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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30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 ✦
“도망자가 된 위기의 다윗”
(사무엘상 21장 1~15절)
[들어가는 말]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의 현재 총장인 피터 샐로비(Peter Salovey) 교수는 심리학과 교수로서 사회심리학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전에 미국 범죄에 대해 연구하면서 범죄의 20% 가량이 질투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질투를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 어떤 농부가 농사를 잘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또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같은 동네의 그로서리 스토어가 잘된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는 남이 잘될 때 시기와 질투가 일어납니다. 학생끼리도 다른 학생이 더 공부를 잘할 때 시기와 질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질투의 불길이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 속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면 더욱 그 불꽃이 강렬해지고 사나워집니다. 부부관계, 애인관계, 친구관계에서 질투의 불꽃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불길에 화상을 입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데, 질투는 대부분 열등감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한 자신을 보면서 질투가 올라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런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혹시 누군가가 별 이유 없이 나 자신을 미워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별로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나를 미워하거나 견제합니다. 확실한 이유를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보는 눈이 이상하고 대하는 태도가 차갑습니다. 왜 그러는지 알지를 못하겠는데 나를 싫어합니다. 그러한 경우에 가장 큰 원인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그 마음은 미워하는 당사자만 알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울과 다윗의 관계였습니다. 사울은 열등감에서 시작된 마음이 시기와 질투로 발전하고 그것이 강한 미움이 되어 마침내 다윗을 죽이려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은 왕이자 장인인데 영문도 모른 채 험난한 도망자의 세월을 살아야만 하게 됩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국민적 영웅의 위치에서 떨어져, 이제는 장인인 왕이 지명수배를 내린 정치범으로서 집요한 추격을 받는 긴박하고도 고달픈 도피 생활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이 시련의 기간과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다윗은 오히려 정금 같은 신앙과 인격의 연단을 받게 됩니다. 다윗은 쫓기는 생활 가운데 오히려 평생 동지들을 만나게 되고, 나중에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기둥이 될 인재들을 얻게 됩니다. 이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왕 다윗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런 기간이 없이 급히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금방 타락하고 말았지만, 다윗은 아주 젊은 20대의 황금 같은 시기를 도망자로 지내며 하나님과 항상 동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며 정말 오묘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상황 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놉으로 도망하는 다윗 (1-9절)
1) 다윗이 놉의 성소로 피하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과, 이제는 살기 위해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설마 사울 왕이 자기를 정말 죽일까 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속으로는 ‘그래도 내 장인인데, 내가 뭘 잘못한 게 있어야 죽이지. 아마 기분이 좀 나빠서 그러신 거겠지. 내가 조금만 더 잘하면 풀어지실 거야.’라는 식으로 생각했을 텐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통해 확인받은 사실은 사울이 정말로 자기를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갑자기 이런 현실에 부딪치고 보니까 갈 데가 없습니다. 이제 왕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 억울하게 범죄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 이 엄청난 현실에 직면해서 다윗은 불안한 마음으로 일단 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일단 집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어디로 뜁니까? 거의 본능적으로 남쪽을 향해 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고향이 그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북쪽의 놉이라는 곳을 지나가게 됩니다.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1절)
당시 놉은 실로에 있던 성소가 블레셋에게 파괴당한 후 성소를 이곳으로 옮길 정도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실로에 있던 성소의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후손이었습니다. 사무엘을 키워주었지만 영적으로 어두웠던 엘리 제사장의 후손이 아히멜렉입니다. 다윗은 이때 기막히게 꼬인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다윗이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실수를 연발하는 것을 봅니다. 쫓겨 도망가다 보니까 판단력이 흐려지고 잘못된 결정들을 계속해서 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발견하는 중요한 사실은, 다윗이 사울에게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쫓기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간질히 붙들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처음 현실을 깨닫고 고향 베들레헴이 있는 남쪽을 향해 방향을 잡은 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향으로 가야겠다.’ 한 겁니다. 사람들은 대개 무슨 일을 당하면 고향을 향해 뜁니다. 그런데 우리 같이 이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만나면 어디로 뛰어야 합니까? 고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국이나 중국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고 있는데, 무슨 일을 당했다고 갑자기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갈 수 있는 고향이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당하면 교회로 뛰어야 합니다. 교회가 우리의 영적 고향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녀들 가운데 어릴 때 교회를 다니다 크면서 교회를 안 다니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그런데 외롭고 힘들고 쫓기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란 교회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교회가 없어졌다면, 또는 사람들이 다 바뀌어 버렸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회가 곧 구약시대의 성소는 아닙니다. 가끔 보면 교회 건물을 지을 때 ‘성전 건축’이라고 하거나 교회 건물들이 몇 개 있으면 각각 무슨 성전이라고 이름을 붙이는데,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고 성전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당은 성전이 아닙니다. 물론 ‘거룩한 건물’이라는 뜻으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성전이라고 하면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어디서나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이는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확실하게 임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일로 힘드십니까? 쫓기며 살고 계십니까? 코로나로 어렵거나 그 외에 뭔가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자리에서 ‘어떡하지?’ 하고 고민만 하지 마시고, ‘큰일 났다’ 하며 걱정만 하지 마시고 교회로 오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주일예배에 나오며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새벽에도 와서 기도하시고 토요새벽예배에도 오시기 바랍니다. 또 수요예배에도 오셔서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곳이 여기 있습니다. 있는데 왜 다른 데서 헤매고 있습니까?
어려움이 닥친 때야말로 주님을 찾을 때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멀고 날씨도 춥고 길도 미끄러우니 집에서 해야지. 나는 얼마든지 집에서 할 수 있어.’라고 하며 자신을 속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집에서도 할 수 있지만, 제 경험상 집에서 하려고 해도 교회에 와서 하는 정도의 뜨거움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래 전(2008년) 가스 폭발 사고가 났을 때 예배당을 쓸 수 없어서 평일에 집에서 기도하는데 교회에서만큼 잘 안 되지 않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또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온라인예배를 시작했고 지금도 병행하고 있지만, 집중이 쉽지 않습니다. 나와서 예배하면 예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있는데, 집에서 하려고 하면 산만하고 주변에 뭔가가 많기 때문에 집중이 잘 안 되는 것을 모두 경험하셨을 겁니다. 티브이가 아무리 커도 집 전체에 비하면 작기 때문에 집중이 쉽지 않습니다. 할 수는 있는데 우리가 인간이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은 마스크를 쓰고 하면 안전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모여서 할 수 있습니다.
2) 궁지에 몰리자 다윗이 거짓말을 하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성소 안으로 혼자 뛰어 들어온 다윗을 보고 놀라서 묻습니다. “동행자도 없이 어떻게 혼자 오셨습니까?” 평소에 적어도 천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던 사람이 혼자 왔으니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2절)
다윗은 자기가 사울 왕의 특명을 맡아서 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사울이 이런 명령을 한 적이 없으니 거짓말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본 다윗은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며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도망자가 되어 쫓기는 상황이 된 지금, 너무나 급한 나머지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도 거짓말을 자주 하지 않습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며 슬쩍 둘러대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그런 거짓말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복을 놓치는 때가 많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슬쩍 둘러대고 거짓말하는 것을 안 했으면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복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데, 거짓말 때문에 그런 복을 놓치면서 그것을 모릅니다.
자기는 순수한 거짓말이라고 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슬쩍 내뱉은 거짓말 때문에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도 보십시오. 실제로 다윗이 이렇게 한 것 때문에 나중에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여기서 바른대로 말하고 죽었어야 마땅한 것입니까? 살기 위해서 거짓말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는데도 위기에 닥치니까 거짓말을 했다. 그러니 우리도 위기에 닥치면 슬쩍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라고 하면 완전히 성경을 잘못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상황이 되면 다윗처럼 둘러대며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윗과 같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도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그냥 그랬다는 겁니다.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라도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도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다윗이 연약한 사람이었더라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더라도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고상한 인격을 지닌 사람이라도, 아무리 훌륭한 믿음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막상 일이 안 풀리고 빚에 쫓기고 사업에 쫓기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다른 사람이 쫓아오고 일에 치이고 현실에 쫓기는 삶을 살게 되면 대부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망가지고 무너집니다. 넉넉하던 사람도 그런 상황이 닥치면 독기만 남습니다. 그래서 망가지고 초라해집니다.
저번에 큐티 본문이 욥기여서 보았는데, 그래서 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엄청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가 한 말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욥이 믿음의 사람이라면서 어려움을 당했다고 어떻게 하나님께 반항하고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그렇게 믿음 없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 수준에서 보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몸까지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을 쏟아놓았다는 것이 대단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욥기를 잘 읽어야 합니다. 다윗의 경우도 그가 쓴 시편들을 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쫓기는 도망자가 되니까 거짓말을 하면서 자꾸 아래로 내려가고 있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극한 상황이 닥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어려운 건 어려운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어려움이 닥쳤는데 ‘나는 하나도 안 어려워.’라고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 상황이 될 때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와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그런 경우가 되면 하나님께 삐집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불평하게 됩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남을 해친 것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잘하며 예배를 잘 드리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일이 꼬이고 안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나? 너무하신 게 아닌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어떻게 이런 안 좋은 일들을 주시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믿었는데 일이 너무 안 풀리고 힘드니까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누가 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사실 기도하기도 싫어집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겁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실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서운하고 섭섭해서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도 싫고 예배에도 나가기 싫습니다. 그럴 때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붙들어주고 기도해줍니다. 그래서 교회가 공동체인 겁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서운해서 원망하고 불평한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본받을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우리보다 훨씬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아무리 상황이 힘들다고 해도 누가 나를 죽이려고 쫓아온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다윗보다 더 힘들지는 않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받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이 시대의 어떤 사람보다 더 고통스럽게 쫓기는 삶을 살았고, 거의 잡혀서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 넘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상황에도 다윗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망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순간적으로 넘어진 적은 있었지만, 완전히 파괴되거나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의 인격은 놀랍도록 성숙해졌고 그의 삶은 풍성해졌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대해 서운해 하고 삐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 모든 것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비결입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대적들로 인해 울부짖는 기도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습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딱 한 가지입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남은 모든 힘을 짜내서 그래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울부짖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가 잘하는 게 뭡니까? 부부끼리 있으면 배우자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며 쏟아놓습니다. 아니면 친한 사람에게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며 쏟아놓습니다. 그러나 해결이 안 됩니다. 사람에게 쏟아보아야 해결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것을 쏟아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욥이 위대하고 다윗이 위대한 겁니다. 그 내용을 보면 요즘 말로 찌질해 보이고 ‘무슨 저런 말을 하나?’ 할 내용들이 있지만, 그런 것을 누구에게 한 겁니까? 사람에게 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인 겁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가 쏟아놓아야 하는데, 사람에게 쏟아놓지 말고 하나님께 쏟아놓을 때 해결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을 때 솔직하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저 힘듭니다.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고 쏟아놓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께 나아가 쏟아놓기만 하면 하나님이 정말 치유해주십니다. 인도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쫓기는 삶의 고통 중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쫓기면서도 성숙해질 수 있고,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죽음의 위협 속에서 쫓기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데 가지 않고 놉 땅에 있는 성소,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적과 같은 일을 통해서 그의 믿음과 사명을 지켜주셨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를 얻다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3-4절)
다윗은 놀라며 물어보는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보통 떡은 없지만 거룩한 떡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떡’은 진설병인데, 이것은 성소에 진열해 놓은 12개의 빵을 말합니다.
성소 안에는 등대와 분향단과 상이 있고, 그 상 위에 매 안식일마다 이스라엘 12지파의 숫자대로 빵을 올려놓았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떡(진설병)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매주 안식일마다 교체하는데, 교체하고 나온 떡을 제사장들이 먹는 것입니다.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5-6절)
이게 바로 그 말입니다. 안식일에 따뜻한 빵을 올릴 때 일주일 동안 있었던 빵을 내놓아 제사장들이 먹는 겁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은 또 거짓말을 한 겁니다. 아히멜렉은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는데, 사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천 년쯤 지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다가 손으로 밀을 비벼 먹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했다.’ 하고 비방하는 것을 들으시고 이 사건을 인용하며 설명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얼마 전 큐티 본문이었던 누가복음 6장에 그것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눅 6:3-5)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율법이 생명보다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이 율법의 원래 뜻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대로 실천한 것뿐입니다. 율법의 핵심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데도 못 본 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먼저 살려내는 것이 율법의 원래 정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오른손이 마른 사람을 고치셨고, 그 외에도 수많은 병자들을 일부러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다른 날 고치실 수도 있었는데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내팽개치고 문자적, 기계적으로 율법만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이 빵을 먹으면서 다윗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야, 배고픈데 이게 웬 떡이냐? 잘됐다, 실컷 먹고 보자.’라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그 빵을 먹으며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방금 자기가 거짓말을 했는데도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 쫓겨 다니면서 길에서 수없이 하나님을 향해 서운함을 느끼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억울합니다. 제가 왜 이래야 합니까?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죄를 졌습니까?’ 그런데 이 빵을 먹게 되면서 ‘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또 하나의 요청을 합니다.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제사장이 이르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하더라” (7-9절)
마침 사울의 목자장인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이 거기 있어서 이것을 다 지켜봅니다. 나중에 이것이 화근이 됩니다.
어쨌든 여기가 성소인데, 성소에서 무기를 찾고 있다니 이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입니다. 그런데도 아히멜렉의 대답은 놀랍게도 칼 한 자루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보통 칼이 아니라 이전에 다윗이 엘라 골짜기에서 싸워 죽인 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큰 강력한 칼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역사’라고 합니다. 아니, 이 골리앗의 칼이 바로 이때 왜 여기 성소에 와 있습니까? 어떻게 바로 이때 여기 와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취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잘됐다. 그렇잖아도 내가 울화통이 치밀었는데 이걸로 나가서 한판 붙어보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또 다시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이 성소에 어떻게 칼이, 그것도 골리앗의 칼이 있습니까?
그날 그 무시무시한 거인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아가, 이렇게 대단한 무기를 가지고 나오던 그 적군의 용맹한 장수를 물맷돌 하나로 간단히 제압했던 그 순간, 정말 하나님이 역사해주셔서 승리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윗은 그때 그 승리가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 손에 바로 그 골리앗의 칼을 쥐어 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가 너를 버린 게 아니다.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있다.’라는 징표가 되는 겁니다. ‘네가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처럼 나는 너와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 칼을 통해 받았습니다.
우리도 쫓기는 삶 가운데 이전에 자신에게 의미 있던 물건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연히 그것을 보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때 함께 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함께 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 어떤 물건일 수도 있고,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떤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다시 보게 될 때 그냥 넘기지 말고, ‘하나님이 그때 나와 함께 해주셨던 것처럼 지금도 함께 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주시는 사인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2. 블레셋의 가드로 도망하는 다윗 (10-15절)
1) 가드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나다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0절)
갑자기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갑니다. 처음부터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이면서 무대에 등장했던 다윗이 도망한 곳이 하필 블레셋이라니, 이건 정말 아이러니입니다. 그가 도망을 간 곳은 가드라는 성읍인데 이곳이 어떤 곳입니까? 가드는 다름 아닌 골리앗의 고향입니다(삼상 17:4).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성 출신의 엄청난 장수였던 골리앗, 그 성의 자랑이었던 골리앗을 죽인 원수 다윗이 바로 그 골리앗에게서 빼앗은 칼을 들고 자기들에게 나타났을 때, 가드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누가 악하냐 선하냐를 떠나서, 자기들의 영웅을 죽인 원수가 영웅의 칼을 들고 나타났을 때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났을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도대체 왜 그리로 간 겁니까? 그 정도로 다윗이 다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의 군대가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해 오는 이때에 사울의 군대가 더 이상 추격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차라리 대적의 땅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할 만큼 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1절)
그렇게 간신히 건너간 블레셋 땅인데, 가드 왕 아기스 앞에 서는 순간 다윗은 ‘아, 이게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당시는 티브이나 신문이 없을 때였으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어도 다윗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을 보고 바로 알아봅니다.
게다가 당시 이스라엘의 인기 유행가였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노래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천다만>(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는 (코리아 케이팝(K-Pop)이 아니라) 이스라엘 아이팝(I-Pop) 최고 인기곡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댄스곡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춤추며 불렀다고 말합니다. 역시 음악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이때 다윗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아니, 그 땅의 왕이 무슨 자기입니까? 사울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그 땅의 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피해 온 것인데, 아기스의 신하들은 자기를 가리켜 ‘그 땅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 사람들도 다윗이 실질적인 왕이고 사울보다 낫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사울의 위협을 피해서 왔는데 또 다른 죽음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2) 아기스 왕 앞에서 미친 척하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3절)
다윗이 갑자기 미친 사람의 연기를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그 당시 미신에 의하면 미친 사람은 재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친 사람을 죽이면 그 미친병이 자기에게 옮는다는 말까지 고대 사람들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미친 척하면 그들이 최소한 자기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친 사람은 당연히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미친 척하면 경멸은 당하지만 생명을 부지하고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두려워하면 죽여 없애겠지만, 미쳤다고 경멸하면 죽일 이유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른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고, 다윗이 이렇게 훌륭한 미친 사람의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훈련이 되었으며 잘 보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울 왕의 미친 모습을 옆에서 많이 지켜보았기 때문에 현장 교육을 너무 잘 받아서 실감나게 미친 사람의 연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 말도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교육은 실제로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들어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죽음의 위기를 모면합니다.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14-15절)
정말 다윗은 미친 사람의 연기를 정말 잘한 겁니다. 웬만하면 다 눈치 채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부정 탄다고(?) 빨리 쫓아내라고 왕이 명령한 겁니다. 다행히 그렇게 생명은 건졌지만, 다윗이 왜 이렇게까지 초라하고 비참한 지경으로 내려가야만 했습니까?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0절)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2절)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사울을 두려워해서 판단력이 흐려져 블레셋으로 들어갔고, 아기스 앞에 가서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이렇게 된 겁니다. 그 앞에서 미친 척까지 해야 하는 비참한 형편이 되었습니다. 잠언에 여기에 딱 맞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 (잠언 29:25, 새번역)
다윗은 그 순간 사람을 두려워했더니 올무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을 의지했더니 안전해졌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우리도 엉뚱한 결정을 하게 되고, 또 엉뚱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실수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잠시 실수할 때가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시편 56편을 보면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 인에게 잡힌 때에”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거기서 다윗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1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짓밟습니다. 온종일 나를 공격하며 억누릅니다. 2 나를 비난하는 원수들이 온종일 나를 짓밟고 거칠게 나를 공격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3 두려움이 온통 나를 휩싸는 날에도, 나는 오히려 주님을 의지합니다. 4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니,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 (시 56:1-4, 새번역)
속으로 이렇게 기도한 겁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9 내가 주님을 부르면, 원수들이 뒷걸음쳐 물러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심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10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는 주님의 말씀만을 찬양합니다. 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니, 내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 12 하나님, 내가 주님께 서원한 그대로, 주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13 주님께서 내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가 생명의 빛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닐 수 있게, 내 발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56: 9-13, 새번역)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런 기도를 다윗이 하나님께 드렸던 겁니다. 또 다른 시인 시편 34편도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4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내셨다. 5 주님을 우러러보아라. 네 얼굴에 기쁨이 넘치고 너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6 이 비천한 몸도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들으시고, 온갖 재난에서 구원해 주셨다. 7 주님의 천사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져 주신다.” (시 34:14-7, 새번역)
56편에서 도와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구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해주신 다음에, 쫓겨난 다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계속 이렇게 노래합니다.
“17 의인이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시고, 그 모든 재난에서 반드시 건져 주신다. 18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 19 의로운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지만,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고난에서 그를 건져 주신다. 20 뼈마디 하나하나 모두 지켜 주시니, 어느 것 하나도 부러지지 않는다. 21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끝내 죽음을 맞고, 의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22 주님은 주님의 종들의 목숨을 건져 주시니, 그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시편 34:17-22, 새번역)
구원을 받은 다음에 또 이런 노래를 합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기도하고, 또 하나님이 구해주신 상황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무리 실수하고 잘못된 결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떤 깨달음을 이렇게 주셨을 때 그것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 실수를 합니다. 죄도 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돌이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신앙인이냐 아니냐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도 쫓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쫓기는 이유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실수하고 잘못했기 때문에 쫓기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허영과 사치와 자기 과시와 상처와 잘못된 욕망과 더러운 죄 때문에 쫓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쫓기고 있다면 해결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빨리 회개하고 정리하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정리를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빨리 회개하고 정리하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당할 것은 당하고,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것은 빨리 고백하는 겁니다.
또 한 경우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상황 때문에 쫓기는 경우입니다. 다윗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럴 때 생각할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뭔가 나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해서 이렇게 훈련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런 상황이라면 그때 두 가지를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첫째는, 절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쫓기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예배와 기도와 말씀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더욱더 주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잊어버리지 않고 붙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쁘기 때문에 ‘나는 네가 이것을 하면 좋겠다.’ 하고 주신 사명을 잊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일단 급한 것부터 하고 나중에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나중에 하려고 하다 보면 결국 평생 하지 못하고 끝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쫓기는 시간, 바쁜 시간에 조금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되는 겁니다. 남들이 볼 때는 우스운 것 같고 ‘저 바쁜 사람이 뭘 하나?’ 할 때도 말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 뭘 하나?’ 할 때도 교회 사역으로 하나라도 더 봉사하며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도 다윗과 같이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해갈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