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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DiBb62frJsw?t=1957

 

 

2022123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

요나단의 사랑과 사울의 질투

(사무엘상 181~16)

 

[들어가는 말]

 

아마 대부분 여기 계신 분들은 백설공주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마녀가 왕비가 되어 마법의 거울에게 물어봅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 그러자 , 왕비님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백설공주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또 물어봅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 그러자 왕비님도 아름다우시지만, 백설공주가 가장 예쁩니다.” 그래서 질투와 시기심으로 가득하여 백설공주를 죽이려 하자 피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기심은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외모나 능력을 보면서 그에 비해 자기는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화가 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그 사람의 행복과 성공을 파괴하고 불행하게 만들어 그 사람이 비참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심리가 바로 시기와 질투입니다.

 

시기심이 많고 질투를 잘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자기보다 더 나아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질투를 느끼게 하는 사람과 겉으로는 친한 척하더라도 진짜 친밀한 관계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시기심이 무서운 것은, 자기가 시기하는 그 사람을 파괴하려고 하고 실제로 파괴할 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를 깨며, 결국은 자기 자신도 망가뜨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내에서 진짜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는 결코 이론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랑합시다.’라고 말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사랑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받았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합시다. 용납합시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하고 아무리 말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실천해야 하고 거기에 연습이 필요합니다.

 

운동선수들이 갑자기 경기에 나가서 승리하는 게 아닙니다. 그 뒤에 피나는 훈련이 있습니다. 몇 분짜리 경기를 뛰기 위해서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을 훈련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목장생활을 하며 거기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훈련하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습과 훈련이 없이는 실행이 안 됩니다. 겉으로 피상적으로만 살짝 보고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하고 가서는 잘될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친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얼마든지 질투도 할 수 있고 시기도 할 수 있고 미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꾸 부대끼는 가운데 극복하려고 애쓰며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혹시 겉으로는 친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잘 나가는 다른 지체를 시기한다면, 그것은 관계를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도 비참하게 망가지고 맙니다. 교회가 분열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을 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시기하는지 알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테스트가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그렇습니다. 나와 비슷한 직종에 있는 직장을 다니는 다른 형제자매가 있는데 나보다 잘 나가고 승진하고 연봉이 높아졌다면, 그때 내 마음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가를 한 번 잘 보십시오.

 

사업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다른 성도의 사업이 잘되고 나보다 돈을 더 잘 벌 때 내 마음이 어떠한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학생의 경우에는 친구가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을 때, 나보다 더 좋은 학교를 갈 때 어떤 반응이 내 속에서 나오는지 보면 됩니다. 교회에서 직분자 선출을 위한 공동의회를 할 때도 다른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었을 때 내 마음 상태가 어떤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 정말 잘됐다. 저 사람이, 저 친구가, 저 형제가, 저 자매가 잘되니까 정말 좋다.’라고 축하하면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정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이 참 불공평하네. 나는 계속 이 모양인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잘되지? 잘난 것도 없는데 왜 이상하게 저 사람은 잘 봐주고 나는 이렇게 안 봐주는가? 혹시 무슨 수를 쓰는 것은 아닐까?’ 하며 심기가 불편해진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시기심과 질투를 가지면 친밀한 관계가 불가능합니다. 겉으로는 친한 척해도 진짜로는 친밀하지 못합니다. 이웃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을 때 친밀한 관계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향한 사울의 마음이 바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시기와 질투를 넘어서 아예 죽여 버리겠다는 살인의 마음을 품을 정도의 미움으로 발전했습니다.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뜨린 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온 백성의 마음은 기쁨으로 차서 노래하며 춤을 추는데, 사울의 마음은 그것을 보며 아주 불쾌했습니다. 사울은 결국 그런 자신의 마음을 잘못 다스려서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하고 맙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1.   요나단이 다윗을 깊이 사랑하다 (1-5)

 

골리앗을 상대로 위대한 승리를 거둔 후 다윗에게는 큰 지원군이 생겼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그러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1)

 

17장 마지막 부분을 우리가 살펴보지는 않았는데, 사울이 다윗을 부릅니다. 그때 다윗이 자신의 집안에 대해 사울에게 대답하고 나니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끌리면서 마치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것처럼 다윗을 아끼는 사랑의 마음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골리앗을 쳐 죽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을 사울이 자기 부하로 삼고자 함께 머물게 했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의 왕궁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2-3)

 

여기서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맺었다고 되어 있는데, 무슨 언약을 맺었겠습니까? 나중에 뒤에 나오는데,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에 대해 또 서로의 자손에 대해 잘 대해주기로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안끼리 해치지 말고 누가 더 잘되든지 의리를 지키며 서로 돌봐주는 사이가 되자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요나단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경우, 서로 해치지 말고 의리를 지키며 돌봐주고 자손들까지 돌봐주자는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나중에 실제로 다윗이 이 언약을 지킵니다. 요나단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을 돌보아줍니다. 왕지로서 상급자였던 요나단은 언약의 증표로 자신의 물건들을 다윗에게 선사합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4)

 

왕자의 물건이니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주 명품이었을 겁니다. 그것들을 아낌없이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때 이후로 다윗은 사울 밑에서 전공을 세우기 시작했고, 사울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5)

 

다윗은 사울이 어떤 임무를 주어서 보내든지 맡은 일을 잘해냈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온 백성과 사울의 신하들 모두 그 일을 마땅히 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 말로 하면 다윗은 낙하산입니다. 아주 젊은 청년으로 20대 초반 정도 밖에 안 되는 나이인데, 갑자기 군대 장관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군인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그냥 군대장관이 되었습니다. 왕이 꽂아 넣은 낙하신이 틀림없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화두가 되는 것이 공정입니다. 특히 청년들은 불공정한 일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다른 사람에게 더 혜택이 돌아가고 공정하지 않다고 느껴지면 들고 일어납니다.

 

그런데 다윗이야말로 불공정의 대표 격인 인물입니다. 왕이 그 새파란 청년을 군대장관으로 삼았으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군대의 사기가 어떻겠습니까? 장군들은 아주 말단 군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공을 세우면서 성장하여 장군이 되었는데, 새파란 애송이가 자기와 동급 또는 더 높은 군대장관이 되니까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습니까? 그 밑의 군인들도 얼마나 사기가 떨어지겠습니까?

 

한국의 대기업들을 보면 기업 오너들이 자기 자녀를 높은 자리에 꽂아 넣지 않습니까? 나이나 경력에 비하면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파격적인 혜택을 주는 겁니다. 그나마 그것은 핏줄이니까 이해할 수 있지만, 베들레헴 시골 촌놈을 갑자기 군대의 높은 장군으로 탁 세우니까 군사들 특히 장군들 사이에 불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온 백성과 사울의 신하들조차 그것을 합당히여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낙하산인데 나보다 못한데도 높은 자리에 왔다면 불만이 올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낙하산이라도 보니까 거기 올만한 사람인 겁니다. 너무 탁월하고 뛰어나고 자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말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윗은 그 자리에 맞는, 아니 그 이상의 전과를 세우며 계속 승리를 합니다. 게다가 골리앗을 이긴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자기들은 벌벌 떨면서 나가지도 못했는데, 이 어린 청년이 나가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습니다. 마땅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그를 칭송합니다. 그를 따릅니다. 다윗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2.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다 (6-16)

 

여기까지는 아주 좋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다윗의 인생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 군대를 이스라엘 군대가 무찌르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부른 노래가 문제였습니다.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6-7)

 

여기 보시면 여인들이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바로 걸그룹의 시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옛날에 한국에서 가수들은 노래만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이돌 그룹들이 나오면서 노래와 춤을 같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는 BC 1000년경 즉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에 이미 노래와 춤을 같이 하던 여자 그룹이 있었습니다. 걸 그룹의 시초 격입니다.

 

6절을 잘 보면, 여인들이 사울을 환영하러 나왔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을 기뻐하며 다윗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수천 명을 죽였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다윗의 명성이 이미 전 이스라엘에 다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골리앗과의 전투 이후 시간이 약간 흘렀고, 그 사이에 다윗의 명성이 전 이스라엘에 다 퍼졌습니다. 다윗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온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는 나가서 싸우고 이기고 돌아오는데 갑자기 대대적으로 자기를 환영해주니까 얼떨떨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라 유명하지, 예수님 당시도 그렇고 다윗 때는 더더욱 시골입니다. 알려지지도 않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 출신 다윗이 영웅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때 그 노래를 들은 사울은 마음이 뒤틀리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8-9)

 

사실 여인들의 노래가 사울을 그토록 불쾌하게 하고 노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자기가 좋아하는 걸 그룹이 안 나오고 싫어하는 걸 그룹이 나와서 화가 난 게 아닙니다. 사실 히브리 시에서 천이나 만은 아주 많은 수를 비교의 개념 없이 단순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편 91편을 보면 너의 왼쪽에서 천 명이 넘어지고 오른쪽에서 만 명이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천이나 만이나 많은 숫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울과 다윗이 수많은 적들을 죽였다라는 뜻으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천천, 사울은 만만이라고 했으면 훨씬 나았겠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사울이 나가서 싸워 이긴 게 아니고 다윗이 직접 나가서 싸워 이겼으니까 그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결국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말을 받아들이는 사울의 마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항상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사울은 이 상황을 이상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듣고 사울은 승리의 기쁨과 감격이 싹 사라졌습니다. 다윗이 자기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웅으로 대접받는 것에 대해서 아주 괘씸하고 분했던 것입니다. ‘아니, 내가 왕인데 나를 제치고 왜 이 어린아이를 칭송하나?’ 하고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다루지 않은 1755-58절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리한 후에 사울은 군대장관 아브넬에게 그가 누구 아들이냐? 어디 출신이냐?’ 하고 묻습니다. 짧은 네 개의 절에 세 번이나 누구의 아들이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냥 보면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누구냐고 묻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 거기 사람들이 많으니까 일일이 누가 누구 아들인지 다 외우지 못해서 다윗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이나 물어보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골리앗을 이기고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저 청년이 어느 집안 출신이냐고 왜 물어보겠습니까?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만큼 유력한 귀족이나 장군 집안 출신인지를 빨리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촌인 베들레헴 출신이고 그곳 사람 이새라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사울은 , 그래?’ 하고 안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별 볼 일 없는 동네의 무명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심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다윗이 지금 여인들의 노래를 통해 자기보다 위대한 용사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다윗을 더 위라고 생각하니까, 사울은 마음이 복잡해지면서 질투심이 불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이날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라이벌로 보기 시작합니다. 자기 아들 뻘인데도 라이벌로 봅니다. 순간적으로 불쾌한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자 분노가 되었고, 그 분노는 지독한 시기심과 질투로 발전하여 결국 살인의 마음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울의 마음 상태를 나름대로 분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핵심감정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감정이 핵심감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이 벌어져도 핵심감정이 기쁨일 경우 그래도 감사하다.’라고 반응하게 됩니다. 안정이나 넉넉함이라는 핵심감정을 가진 사람은 어려움이 생겨도 반응을 잘합니다.

 

그런데 핵심감정이 불안이나 수치심이나 열등감인 사람은 내면이 취약하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도 금방 불안해지고 금방 수치심이 올라오고 자꾸 남들과 비교하여 열등감을 가지게 됩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핵심감정이 불안, 수치심, 열등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볼 때 누구의 아들이냐? 어느 집안 출신이냐?’라고 했는데 불안한 겁니다.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 아이고, 다들 참 난리네.’라는 정도로 하면 되는데 수치심이 올라옵니다. ‘아니, 나는 천천이고 얘는 만만? 내가 얘보다 못하다는 말이야?’ 하고 열등감이 바로 올라오는 겁니다.

 

똑같은 일인데도 사람마다 반응이 이렇게 다릅니다. 사울은 애초에 내면이 굉장히 취약한 사람입니다. 불안과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왕이 될 때도 그렇게 잘생기고 키도 크고 잘난 사람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들 겸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열등감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마음의 불안과 수치심과 열등감 같은 상처를 가지고 해결하지 못한 채 왕으로 있다가, 아주 어리지만 영웅이 등장하니까 불안해졌고, 다윗보다 자기가 못하다는 수치심과 비교하는 열등감이 그대로 올라오면서 살인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자기 밑에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둘 수 있는 통 큰 사람,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리더가 되는 것을 지금 봐도 그렇고 역사를 봐도 그렇고 알 수 있습니다. CEO처럼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가장 뛰어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밑에 뛰어난 사람들을 두고 잘 활용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뛰어나고 활용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속이 좁으면, 자기보다 조금만 뛰어날 때 눌러버리고 제거해버리기 때문, 그런 사람이 리더가 될 때 그 조직은 힘들어지고 망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내 경쟁 상대가 아닐까? 더 크기 전에 눌러버려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면 결코 참된 리더가 될 수도, 큰일을 할 수도 없고, 아주 쩨쩨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교회에서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담임목사로서 부목사가 뛰어나고 사람들이 칭찬할 때, 그를 품어주고 칭찬해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오히려 조금만 잘하는 것 같으면 빨리 내보냅니다.

 

직분자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되는 직분이 있는데, 젊은 사람이 잘하며 치고 올라오는 것 같을 때 막 밀어주고 키워주는 사람도 있지만, 못 올라오고 나를 앞서지 못하도록 누르고 넘어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용하고 키워주고 나를 앞서서 가게 해주는 일꾼들이 많을수록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이스라엘 여인들이 다윗을 더 높이려는 뜻으로 노래를 했더라도 사울이 그 노래를 들으면서 그래, 그건 사실이지. 다윗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골리앗과 블레셋 군대에게 패하고 치욕을 당하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텐데, 다윗이 우리를 구원했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다. 아무리 어리고 젊어도 다윗이야말로 국방장관 감이다. 이런 용사가 내 밑에 신하로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윗 너 참 훌륭하다.’라고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가 바뀌었을 겁니다. 사울의 인생도 바뀌었을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경쟁자로 생각하여 그를 제거해야 자신의 왕좌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음 날 악령이 힘 있게 내리자 집안에서 정신없이 헛소리를 떠들기 시작합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0)

 

여기서 정신없이 떠들어댔다는 말은 발작 증세를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막 소리를 지르고 넘어졌다 일어났다 하는 발작 증세를 보였습니다. 다윗이 평일과 같이 수금을 타는데 그때 사울의 손에 단창이 들려 있습니다. 16장에 보면 이전에는 다윗이 사울을 위해 수금 연주를 했을 때 사울을 괴롭히던 악령이 떠났는데, 이번에는 수금 연주도 사울의 질투심과 적개심을 진정시키지 못합니다.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1)

 

두 번 던졌지만 다윗은 그때마다 피합니다. 사울은 이제 다윗에게 두려움마저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이 자기 창을 잘 피하는 엄청난 운동신경 때문에 두려워합니까? 그게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2-14)

 

사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서 다윗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다윗을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천부장이라는 야전지휘관으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나가서 전투를 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다윗은 백성 앞에 출입했다고 나오는데, 군사를 직접 지휘하며 싸우는 야전사령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 (15-16)

 

사울은 다윗이 더 인기를 끌까 봐 두려워 자기에게서 떠나 전쟁터에 나가게 했는데, 다윗이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며 승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됩니다(14). 이것을 통해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했다는 말은 나가 싸워라!’ 하고 뒤에서 이야기한 게 아니라, ‘나를 따르라하며 다윗이 가장 앞장서 나가서 싸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며 따르게 됩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를 존경하며 따르고 사랑하게 됩니다.

 

다윗이 아주 잘하고 있다는 사실은 똑같은데, 사울의 반응과 백성의 반응이 극과 극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고 백성은 다윗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른 것입니다. 다윗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울 자신이 문제입니다.

 

따지고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다윗은 계속 좋은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 거인 용사 골리앗을 죽여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했고,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울을 위해서 수금을 연주해주어 안정과 치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사람이었고, 사울 자신에게도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충신이었고, 모든 것에 대해 겸손했으며, 이렇게 잘나갔어도 결코 교만하거나 거들먹거리는 자세를 보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태도로 좋은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그를 제거하려 합니다. 단지 자기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그렇게 합니다. 사실은 위협이 안 되었는데, 위협이 된다고 생각을 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좋은 일을 해도 비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교회도 좋은 일을 해도 비난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해서 비난을 받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했는데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억울하게 비난을 받으면 당황하게 되고 마음이 힘듭니다. 잘못해서 벌을 받으면 당황스럽지 않지만, 잘했는데도 비난을 받으면 힘듭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교회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섬기고 최선을 다해 사역하는데, ‘잘보이려고 그런다.’ 하는 비난을 엉뚱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너무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고 그냥 기도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시니까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모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다 보고 다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사람을 믿는 게 아닙니다.

 

좋은 일을 하다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시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좋은 일을 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사람들은 혹시 그것을 칭찬해줄지 몰라도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가를 점검하며 나아가야겠습니다.

 

 

3.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하다 (17-30)

 

이렇게 불같고 비이성적이며 살인적인 사울의 광기가 점점 침착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살인 음모로 발전합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전쟁에서 수훈을 세우고 돌아오면 자기의 맏딸 메랍과 결혼시켜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은 계속 다윗을 전쟁터로 내몰아서 결국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 죽게 할 속셈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17)

 

사울의 언어를 보십시오.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하며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살인을 계획하고 있으면서 여호와(주님)의 싸움을 싸우라합니다. 말로는 잘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믿음과 반대에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죽기를 바랐지만 그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결혼할 자격을 갖추니까, 사울은 성급히 메랍을 다른 사람과 결혼시켜 버립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8-19)

 

물론 다윗도 자기 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되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기 싫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나 같은 사람이 자격이 됩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울은 애초에 다윗을 사위로 삼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사울의 다른 딸 미갈이 오히려 다윗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 일이 사울에게도 알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사위로 삼아서 미갈이 올무가 되게 하여 그를 블레셋과의 전투에 내보내 싸우다 죽게 하리라는 속셈으로 다윗을 사위로 삼겠다고 다시 말합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린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20-22)

 

사울은 다윗의 마음을 돌리려고 자신의 신하들에게 은밀한 공작활동을 지시합니다. 그들이 다윗에게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옳고 합당한 일임을 설득하게 하라고 뒤에서 지시한 겁니다. 그러나 사울의 신하들이 다윗에게 왕의 사위 직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해도 다윗은 18절에 이어서 두 번째로 거절합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의 귀에 전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더이다 하니” (23-24)

 

그러니까 다윗은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자기도 하고 싶지만 가난하고 천한 자기가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되고 공주와 결혼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작전을 바꿉니다. 사울은 다시 신하들을 보내면서 왕이 다윗에게 원하는 것이 왕의 원수인 블레셋에게 보복하여 포피 백 개를 전리품으로 바치는 것임을 알려주게 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25)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 측에 돈을 주고 데려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난하고 천한 집 출신으로 어떻게 공주를 데려오며 많은 돈을 드릴 수 있겠느냐는 실제적인 고민을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자 왕은 아무 지참금이 필요없고 오직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포피를 베어오면 된다고, 그게 지참금이라고 말한 겁니다. 물론 사울의 속셈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가 그들의 손에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다면 내가 그것은 할 수 있겠다.’라고 하며 그것에 합의합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을 다윗에게 아뢰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결혼할 날이 차기 전에, 다윗이 일어나서 그의 부하들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26-27)

 

굉장히 야만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사울이 이런 요구를 하니까,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가는데 사울이 말한 것보다 두 배인 200명을 죽입니다. 그렇게 돌아오니까 사울은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니까 사울은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28-29)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좋게 여겨 평생 자신의 곁에 두고 아끼니라라고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대신 그는 다윗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는데, 두려우면 그때라도 다윗과 잘 지내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라고 끝납니다. 다윗이 사울의 대적이 된 게 아닙니다. 사울이 다윗을 평생 대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싸우러 나오면 그들이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 (30)

 

그러는 사이에 다윗은 계속해서 전공을 세웁니다. 그 동안 한 번도 우세한 위치에 있지 못했던 블레셋 상대의 싸움에서 다윗이 블레셋을 제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블레셋은 원래 지중해 크레타 섬 쪽에서 온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데, 지중해 해변 세 도시와 내륙의 두 도시의 연합체였습니다. 이스라엘보다 군사력이 대체로 우세했습니다. 철기문명도 청동기문명에 있던 이스라엘보다 블레셋이 먼저 가져왔습니다.

 

사울도 왕위에 있는 동안 계속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와서 처음으로 블레셋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세력이 역전된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다윗은 힘만 셌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게행하며 승리했다는 겁니다.

 

맹수와 싸우며 단련된 그의 머리와 몸이었으니까 그 작전이 얼마나 독특했겠습니까? 보통의 장군이 생각해내지 못한 작전을 짜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승리를 거두고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갔으며 그의 이름은 심히 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인 사울의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의 두려움은 다윗에 대한 증오로 바뀌고 그 증오는 자기를 파멸시키는 광기가 되어서 결국 다윗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사울 왕은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울은 요나단에게 배웠어야 합니다. 요나단은 핵심감정이 안정, 포용, 넉넉함 같은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그토록 사랑했습니다.

 

오래 전에 아주 감명 깊게 본 영화가 있는데 아카데미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영화는 <아마데우스>입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거기에 모차르트와 함께 살리에리(Antonio Salieri)라는 작곡가가 나오는데,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궁중악사였던 살리에리도 아주 훌륭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모차르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강한 질투의 감정이 올라오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이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만약 그가 모차르트를 질투하지만 않았더라도 사람들에게 여전히 존경받고 인기를 누리며 음악사에 귀한 업적을 남기는 인생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리에리 자신의 질투가 그의 인생을 망쳐버렸습니다.

 

사실 모차르트도 나중에 아주 뛰어난 베토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훌륭한 음악가라고 치켜세워 주었습니다. 슈만도 뛰어난 후배인 브람스를 만났을 때 누르거나 질투하지 않고, 굉장히 뛰어나다고 하며 키워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오히려 브람스가 슈만을 돌보아주게 됩니다.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살리에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을 키워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나중에 사울이 블레셋과 길보아 산에서 싸우다 죽게 되는데, 사실은 블레셋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이 죽기 오래 전에 그의 마음속에 있던 시기심과 질투가 그 자신을 이미 죽여버린 상태였습니다.

 

 

[나가는 말]

 

다윗은 억울하게 사울 왕의 질투를 받으며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 사울이 사는 날 동안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지혜롭고 신실하게 행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다윗의 지혜의 시라고 불리는 시편 37편에서 다윗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다윗의 심정을 생각하며 보십시오. 죽음의 위협 속에서 이런 시를 썼다는 것입니다.

 

“1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2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 3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4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5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6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 7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주님만을 애타게 찾아라.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마음 상해 하지 말아라. 8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 (37:1-8, 새번역)

 

이런 상황을 다 경험한 다윗이 이렇게 노래하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이어서 다윗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9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10 조금만 더 참아라. 악인은 멸망하고야 만다. 아무리 그 있던 자취를 찾아보아도 그는 이미 없을 것이다. 11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 (37:9-11, 새번역)

 

다윗은 악한 자들에게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다윗이 결론적으로 맨 끝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39 의인의 구원은 주님께로부터 오며, 재난을 받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40 주님이 그들을 도우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그들이 주님을 피난처로 삼았기에, 그들을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37:39-40, 새번역)

 

바로 이러한 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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