재정도 어려울 때 선교사를 협력이 아니라 파송했다는 겁니다. 전적으로 지원한 겁니다.

 

그것은 원래 선교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공부하다 보니까 선교를 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송을 했더니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자기들은 여름만 되면 바닥에서 물이 차오르는 지하실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선교는 무슨 선교냐? 일단 땅 위로 올라온 다음에 하지 왜 지금 선교를 하냐?”

 

선교사를 파송하고 나서는 또 교인 중에 어떤 분이 따졌다고 합니다. “지금 경험도 없는 젊은 선교사를 보내놓고 굶겨 죽일 작정입니까?” 그분의 말은 막 개척한지 1년 밖에 안 되는 작은 교회에서, 아파트 지역에서 사람들이 이 교회 저 교회로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파송한 선교사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존경하는 당시 담임목사님이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파트 사람들이 철새처럼 옮겨다닌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철새가 아니십니다.”

 

그렇게 1년 만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가 나중에 수적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제일 많이 내보낼 때는 교회 예산의 50%를 밖으로 보낼 정도로 사역을 잘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주님이 시작하신 일은 주님이 끝내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이 한 게 아닙니다. 당회가 한 게 아닙니다. 교인들이 한 게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죽는 데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의 넓은 품을 바로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하신 것처럼, 갈 이유가 없지만 복음에 빚진 자 되어서 선교지로 가는 분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뿐인 외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놀라운 결론을 가졌기에 바울은 현재 감옥에서 매를 맞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자유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결국 완성하실 것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확신이 감옥의 어두움을 환하게 비추어주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세상의 모든 것은 불확실합니다. 작년 1-2월까지만 해도 코로나바이러스가 미국을 삼켜버릴 줄 누가 알았습니까? 미국이 감염자와 사망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백신이 나오고 여러 가지로 좋아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불확실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나와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겠다고 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때 기쁨이 넘치게 되고, 기쁨 가운데 복음의 교제로 인하여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감사함으로 기뻐하고, 기쁨 가운데 확신을 가짐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 이 행복과 기쁨과 감사를 나만 가지는 게 아니라 주변에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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