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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4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37 ✦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요한복음 17장 1~8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한국의 어느 병원에서 새로운 항암 유전자 치료법 임상 실험을 위한 대상자를 공개 모집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올까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2,000명의 지원자들이 몰려서 병원 측이 오히려 곤란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말기 암환자들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인생이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새로운 치료법의 효과가 그때까지 의학적으로 판명되지 않았는데, 그런 상태에서 실험을 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고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치료법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 부담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치료법의 실험 대상자가 되겠다고 하며 죽음을 앞둔 말기 암환자 2천 명이 몰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 어떻게든 더 살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죽기 싫어한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죽을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도 평안하게 살아갑니다. 여러분, 미래를 알기 원하십니까? 그러나 내가 몇 년 몇 월 며칠에 죽는지 알게 되면 마음이 착잡해지고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곧 죽을 것을 아는 사람은 두려움 가운데 살게 됩니다. 알려진 사람들 중 아주 소수가 담담하고 차분하게 인생을 정리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죽음을 알면 벌벌 떨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2천 명의 암환자들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새로운 치료법의 임상 실험 대상자가 되겠다고 하며 지원한 것입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분들의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에 누가 죽기를 기뻐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둔 상태에서, 누구보다 자신의 죽음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보통 죽음이 아니라 가장 끔찍한 사형 방법인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찢겨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목숨을 건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 끔찍한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시점인데,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 죽음을 피할 방법이 없는지 찾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살기 위해서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가 바로 이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긴박한 순간에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십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는 죽음이 몇 시간 안 남았을 때입니다. 이때가 목요일 저녁인데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시니까, 체포도 몇 시간 안 남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도 몇 시간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제자들을 위해 해주십니다.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 사셨던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갖고 계셨는데, 그런 예수님은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하시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그 처참한 죽음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가실 수 있었습니까? 그 해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전체가 21장으로 되어 있는데, 13장부터 17장까지가 사실은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소위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곳에서 일어났는데, 지난 번 안식월 때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서 가보았는데 꽤 넓은 곳이었습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사건도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죽음을 앞두고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그들의 발을 씻겨주신 다음 고별 설교를 하셨는데, 그 내용이 13장에서 16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이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드린 기도라고 해서, 이 기도를 소위 ‘대제사장의 기도’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대제사장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둘째가 제자들을 위한 기도, 셋째가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은 그 첫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영광스러운 삶이다 (1, 4-5절)
예수님은 지금 목요일 밤을 지내고 계십니다. 마지막 고난주간의 목요일 밤인데, 이제 불과 몇 시간 후면 참혹한 채찍질과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그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맞이하시게 됩니다. 자신의 죽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이때,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절)
16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신 다음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십니다. 처참한 십자가 죽음을 바로 앞둔 이 최후의 순간,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러러 보십니다. 하나님께 당연히 기도를 드리시기 위함입니다.
‘때가 이르렀다’고 하시는 것은 죽음의 시간이 바로 앞에 다가왔다는 뜻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 예수님은 무엇을 구하십니까? 고통 없이 죽기를 원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십니다. 죽음을 앞두고 ‘나를 좀 보살펴주십시오.’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계십니다.
1절을 잘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만 구한 것이 아니라 아들, 즉 자신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4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이 땅에서 이루라고 하신 일을 이루심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회피하여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산시켰다면, 아무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이 될 수가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이루어내는 것,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문답’의 가장 첫 질문이 “사람의 목적은 무엇인가?”입니다. 그 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만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도 없지만, 그러한 사람의 삶은 세상에서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엄청난 어두움 속에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실패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 무엇을 이루기를 원하실까를 생각하면서, 내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영광’이라는 사람 이름도 많고 교회 이름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됩니까? 오래 전에는 유명한 분들이 소위 ‘고지론’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 사회에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섬기는 사람이 되자고 했습니다. 그 자체가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성공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크리스천들 중 사회에서 높이 올라간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대통령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높이 올라갔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 후에 안 좋은 일들도 많이 생기고 감옥에도 갔는데, 그렇다면 그런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린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높이 올라가고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고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올라가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아무리 낮은 자리라도 말씀대로 살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는 것이고, 아무리 높은 자리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 있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입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내가 내 배우자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뭔가? 할 일이 있지만 계속 미루거나 피하고 있는 일이 없는가?’ 이런 것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부모님을 위해서도 내가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안 하는 겁니다. 자녀에게도 내가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는 겁니다. 혹시 내가 자녀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에게 행해야 할 것은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살아야 하니까 그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의 작은 일들입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보지만 그냥 손해를 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 오히려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일터에서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래 전 어떤 교우가 자랑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기술이 너무 좋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에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틀어놓고 보다가 숨기는 재주가 있다. 누가 와서 보면 일하는 척하고 안 보면 비디오를 본다.’ 그러나 이런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생명의 삶> 공부 때도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 되지, 일할 시간에 <생명의 삶> 숙제를 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라도 일하는 시간에 하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쉬는 시간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다른 것을 해야 하니까 일할 시간에 하는 게 아닙니까? 우리가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 즉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에서 감당해야 할 일이 뭔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새 계명’이라고 하시며 몇 번을 이야기하셨습니까? 평소에 내가 별로 안 좋아하고 불편해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보았을 때 얼굴을 싹 돌리고 멀리 앉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힘들어도 인사하고 악수하고 그래도 잘해보려고 애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모릅니까?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무엇입니까? 알면서도 안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회피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 속에서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면 양심이 무디어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괴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삶인데, 한마디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 좋을 것 같은데 사실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삶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자기도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구하며 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하며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교회에 투자하지 말고 다 나를 위해서 쓰면 좋지 않은가?’라고 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불행해집니다.
그 아주 좋은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서 제사장들에게 넘겼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고서 너무 행복했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까 너무 행복했습니까? 반대입니다. 너무 괴로워서 돈을 던져버리고 가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지 않았습니까? 너무 불행해졌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 중 으뜸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관계입니다. 즉,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겁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더욱이 이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워하지는 않아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갑니다. 사랑을 하라고 하셨는데 하지 않는 것도 그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적당히 살아가니까 괜찮은 줄 생각하는데, 괜찮은 게 아닙니다. 사랑을 해야만 합니다.
관계가 불편해지고 깨지면 어떻습니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 확 오면 괴롭고 힘들지만 그래도 견디어나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깨지거나 불편해지면 내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괴롭습니다. 불행해집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은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괜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를 얽매거나 옥죄려고 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은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지 않으며 살면 행복해집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고, 그렇게 살 때 우리도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왜 예수님은 자신도 영화롭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입니까?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5절)
이것은 단순히 자기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 보겠다는 욕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먼저 영화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영화롭게 된다는 것, 즉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은 놀랍게도 그 끔찍하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그 참혹한 죽음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영화롭게 된다고 표현하십니다. 이것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다 이루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게 나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가볍게 세 번 하신 게 아니라, 목숨을 건 기도를 세 번 하신 것입니다. 그 결론은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주십시오.’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대제사장의 기도’는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시고 또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또 기도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다 이루는 것이 되며, 그것이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이 땅에서 살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삶의 목적을 주셨습니다. 물론 사명(삶의 목적)은 때마다 바뀌기도 합니다. 지금은 이것을 하라고 주셨다가 잘하면 다른 것을 주시고, 그것을 또 잘하면 또 다른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크리스천들조차도 주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Savior)로 믿는 것이고, 동시에 ‘주인’(Lord)으로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자기가 구원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다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지도 못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길이 환히 열려 있는데 왜 하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 자신에게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주신 것은 무엇인가?’ 사명이 뭔지 잘 모르거나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있습니다. 물론 일반 사람들도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사는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특히 그렇습니다.
매일의 일상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불러서 쓰십니다. 그 사명을 언제 깨달을지는 모르지만, 특별한 사명을 주실 때까지 그냥 매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됩니다. 큰일만 따라가고 높아지고 성공하는 것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작은 일부터 충성하는 것이 구체적인 사명을 받는 방법이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항상 detail 이 아니고 direction입니다. 가끔 보면 예언기도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강한 예언의 은사를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저번에 오셨던 목자님도 바로 그런 은사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언은 우리가 마치 점치듯이 ‘다음 주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달 후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1년 후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방향으로 가라.’ 하시며 Direction을 주시지, ‘너는 몇 월 며칠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해야만 귀인을 만난다.’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점쟁이처럼 접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Direction을 주십니다. ‘이 방향이 옳다. 이 방향으로 가라.’ 그러면 그 Detail은 자기가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기 싫은데 억지로 사명을 주시며 강요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함이 넘치는 그런 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게으르게 살거나 주님의 뜻이 분명한데도 거부하면, 평생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불행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매일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며 살 때 영광스러운 삶이 되지, 내 마음대로 살면 주님의 사명을 따라 살 수도 없고 영광스럽게 될 수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도하며 말씀을 붙드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그러면 이끌어주시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드러나는 삶이 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2.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2-3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2절)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eternal life)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면 ‘영원한 생명’ 즉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저 죽지 않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서도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한 지옥의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그런 것은 영생이 아니라 영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9)
그런데 ‘선한 일’이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나 홈리스를 조금 도와주는 착한 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악한 일’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할 때 항상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산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영원히 삽니다. 어디서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3절)
영원한 생명의 삶은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이 말씀을 왜 자신의 죽음을 몇 시간 앞둔 이 시점에서 하고 계십니까?
사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내용인데, 바로 앞에 다가온 죽음을 바라보시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 가운데 들어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가 영생이 뭔지를 모르셔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시는 겁니까?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아들이 아버지를 교육하려는 것입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시고 참되신 신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 때 영생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길을 우리가 스스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지옥에 가고 싶습니까?’라고 하면 지옥에 가고 싶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지옥에 가고 싶지 않고 영생을 얻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없으니까 ‘저는 천국은 잘 모르겠지만 지옥에는 안 갈 것 같습니다.’라고 대충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영생을 얻기를 원하고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그리로 가는 길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것은 공부해서 머리로 아는 지식 정도가 아니라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안다’라는 말에는 ‘동침하다’라는 뜻이 있고, 부부가 서로를 아는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서로 뜻이 통합니다.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요일 5:11-12, 새번역)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생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 즉 그 아들을 알고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은 있지만 영생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칠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실력이 있으면 붙고 실력이 없으면 떨어진다.’ 이 말은 무엇을 강조하는 말입니까?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가 어디에 달렸다는 말입니까? 실력에 달렸다는 말인 동시에, 또 실력 딱 한 가지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실력만 있으면 혹시 돈이 없고 집안에 빽이 없어도 상관없고, 반대로 실력이 없으면 아무리 빽이 좋고 돈이 많아도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력 한 가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결국 영원한 생명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는 아들을 모셨느냐 안 모셨느냐에 달려 있고, 동시에 아들을 모셨느냐 안 모셨느냐 그 딱 한 가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모시지 않았으면 아무리 교회봉사를 많이 하고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영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들을 모시고 있으면 그런 부분에 조금 떨어지더라도 영생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영생을 받게 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영생이고, 그것을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겁니다.
3.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다 (6-8절)
자신을 위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6-19절에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시는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마저도 사실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기에 앞서서 먼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4)라는 기도를 6~8절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여기 6~8절의 내용은 일종의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역 보고입니다. ‘제가 이 땅에서 이렇게 사역을 했습니다.’ 하고 보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역 보고를 보면, 예수님이 하신 일과 그로 인해 제자들에게 나타난 결과가 나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6절)
이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한마디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낸 사역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표적, 그리고 인격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말씀을 하실 때나 표적을 행하실 때 자신의 힘으로 한 것처럼 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만 전한다고 하심으로써, 전하고 행하는 자기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더 우선시하셨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는 말을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역을 행하신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결과가 바로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나이다.’가 아니라 ‘지켰나이다.’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아지고 숫자적으로 큰 교회가 되는 것은 당연히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교인 수가 몇 명이든지 상관없이 성도들이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
예수님은 산상설교(마태복음 7장)에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다.’(마 7:24)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다.’(마 7:26)라고 하셨습니다. 둘 다 듣는데,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네 가지 토양의 비유’ 또는 ‘씨앗의 비유’(마태복음 13장)에서 네 가지 토양이 사람들에 대한 비유인데, 길가, 돌밭, 가시덤불, 옥토(좋은 땅)와 같이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네 가지 땅에 모두 말씀의 씨앗이 떨어졌습니다. 안 받은 게 아닙니다.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다 달랐습니다. 들었지만 행하지 않음으로 열매가 없는 겁니다.
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이것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믿었으면 그게 행동으로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믿었는데 어떻게 행동이 안 나오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강조한 책이 야고보서입니다. 로마서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은혜로 의롭게 된다.’라는 쪽을 강조했고, 야고보서는 ‘믿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 믿었으면 행동으로 나와야 한다.’라는 것을 강조한 책입니다. 둘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게 있습니다. 미국 이민교회는 한국교회에 비해 10년 정도 뒤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보다 5년 정도 뒤쳐졌다고 하는데, 정작 미국에 사는 미주 한인교회는 한국보다 오히려 10년 뒤쳐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쇠퇴하는 것도 우리는 10년 뒤쳐져서 그렇게 급격히 쇠퇴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정말 급격히 쇠퇴하고 있습니다. 한 해에 교인 수가 몇 십만 명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미국장로교를 비롯해서 미국의 주류 교단들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가장 핵심 원인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닙니다. 엄청 큰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계 10대 교회에 몇 교회가 들어가고, 세계 10대 장로교회에 몇 개가 들어갑니다. 한 교회 교인 수가 몇 십만 명인 데도 있고, 몇 만 명씩 되는 데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쇠퇴합니까? 왜 사회가 안 변합니까? 말씀을 듣는 데는 굉장히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프로그램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없는 건 아닙니다. 순수하게 잘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 수가 적습니다. 대다수는 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정직하게 삽시다’라는 설교를 듣고 나가서 바로 거짓말하고 사기를 칩니다. 그러니까 변화가 되지 않고 쇠퇴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이후로 교회에 열심히 나오시던 교인 분들 중 무려 40명 정도가 이사를 가서 이곳을 떠나셨고 그 사이 새로 오신 분들은 아주 적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교인 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몇 명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인이 몇 만 명 있고 미어터져도 거기에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제자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7절)
이것은 예수님의 두 번째 사역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비난하고 거부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였지만 그것이 불편해서 거부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로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삶 공부나 설교 때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겁니다. 혹시 설교가 형편없다면 그것은 제가 부족한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어떤 때는 ‘설교를 왜 이렇게 길게 하지?’라고 느끼실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참 감사한(?) 것은 주위에 저보다 더 길게 설교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길어집니까? 성경에 나온 것을 이야기하다 보니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물론 15분, 20분으로 할 수 있습니다. 3대지 설교로 ‘1번, 2번, 3번’ 하면서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과 상관없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절기 때는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를 설명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다 보니 길어지게 됩니다.
또 어떤 때는 하다 보면 이것은 듣기 힘들겠다고 느끼거나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은혜와 긍휼의 말씀이 들려져야 하기 때문에, 공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8절)
이것은 예수님의 세 번째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만 전하신 결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믿었습니다. 다만 그분이 어떤 메시아이신지 아직 충분히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잡히셨을 때 다 도망갑니다. 아직 십자가의 예수님을 알고 믿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만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하고, 다 흩어져 제 곳으로 갈 제자들인 줄 알고 계셨지만, 그래도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아는 사람으로, 그래서 영생의 사람으로 여겨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긍휼입니다. 이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도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제자들의 믿음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직 이 순간에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있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간주하는 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위임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고, 자신에게 부여된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용하셨습니다. 자기 뜻대로 하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신 영혼들이 영생을 얻게 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가는 말]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힘써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야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이 땅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얼마나 힘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죽음 이후를 결코 책임져주지 못하는 것들, 즉 돈이나 명예나 성공 등 안 중요한 것도 아니고 삶에 필요한 것들이지만, 거기에만 주저함 없이 자신의 인생을 걸면서,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즉 편안하든지 어렵든지,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상황과 관계없이 내 소원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될 때, 우리의 모든 삶은 그 소원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바로 그 목적과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영광스러운 삶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됩니다.
그런데 영광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인답게 살 때, 우리 각자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의 인생도 최고의 인생이 됩니다. 우리 교회가 영혼 구원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일을 신실하게 감당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교회가 됩니다.
우리 각자가 바로 그런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우리 교회가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고귀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