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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8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38 ✦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 9~19절)
1. 참된 하나 됨을 향하여
가끔 뉴스에 보면 이상한 집단이 같이 모여 살다가 끔찍한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비정상적인 사교 집단과 이단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집단생활입니다. 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폐쇄적 집단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둘째는 오직 교주만 바라보게 하는 교주에 대한 집중입니다. 방마다 교주의 사진을 걸어놓고, 심지어 몸 속에도 가지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사진을 꺼내어 교주의 사진을 보라고 합니다. 교주와 눈을 맞추라는 겁니다. 우리가 보면 이상한데 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집단생활과 교주만 바라보게 하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시야의 차단, 즉 다른 것은 못 보게 시야를 차단하는 것이고 또 생각을 중단시키는 겁니다. 자기 신도들로 하여금 교주와 교주의 말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교와 이단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획일화입니다. 오직 한 목소리, 한 생각, 한 목표, 한 방법, 한 가지 결과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목소리나 다른 생각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로 나아가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하나가 되는 것을 소수의 몇 사람만 결정하고 나아갑니다. 특히 교주가 다 결정하고 남들은 따라오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교에 빠진 사람들의 세계는 왜곡되고 축소될 수밖에 없고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것은 모르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서 그 영혼이 병들게 됩니다. 사교와 이단이 사회의 암적 요소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기업들도 보면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가 설정되면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 목소리, 한 생각으로 나아갑니다. 그 과정 중에 목표에서 벗어난 다른 목소리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아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그것도 일종의 획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업들을 사교나 이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는 그때 설정된 하나의 목표가 그 기업 직원들이 모두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과정 또는 토론 과정을 거쳐서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설정된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목소리와 하나의 생각은 그 기업 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지, 직원들의 사생활까지 파고들어서 가족들까지 그것으로 지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업의 사주가 독단적으로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자신의 한 가지 목소리와 한 가지 생각으로 직원들의 일뿐 아니라 가정까지 다 획일화시키려고 한다면, 집단자살극을 일으킨 사교일 뿐입니다. 실제로 이전에 그렇게 했던 기업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와 같은 전체주의를 사교와 같다고 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온 국민의 생각과 삶을 오직 한 가지 이데올로기로 획일화시키고 규격화시키기 때문에 사교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인류가 전쟁을 통해 피를 흘리면서까지 공산주의나 전체주의와 맞서 싸웠던 것은, 그 같은 획일주의가 인류를 파괴하는 무서운 독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획일화라는 이름으로 만든 장벽을 허물어뜨리게 하는 능력이고, 또 인간을 거기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요8: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만 획일화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역시 신앙의 획일화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획일화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가 되어 나아가는 것과 획일화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가 되어 나아가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토론과 이야기를 서로 해가면서 나와 다른 목소리, 나와 다른 생각을 수용해가고 서로 조정해가면서 하나로 만들어가는 것이지, 이것 아니면 안 되니까 따라오라고 무조건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수용할 때 영적 성숙이 시작됩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9-10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믿고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첫째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고, 둘째로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2. 제자들을 위한 세 가지 기도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신 유명한 기도입니다. 물론 바로 이 후에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마지막 기도인데, 특히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크게 세 가지 제목으로 기도하십니다.
1) 하나가 되게 하소서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1-13절)
이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본문을 보면 여러 표현들이 나오는데,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예수님에게 주셨다고 나옵니다(6). 또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지켰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하시고 또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것인 그들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11절에서 ‘우리’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독특한 인격이시면서도 완벽한 하나를 이루시는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성부, 성자, 성령님께서 동시에 역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드문 장면인데,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시고, 또 성부(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아들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다른 모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는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독특하시면서도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인간의 머리로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인데, 우리가 가장 쉽게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세 분이 각각 독특한 인격이신데 완벽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과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다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복음으로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립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다투고 싸워서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 것은 조금 전 말한 사교 집단이나 이단이나 전체주의와 같은 획일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획일화가 아니라 연합입니다. 영어로 Uniformity가 아니라 Unity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 됨은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걸 원하니까 너희들은 다 이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가 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 곧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도 하나가 되려면 똑같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이 한 분인데 여러 명인가? 무슨 똑같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건가?’라고 할 수 있는데, 각자 믿는 예수님이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가끔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엉뚱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은 저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만들어서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자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저런 하나님은 내가 안 믿겠다.’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방식으로 믿으라는 게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당연히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봐도 그렇고, 에베소서 4장을 봐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몸을 하나로 세우기 위해서는 각 지체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습니까? 이 많은 지체들이 각각 기능을 제대로 해주어야 몸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몸 안에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각 지체가 다 자기의 역할을 해주어야 몸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그 안에 있는 지체들이 건강하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여 하나 된 교회를 이루어야겠습니다.
사랑과 진리가 동시에 중요한데, 사랑이 없는 진리는 난폭해질 수 있고 또 독불장군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만이 옳다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은 있지만 진리가 없으면 그것은 위선이 되기 쉽습니다. 진리로 자라는 가운데 우리는 사랑으로 넓어져야 하고 하나가 되어야겠습니다.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교회의 모습들이 죽 나오는데, 주님의 제자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들을 보면 한 사람이 자기 혼자 고립된 교회를 이루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복수입니다. 최소한 두 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 두 명이 모이면 교회가 되는데, 물론 제도권 교회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교회는 예수님을 주와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 혼자 잘 믿겠다.’라고 하는 신앙생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만큼의 성숙한 인격과 거룩한 삶으로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앙 성장이라는 것은 함께 부대끼면서 되는 것인데, 잘하다가도 순간 어떤 사람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괜찮다가도 거리가 생길 수도 있고 불편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그래도 주님의 하나 됨을 지키자, 사랑을 해보자, 용서를 해보자 하며 그 안에서 애쓰면서 자신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지, 혼자 뚝 떨어져서 기도만 하고 말씀만 읽고 묵상한다고 신앙이 자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기도도 해야 되고 말씀도 묵상하고 공부도 해야 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신앙이 자라지 않고 그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한 것이 내 삶에 실천될 때 신앙이 성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듣기만 하면 안 되고, 듣고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벌써 올해가 한 달 남았습니다. 한 달만 있으면 2022년이 되는데, 코로나 상황도 물론 새로운 변이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작년 이맘때에 비하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교회 안에 보면 여러 모임들과 사역들이 있습니다. 새해에는 내가 뭔가 사역을 하나 맡아서 하자는 결단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목장 안에서도 사역이 있고, 교회에도 위원회라든지 찬양대, 찬양 팀, 그 외 여러 사역 그룹들이 있습니다. 교회 건물이 코로나 때문에 오랫동안 방치되는 가운데 청소가 필요한 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돌봄이 필요한 부분들이 관리 사역에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역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내가 함께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는 것이 싫어서, 서로 보는 게 싫어서, 그냥 주일예배만 살짝 참석했다가 집에 가서 일주일 동안 혼자 지내는 교인들이 요즘에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이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 되기 위해 애쓰며 나아가다 보면 우리 삶이 살아나게 됩니다.
2)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소서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5-16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가셨고 우리도 세상에 두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놓고 떠나시면서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보호, protect)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세상을 둘러보면 얼마나 악으로 가득합니까? 악한 세력이 건재하면서 끊임없는 유혹과 공격을 펼칩니다. 실제로 물리적인 악함, 즉 테러라든지 살인과 강도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믿는 사람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유혹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4절)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배와도 같습니다. 배는 물에 있지만 물에 속한 게 아닙니다. 물에 속해 버리면 배가 침몰하고 맙니다. 그런데 물 위에 떠 있습니다. 분명히 물 가운데 있지만 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가능합니다. 그래야 항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해 버리면 침몰한 배와 같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 때 힘차게 항해해 나가는 배처럼 우리도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세상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려고 공격합니다. 사탄의 공격이 진짜로 살인, 강도, 테러 같은 것으로 오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은 달콤한 유혹으로 옵니다. 이렇게 하면 나한테 더 좋을 것 같이 보이는 것들로 옵니다.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을 통해 유혹이 옵니다. 재미는 있는데 기쁨은 줄 수 없는 것, 재미는 있는데 몸이 상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건강한 신앙생활을 못하도록 온갖 함정을 파놓고 거기에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뭔가 깨끗하지 못한 것들의 유혹을 받을 때 ‘저거 재미있겠다. 해볼까?’ 하는 그 순간 지금 옆에서 함정을 파놓고 내가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탄을 연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게 됩니다.
단순히 죄를 짓도록 유혹 받는 것만 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살면서 당할 수 있는 환난도 역시 악입니다. 그래서 환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힘으로는 그러한 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저들을 악에서 건져 주십시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혹시 ‘나는 별로 기도도 안 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는데 별 일이 없네. 나는 평안하게 잘 지내고 있다.’라고 생각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이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이는 우리가 악한 세상의 엄청난 공격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
세 번째로, 제자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17-19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룩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이 거룩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가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아니야. 나는 어제도 죄 짓고 오늘 아침에도 죄를 짓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거룩한 사람이라는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가운데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으십니까?”라고 하면 “모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사실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거룩합니다. 나와 상관없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거룩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것,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구별되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그래서 그 거룩함을 지키며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우리가 악에 빠질 것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거룩함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성경을 주셨겠습니까? 장식하라고? 요즘 성경도 아주 컬러풀하게 나오는데, 여러 종류의 성경을 사서 책장에 꽂아놓고 멋지게 보이게 하려고 주셨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보전(보호)해주시기 위함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무슨 구경을 하고 관광을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정말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답게 말씀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보전할 책임과 의무를 스스로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며 남이 떠먹여주는 것만 받아먹는 수준이 아니라(처음에는 그렇지만), 점점 자기 스스로 말씀을 받아먹는 수준,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바르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으면, 온 천지가 다 흑암과 같기 때문에 발을 잘못 디뎌서 넘어지고 떨어질 수 있습니다.
둘째로, 나 자신만 거룩하게 보전되면 끝이 아니라, 다른 형제자매들 역시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보전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책임과 서로 섬기는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죽음 직전까지 제자들을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달라고 간구하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세상 사람들이 진리 앞에서 거룩하게 보전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자 의무임을 알고 실천해야 되겠습니다.
실제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통해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나만 잘된다고 잘되는 게 아닙니다. 먼저는 서로 사랑하고, 더 나아가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주십니다.
오늘 <생명의 삶> 간증도 해주셨지만, 8주차에 ‘성령 체험의 시간’을 합니다. 성령님에 대해서 배우고, 이론만 배우는 게 아니라 실제로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해보자는 취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매번 그 시간이 끝나고 집에 오면 아내가 오늘 별일 없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항상 ‘아~~~~무 일도 없었고, 조용하고 평안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그 다음 주에 와서 나누는 시간에 들어보니까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까 너무나 정확하게 자신의 상황을 기도해주었다고 말씀해주셨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때 자매님을 위해 뭘 기도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주신 생각대로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절대 제가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뭘 잘하고 제가 전하는 말씀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전율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렇게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겠다고 나아가는 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역사들을 우리 주님이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들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모두 감당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칭찬받는 주님의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