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aNOsPwghDr4?t=2470
2021년 12월 12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40 ✦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한복음 21장 1~14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다시 가보고 싶고 나에게 의미가 있는 추억의 장소가 있으십니까? 저마다 소중한 물건과 장소가 있습니다. 제가 6년 전 안식월 때 한국을 오랜만에 방문했는데, 그때 생각하기를 ‘이번에는 짧게 있는 게 아니라 한 달 정도 있으니까 오래 전 내가 자란 곳을 가보고 싶다.’ 하고 당시 12살이었던 아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날을 잡고 같이 갔습니다.
이전에 제가 뛰어놀던 아파트 촌에서 당시는 주차장에 차가 하나도 없어서 게임을 하고 놀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오징어게임, 또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많이 하고 놀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건물 사이에서 축구도 하고 발야구도 했습니다. 그곳을 다시 방문 갔을 때 한 창문을 가리키며 ‘바로 저 창문이 아빠가 발야구 하며 뻥 차서 깬 유리다.’라고 했더니 그게 뭐가 웃긴지 우리 아이가 굉장히 웃었습니다. 아빠가 유리창을 깼다는 사실에 굉장히 기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자기만 말썽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걸 생각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추억의 장소가 있으실 겁니다. ‘내가 한국에 가면 꼭 거기 가보아야지.’라고 하는 추억의 장소, 거기가 어디입니까?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끝납니다(1, 14). 예수님은 이를 통해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 행하신 두 가지 일, 즉 고기를 잡게 하신 것과 같이 식사하신 것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또 오늘 우리에게 ‘부활을 산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두 가지 가운데 고기를 잡게 하신 일은 ‘표적’이고, 같이 식사하신 일은 ‘성찬식’을 떠올리게 하는 행동입니다. ‘고기 잡는 것’은 단지 먹고사는 생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일, 즉 복음을 전해 제자를 만드는 일을 가리키고, 또 ‘식사를 함께 나누신 모습’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리키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역과 교제는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하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까? 교회는 함께 모여서 주님이 맡기신 사역 특히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또한 서로 교제하며 사랑을 나눕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사역 없는 교제나 교제 없는 사역은 모두 온전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잘할 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 더하여 함께 예배하고 말씀으로 훈련받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제자들과 갈릴리에서 만났는가? 그곳이 그들에게 추억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1. 물고기 153마리의 기적 (1-6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1절)
‘그 후에'라는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던 이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 전처럼 제자들과 늘 같이 다니셨던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후에는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또 어디로인가로 사라지셨다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제자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8; 마 28:7)라고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갈릴리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미 두 번, 즉 부활하신 저녁과 일주일 후에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예수님이 또 어디로 가셨는지, 어디에 계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 ‘갈릴리로 가면 나를 볼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서 그리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호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베랴’(Tiberias)라고 쓴 것은 아주 독특한데, 요한이 여기서 특별히 쓰는 것입니다. ‘디베랴’는 사람의 이름을 딴 이름입니다. 그 당시 갈릴리를 다스리던 사람이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헤롯대왕의 아들 중 하나)인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로마의 새로운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도시를 지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디베랴(Tiberias)입니다.
안식월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 디베리아스에 갔었는데, 꽤 크고 관광도시로서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도시를 그가 만들어 바쳤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라고도 합니다.
이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자기 직장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세리였던 마태(레위)도 역시 자기 직장을 다 내려놓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의 삶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부활을 일으키셨지만 제자들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오히려 실업자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스승 예수님이 사라지셨고 어디 가셨는지 알지 못하며 이전처럼 같이 다니는 게 아니니까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 뵙고 갈릴리로 왔지만, 갈릴리에서 그들을 반기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갈릴리에 와 보니까 문제가 있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이전에는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함께 다니며 헌금하는 사람들 특히 여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었는데, 지금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생긴 겁니다. 생계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는데 누가 자기들의 먹을 것을 책임져주겠습니까?
이미 그들은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 직업을 버렸습니다.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자기들과 계속 안 계시니까 자기들끼리 생계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옛날처럼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호수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것이 꼭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것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많이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줄 믿으라.”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주실 것이다.”(마 6:33)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면 먹고사는 것은 책임져주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을 믿으며 지금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간증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간증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만 붙들고 나아가면 주님이 책임져주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병에 걸렸을 때 병이 낫도록 우리는 함께 기도합니다. 또 우리 부모님, 우리 자녀, 나 자신, 내 가족이 병에 걸렸을 때 나을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직장이나 사업의 어려움이 생겼을 때 해결되도록 기도하고 또 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나아갑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인 직장이나 사업체나 학교나 병원에 가보면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 겁니다. 해결되지 않고 똑같습니다. 그럼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다 책임져주겠다고 하셨지만, 기도한 것은 기도한 것이고 현실적인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몸부림을 쳐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히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믿는데, 그 약속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결국은 이 간격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 속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살아보기 위해, 제자들이 고기를 잡은 것처럼 우리도 노력을 기울여 봅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2절)
여기 보면 7명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로 갔는데, 베드로가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옵니다. 21장은 베드로에게 제2의 회심이라고 불릴 만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다음 번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시는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때를 생각나게 하심으로써 베드로로 하여금 진정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처음 베드로가 등장했을 때 ‘시몬’이라고 나오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1장에서 ‘게바’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게바가 곧 베드로입니다. 게바는 아람어이고 베드로는 헬라어입니다. 똑같이 ‘반석(rock)’이라는 뜻입니다. 그 ‘시몬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여기 다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제자가 도마인데, ‘디두모’라는 말은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가장 위대한 고백을 한 제자입니다. 20장에서 예수님 부활 후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하며 예수님을 향해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그의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했던 의심 많은 사람입니다.
그 다음은 나다나엘인데, 그도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1:49)이라고 고백했던 제자입니다. 도마의 고백처럼 아주 탁월하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이해하고 나온 고백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 바로 그 직전에 빌립이 그분을 만났다고 하니까 누구냐고 묻고 나사렛 예수라고 했더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라고 하며 의심했던 제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예수님을 향하여 위대한 고백을 했던 사람들인 동시에 의심과 불신을 보였던 제자들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여기서 이 세 제자들의 이름을 먼저 기록함으로써, 그들처럼 예수님에 대해 의심을 가졌거나 심지어 믿음에 실패했던 사람,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 믿음을 떠났던 사람이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묵상하며 그들처럼 믿음을 회복하라고 여기서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보통 세 번 정도 기회를 줍니다. 누가 내게 잘못하면 ‘다음에 또 그러면 안 돼.’라고 했다가 또 잘못하면 ‘세 번까지는 봐준다. 삼 세 번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번, 세 번, 네 번, 열 번... 끝이 없으십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에 실패했다고 느껴질 그때가 바로 돌아올 때라는 겁니다.
그 다음 ‘세베대의 아들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당시 성도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이름을 기옥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제자 둘’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들이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요한복음의 문맥으로 살펴볼 때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했던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 와 보라고 했던 그의 절친 벳새다 사람 빌립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이렇게 7명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내려가 있던 어느 날 베드로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3절)
예수님이 언제 나타나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니 같이 있는 시간이 더 적은 상황에서 아무 일도 안 하며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원래 직업이었던 물고기 잡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다른 사명을 주실 때까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의 사명인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일을 팽개치고 주님의 뜻이 뭔가를 찾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주님이 또 주시는 사명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지만, 그날 밤 그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지난 3년 여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물고기 잡는 어부일을 중단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들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 특히 새벽은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에 나갔습니다. 가장 좋은 시간에 그것도 물고기 잡는 전문가인 어부들이 열심히 일했지만 결과는 빈 그물, 빈 배였습니다. 가장 자신 있는 분야에서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에서 내 힘으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경험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럴 때가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최고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지 않도록 막아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4절)
이제 해는 밝아 오고, 이제 그물을 정리할 때가 되었는데, 그때 한 사람이 바닷가에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배까지는 약 50칸(8) 쯤 되는 거리였는데, 이것은 200규빗입니다. 손끝에서 팔꿈치까지가 한 규빗이니까 대체로 45cm내지 50cm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200규빗(50칸)이라는 것은 즉 90~100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해변에서 90~100m 거리라는 것은, 제자들이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저 깊은 데서부터 물가로 나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거기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합니다. 아직 어두워서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맞지만 뭔가 신비한 부활의 몸으로 계셨기 때문일 수도 있고, 거리가 너무 멀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서 있는 낯선 사람이 말합니다. 말이 들렸다는 것은 90~100m 거리에서 소리를 질렀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5절)
예수님 말씀을 직역하면, “얘들아, 고기를 하나도 못 잡았구나, 그렇지?”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못 잡았습니다.’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못 잡았다고 대답하면서 의아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배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우리가 고기를 하나도 못 잡았다는 것을 저 멀리 있는 사람이 어떻게 아는가?’ 하고 신기하게 여긴 겁니다. 그것은 그들이 밤새 고기를 하나도 못 잡은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형편을 이렇게 꿰뚫어보고 있는 분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이시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서 “얘들아”(children)라고 마치 자녀들을 부르듯이 부르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까지 예수님이 일으키신 표적을 보고 ‘아, 대단하다. 저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라고 하는 정도의 믿음에 머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기대하는 믿음은 뭡니까? 도마가 의심한 후에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요한복음이 보여주기 원하는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안 보고도 믿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도마보다 복된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낯선 사람이 다시 소리칩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6절)
이것은 제안이나 질문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고 명령한 하신 게 아니라 분명한 약속도 주십니다.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 말씀에 제자들이 놀랍게도 순종합니다. 지금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고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도 정리하던 그물을 다시 펴서 던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말을 왜 전문가들이 듣고 그물을 내리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한 이유가 뭡니까? 저 사람이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데, 지금 어둑어둑하고 보이지도 않는 데서 자기들이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느끼면서 그물을 내린 겁니다. 그들이 순종해서 그물을 던지니까, 그물을 들어 배 위에 올려보려 해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나중에 11절을 보면 무려 153마리나 되었고, 다 큰 물고기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많이 잡힌 것도 기적이고, 모두 큰 물고기들만 잡힌 것도 기적이고, 가장 많이 잡히는 시간인 새벽을 지나서 아침이 되며 잡힌 것도 기적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을 떠올리는 사건이고(2장), 무엇보다도 오병이어의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기적입니다(6장).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하려고 행하시는 ‘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인생을 평가해보십시오. ‘나는 그 동안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대부분 열심히 사실 줄 압니다. 맡은 일을 잘 하면서, 학생이면 공부하고, 직장인은 열심히 일하고, 사업하는 분들은 사업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내가 얼마나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유능한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을 동원해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100이라는 노력을 했는데 100이라는 결과를 항상 얻습니까? 이 세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100이라는 노력을 했는데 90이나 80을 얻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50, 어떨 때는 20 정도로 거의 못 거둘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100을 했는데 120, 130, 150이 될 때도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 아닙니까?
노력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유능한 지식을 쌓는 게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지식을 쌓고 재능을 기르고 유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은 해야 하겠지만, 모든 결과는 내가 한 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다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나에게 달린 게 아니고 주님께 달렸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그분의 주권은 주일에만 미치고, 예배드릴 때만 미치고, 예배당 안에만 머물고 나가면 내 마음대로인 것이 아닙니다. 아까 부른 찬양처럼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지금 여기서는 예수님이 주인이시라고 하다가 나가면 내가 주인이라고 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인 된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도나 종교적인 일에만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 또는 자녀의 학업이나 사업이나 직장 일이나 정치나 복잡한 국제 정세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주일에 일이 많고 바빠서 예배를 빠지고 일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결과가 좋습니까? 좋을 수도 있는데 사실 비슷합니다. 학생들은 시험이 있으면 주일을 빠지고 공부한다고 하는데, 그때 공부합니까? 아니면 점수가 잘나옵니까? 제가 한국에서 고3이 될 때 보니까 고3이 되는 순간부터 교회에 안 나오는 학생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고3이 끝나고 보니까 그런 사람들은 결과가 좋고 교회에 열심히 나온 저 같은 사람들은 결과가 안 좋은가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달린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6일을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하고 하루를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사람은 생체리듬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좋고 유익이 됩니다. 하루를 쉬는 게 유익이 되는 것이지, 7일 계속 일한다고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오래 전이지만 제가 고3이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그때 하루 교회에 나가서 예배하고 친구들과 교제한 후 오후나 저녁때부터 공부를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갔던 것이 나를 굉장히 refresh해주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계속 붙들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능률이 더 올랐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할 때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또 옆에서 많이 격려해주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오히려 더 힘을 얻고 공부가 더 잘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고기를 주시고 많이 먹으라고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일으키신 표적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상황이 어떤 것이든지, 혹시 지금 경험하는 것이 성공이든지 실패든지, 풍성함이든지 빈곤함이든지,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알게 하시려고 주시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되고 있으면 그것을 주신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라는 겁니다. 지금 일이 너무 안 되고 막히고 괴로우면 이것을 통해 내 인생을 이끌어주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도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알거나 얻지 못했다면 내가 이루고 쌓은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이 땅을 떠나는 순간 내가 이룬 모든 게 누구의 것이 됩니까? 내 것이 아닙니다.
여기 153마리의 물고기처럼 우리가 성공하고 높이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그것은 참 감사한 일인데, 그 자체로 기뻐하라고 주시는 게 아닙니다. ‘돈 많이 벌면 선교헌금 많이 하겠습니다. 십일조를 많이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심지어 선교하라고 돈을 많이 벌게 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사실 부수적인 이유입니다. 진짜는 그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을 알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라는 겁니다. 그분을 알고 믿으며 따르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알아본 두 제자 (7-8절)
오늘 본문의 사건은 누가복음 5장에서 일어난 일과 매우 비슷합니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후대에 썼기 때문에 이미 오래 전에 나온 누가복음을 읽어서 그 사건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날(눅 5장)도 베드로가 밤새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그물을 들어 올려 손질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올라오신 후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아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주님은 갑자기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라고 하셨습니다.
그 명령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어업전문가 베드로가 랍비이신 예수님의 말을 들었다는 점입니다. ‘밤새 수고했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고 나가서 했습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리며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 5:8)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바로 그때 그 사건을 재현하신 것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세베대의 아들들이자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도 그 사건을 목격하고 놀랐습니다(눅 5:10). 오늘 본문에도 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7절)
그가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 즉 세베대의 아들 요한일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품에 의지해 누워 예수님의 뜻을 알아서 베드로에게 전달한 제자였습니다(13:23-26).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갈 때도 이 제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18:15-16).
이번에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 하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즉시 반응을 보입니다. 역시 베드로는 행동의 사람입니다. 옷을 벗고 있다가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겉옷을 둘렀다는 말은 새벽에 추우니까 겉옷을 걸치고 있다가 수영하기 좋도록 띠로 허리를 동였다는 뜻일 수도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옷을 단정하게 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신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베드로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서둘러 해변에 계신 예수님께로 가는 동안 다른 제자들은 그들이 타고 있던 작은 배로 그물을 끌고 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8절)
하지만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달았다는 말은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한 낯선 사람과 부활하신 예수님, 자기들이 그렇게 따라다녔던 예수님을 연결시키고 있지 못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아는 것은 성경 지식을 쌓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와 만나 주신 일, 기도했을 때 들어주신 일 등 삶의 간증이 쌓일 때, 그 심령에 말씀이 들어갔을 때, 우리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 주님을 실감 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목장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나누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감사의 제목을 나눈다는 게 뭡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주님이 나에게 뭘 해주셨는가를 생각해보고 이렇게 해주셨다며 간단히 나누는 것이지만, 바로 그것이 간증입니다. 나와서 하는 것만 간증이 아니라 그게 간증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런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런 것이 쌓일 때 정말 경험적으로 주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 저건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 하고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하나님이 저 사람의 삶에 저렇게 역사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눈이 생깁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복잡한 일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저렇게 역사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알아보게 됩니다.
3. 예수님이 차려주신 아침식사 (9-14절)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9절)
숯불과 생선과 떡은 딱 봐도 식사입니다. 이 장면을 본 베드로의 심정은 다른 제자들과 달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숯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대제사장의 집까지 따라갔는데, 사람들과 함께 숯불을 쬐고 있을 때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숯불’이라는 단어를 딱 두 번 씁니다. 베드로가 숯불을 쬐고 있을 때, 그리고 여기서 숯불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숯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면하게 하시는 겁니다.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숨기고 싶은 과거를 가리키며 “네 남편을 불러 오라”(4:16). 여러 명의 남자들이 있었고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상황에서 아픈 과거와 현재를 피하지 말고 직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을 감당하기에 앞서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가 정말 위대한 사도가 되려면 이것을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죄나 나쁜 습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과거가 베드로에게는 숯불을 통해서 다시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숯불만 있는 게 아니라 숯불에 굽고 있는 물고기와 떡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침식사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제자들의 허기를 달래 주기 위한 목적만으로 떡과 생선을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처럼 뭔가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6장에서는 끝도 없이 나온 빵과 생선이 그 역할을 했다면, 21장에서는 생선이 그 역할을 합니다.
이제 베드로도 육지로 올라왔고, 제자들도 곧 뒤따라 올라와 예수님과 숯불을 마주한 채 앉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다음 장면은 뭐겠습니까? 같이 식사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때 두 번째 명령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0-11절)
주님은 제자들 모두를 향해 명령하셨는데 누구만 움직입니까? 시몬 베드로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해변까지 그물을 끌고 왔는데, 이제 베드로가 배에 올라서 그물을 걷은 후 육지까지 끌어 올렸습니다. 그물 가득히 잡힌 고기는 모두 큰 물고기들이었고, 수를 헤아려 보니 모두 153마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꽂혀서 ‘153이란 무슨 뜻인가?’ 하며 연구를 하는데, 별 의미 없습니다. 그냥 많이 잡았다는 겁니다. 신기하게도 한국의 모나미 볼펜에 ‘153’이라고 쓰여 있기는 합니다. 아마 이것을 보고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153기도’라고도 있습니다. 하루에 5초 동안 3번 기도한다는 겁니다.
어쨌든 물고기가 많았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명령을 내리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때 혼자 순종했는데, 이것을 통해 그가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누렸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보고 있지만, 직접 끌고 나온 게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더 큰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우리가 같이 예배하지만 실제로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복을 누리고 은혜를 체험합니다. 물론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은혜가 될 수 있지만, 실제로 행할 때 더 큰 은혜가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2-13절)
물고기를 잡는 일에서처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이 주인으로 행동하십니다. 손수 마련하신 음식을 통해서 밤새 노동으로 지친 제자들의 육신에 쉼을 주십니다. 고기 잡는 표적 때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이 이제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누구냐고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행동은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와 거의 비슷합니다. 그 사건도 바로 이곳 디베랴 호숫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한 6장 11절과 오늘 본문 21장 13절은 표현이 거의 비슷합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이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였습니다(눅 24:3-31).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메시지를 줍니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지금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 바로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단순히 어떤 의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정말 그 의미를 생각하고 할 때 정말 은혜가 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와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며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참여할 때,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거기에 초대받은 사람들도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은 사람들이 참여하지만, 가끔 보면 믿으면서도 ‘요즘 저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11장)에 보면 잘못 먹고 마시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상태가 안 좋아서 못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자격이 있어서 나아가는 데가 아니라 주님이 은혜로 불러주시는 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4절)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 도마가 없을 때 한 번, 도마와 함께 있을 때 다시 한 번, 그리고 7명의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세 번’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횟수를 보여주는 것은 제자들이 믿기에 충분할 만큼,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메시아)로 믿기에 합당할 만큼 나타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우리에게도 이 사건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게 되며 그분을 따라 살 수 있게 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와 물으십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어려움을 당해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찾아와 물으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우리의 현주소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피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리고 명령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것이 우리의 상식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요?’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오늘도 순종과 섬김의 자리에서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고귀한 인생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