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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7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36 ✦
“환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사람들”
(요한복음 16장 23~33절)
[들어가는 말]
유태인들의 지혜의 책인 <탈무드>에서는 인간의 나이에 따라 인생을 7단계로 나누고 있습니다.
1) ‘한 살은 임금님’: 모두가 왕을 모시듯 달래고 어르고 비위를 맞추어주기 때문입니다.
2) ‘두 살은 돼지’: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구별하지 못한 채 마구 흙탕 속을 헤집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3) ‘열 살은 양’: 자기를 치장하며 멋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4) ‘열여덟 살은 말’: 크게 자라서 자기의 힘이나 재능을 남에게 과시하려는 때라서 그렇습니다.
5) ‘결혼하면 당나귀’: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6) ‘중년은 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윗사람에게 꼬리치고 아양을 떨면서 호의를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7) ‘노년은 원숭이’: 늙어서는 어린이로 되돌아가 모두의 사랑을 받기 원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탈무드>의 내용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리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당나귀처럼 걸어도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개처럼 비굴할 정도로 꼬리를 치고 다녀도 내 가족들은 모른다는 겁니다. 나이 들어 은퇴한 뒤에는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살고 싶은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재주를 부리는 젊은 원숭이에게만 몰릴 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늙은 원숭이에게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습니다.
결국 여기서 말해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도 있듯이, 주위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철저하게 홀로 태어나서 철저하게 홀로 살다가 철저하게 홀로 죽는, 고독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살다가 아이를 낳고 같이 살아도, 분명히 가족이 같이 살고 있지만 거기에 고독이 있습니다. 내가 아프면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대신 아파줄 수 없습니다. 그냥 내가 아플 뿐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독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이 고독하지 않고 엄청난 기쁨과 평안과 승리의 영광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1. 깨달음과 기도 응답 (23~28절)
1) 제자들의 기쁨의 이유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고난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면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깨달음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23절 상)
‘그날’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이라고 불리는 날로서, 흔히 ‘종말’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후에 올 날이 바로 ‘그날’이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날이 ‘그날’입니다. 그날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 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오해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음을 온전히 믿게 될 것이며, 그분이 살아 계셔서 지금도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심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제자들의 그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을 빼앗길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기도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3하-24절)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에게 참 좋은 것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지구 반대편에도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는 게 아니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거기서 역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자신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기도는 감사한 일이지, 결코 부담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것을 ‘내 이름으로’,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번 기도를 마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내가 기도하면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기도만 하면 다 응답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내 이름으로’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15장에서 이미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15:7)
‘누가 누구 안에 거한다.’라는 말이 나오면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과 우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기도하면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폭풍이 몰려올 때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갑자기 폭풍이 사라지는 마술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에 폭풍을 견디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폭풍이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니라, 폭풍 안에서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결국 핵심이 뭡니까? 사랑의 관계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렇게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빌립보서 4장에서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함으로 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라고 말한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상황이 갑자기 바뀌고 평탄해진다기보다는, 상황은 똑같은데 나는 괜찮아집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내가 안 괜찮았는데, 기도하니까 괜찮아집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의 비밀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고 계십니다(롬 8:34). 우리가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능히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해주실 것이므로, 지금 제자들은 근심할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합니다.
2) 비유가 아니라 밝히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이러한 깨달음과 기도의 특권을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비유로 많은 것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5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는 OO이다.’라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7번 나옵니다. 신기한 것은, 요한복음에서 일부러 그렇게 쓴 것 같은데, ‘나는 OO이다.’라는 것이 7번 나오고, 예수님의 표적이 7번 나오고, 또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것이 7번 나옵니다. 일부러 7-7-7이라는 완전수로 한 것 같습니다. ‘나는 OO이다.’라고 하신 것이나 표적이나 신앙고백이 딱 7번만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부러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그렇게 7-7-7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라고 7번 ‘나는 OO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유를 사용해서 알려주셨더라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기 전까지 제자들이 그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가르쳐주시기 전이기 때문에,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깨닫지 못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은 위에서부터 오신 분이지만 제자들은 땅에서 나서 땅에서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 땅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니까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다 땅에서 나지 무슨 하늘에서 나겠습니까? 그런데 땅에서 났더라도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나아가면 하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데, 땅의 것만 계속 생각하니까 하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주고 싶으신 것이 있는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만 바라며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진정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며 14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데, 제자들은 계속해서 무엇을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습니까?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시면, 가장 가깝게 따라다니던 우리가 그 밑에서 높은 자리를 하나씩 차지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누가 크냐 하며 항상 싸웠던 겁니다. 자기가 더 큰 자라야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마음으로 여기까지 따라온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는 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 ‘때가 이르면’이라는 말은 십자가와 부활 이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 전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하셨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고, 제자들을 세워 훈련하시기도 전에 유대인들이 핍박해서 죽임을 당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비유는 당시 랍비들이 더 쉽게 이해하도록 사용하는 방법인데,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귀가 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진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겁니다. 그렇게 비유를 사용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시며 왕이신 것을 아주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야망을 따르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니까 너무 실망하고 낙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다 도망갔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받고 놀랍게 변화되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 말씀을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또 다른 특권인 기도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6절)
여기서 ‘그날’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이후를 가리킵니다. 이제 그날이 되면 제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혼자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이제 제자들을 위해 전혀 기도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나 혼자가 아니라 너희도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입니다. 우리가 알 듯, 1년에 대제사장이 딱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와 그 밖의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위에서 아래로 죽 찢어졌습니다. 그 말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을 미리 여기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렇게 될 것이다. 너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 천국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편하게 쉬고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롬 8:34).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계시고, 그럼에도 우리가 직접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그 조건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7절)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 무엇입니까? 아론의 계통도 아닌데 제사장이 된다는 겁니까?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는 아론 계통이 아니라 돈을 써서 되거나 로마가 임명해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진짜 제사장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며 또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아닙니까? 순서는 동시에 이뤄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래서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을 또 사랑해주십니다.
<생명의 삶> 때 배우는 핵심이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바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겁니다.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해주시고,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만 아니라 이렇게 예배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도할 때 다 받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기도 응답을 다 받습니까?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8절)
이것이 보여주는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순종입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순종 때문에 이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사랑하고 믿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간주해주신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관계입니다.
가끔 보면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해주신다.’ 제가 그런 말을 들을 때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도해보셨는데요?’ 이것을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해주시네.’라는 마음이 들 때 ‘내가 얼마나 기도했나?’ 하는 것을 먼저 돌아보십시오. 솔직히 그렇게 많이 기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응답을 안 해주시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사실 기도 응답에 있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가 아닙니다. 또 내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가도 아닙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주님을 정말로 믿는가? 그래서 그분께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점검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기에 앞서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도 응답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느냐 또는 얼마나 세게 기도했느냐에 전적으로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며 믿으며 순종하고 있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관계 안에서 간구하면 들어주십니다.
오래 전 제 아이가 어릴 때 학교에서 발표회가 있어서 간 적이 있는데, 먹을 것을 가져가서 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아이가 와서 “Give me.” 하며 자기도 달라는 겁니다. 속으로는 ‘네가 누군데?’라고 하고 싶었지만 귀여워서 그냥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전혀 모르는 개가 우리 집 차고로 쑥 들어온 적도 있습니다.
전혀 우리 집에 속한 가족이 아닌데 당당하게 와서 달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합니까? 우리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함께 나누고 주고받고 들어주는 것인데, 아이는 부모에게 달라고 당당히 말하고 부모는 당연히 주고 사랑하며 서로 주고받고 하며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전혀 관계도 없는데 와서 달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분, 나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받는 것만 자꾸 생각한다면, 그것이 샤머니즘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기독교가 비난을 받는 것 중 하나가 너무 샤머니즘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데 힘쓰는 게 아니라, 그저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안 해도 되고 그저 주시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까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물을 떠 놓고 손을 비비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늘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기도가 됩니다. 또 우리 삶 자체가 기도 응답의 삶이 됩니다. 기도 응답이라고 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했는데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할 게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 또는 목장에서 단풍놀이를 가려고 할 때 ‘하나님, 오늘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에서 우리가 즐겁게 지내다 오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을 때 정말 날씨가 좋았다면 그런 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잘 기록해보면 기도 응답이 엄청나게 많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기록을 안 하니까 기도 응답을 안 해주신 것처럼 느끼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정말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따르면 하나님께 우리가 얼마나 예쁘시겠습니까?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믿을 만하신데 우리가 해달라고 구하는 것을 왜 응답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을 정말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도 거절하시는 것도, 모두 다 사실은 기도의 응답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정말 아름답게 인도해주십니다.
2.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29-33절)
이처럼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서 제자들의 두 가지 특권, 즉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특권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을 수 있는 특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환난이 와도 그것이 그들에게서 기쁨을 빼앗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이제 끝으로 예수님은 이전에 말씀하셨던 제자들에게 닥칠 근심과 환난과 그 후에 올 기쁨에 대해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1)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
그런데 예수님이 죽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29-30절)
제자들은 당당하게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비유로 말씀하실 때는 몰랐는데 밝히 말씀하시니 알아듣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알게 된 것은 두 가지인데, 사실은 둘이 같은 겁니다.
첫째,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질문하는 것을 예수님이 이미 다 아시고 대답하신 것을 조금 전에 경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 분임을 믿는다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믿고,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했다고 그들이 정말 깨달았는지는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6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갈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9)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시간으로부터 불과 몇 시간 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십니까? 매주 사도신경으로도 고백하는데, 그 신앙고백의 진정성은 말을 했다고 증명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입으로 고백해야 하지만, 안에는 믿음이 없는데 말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고백의 진정성이 언제 증명됩니까? 바로 십자가 앞에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며 그분의 제자라는 것이 증명되는 때는 평범할 때가 아닙니다. 삶이 평탄할 때가 아닙니다. 일이 술술 잘 풀릴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그것 때문에 고난이 올 때라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 앞에서만 온전히 증명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미국에서 벌써 1년 8개월이나 되었습니다. 지난 1년 8개월 동안의 코로나 사태 가운데 이제는 백신 접종을 받고 더 많이 나오시지만, 처음부터 매 주일마다 예배의 자리를 지킨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은 이전보다 나아져서 더 많이 나오고 계시지만, 정말 이 어려운 중에 여러분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시고, 성도들과 교제하고, 또 온라인으로라도 목장으로 모이려 애쓰고, 삶 공부까지 하는 분들이 참 귀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얼마나 예쁘시겠습니까?
이 코로나 상황이 참 힘든 기간이었지만, 동시에 이것이 앞으로 미래에 다가올 심판을 미리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건강의 문제 때문에 지금도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연로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분들도 있는 것을 봅니다. 여기도 오지 않을 뿐더러 온라인 예배도 안 하는 분들이 조금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 동안 우리가 다 같이 마음껏 교회에 올 수 있을 때는 몰랐는데, 힘든 상황이 오니까 진짜 신앙 상태가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진짜 믿음은 코로나와 같은 고난의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이번에 깨닫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관계인데,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집에서 혼자도 예배하고 가족끼리도 예배하지만 형제자매들과 함께 모여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간다는 말이 뭡니까? 하나님이 ‘너는 죄인이다.’ 하시며 지옥으로 확 보내시는 게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곳입니다. 물론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가는 곳인데, 장소의 개념보다는 관계의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아직 천국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고 지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삶은 뭡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지옥의 삶은 뭡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전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기가 왕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났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죽음의 관문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다고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인을 막 지옥으로 보내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은 죽음 후에 하나님이 안 계신 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럼 천국은 뭡니까? 하나님이 계시며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하나님 나라)으로 가는 것이고,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사람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완성되는 것이 죽음을 통해서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살다가 죽음 후에 갑자기 ‘나는 이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해도 늦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할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몇 달 전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Soul>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걸 자꾸 보니까 우리가 헷갈리는 겁니다. 거기 보면 사람이 죽었는데 여기도 갔다, 저기도 갔다 하며 오락가락 하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고 아주 복잡합니다. 영화에서는 여기도 갈 수 있고 저기도 갈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단절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저기로 못 갑니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2) 환난 중에도 누릴 수 있는 평안 (31-3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1절)
요즘 한국에서 기독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메시지>라는 책인데 놀랍게도 성경입니다. 사실은 3년 전 돌아가신 우리 미국장로교 출신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목사님이 현대식 영어로 번역한 성경입니다.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약간 의아합니다. 어쨌든 그 성경과 또 다른 영어성경인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Do you finally believe?”(너희가 드디어 믿느냐?)
개역개정에는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사실은 “너희가 드디어 믿느냐?”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말이 뭡니까? ‘너희는 정말로 믿느냐?’ 아직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정말로 믿는다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2절)
예수님은 “우리가 압니다. 믿습니다.”라고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한 제자들이 각자 흩어지고 예수님을 혼자 버려둘 때가 곧 올 것인데, 그때가 이미 왔다고 하십니다. 앞서 베드로에게는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라고 이미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홀로 버려둔 채 다 자기 고향으로 흩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정말로 믿은 사람은 이 순간에 없었다는 겁니다. 나중에 성령 받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이전에 그 정도의 지식과 믿음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흩어지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명백한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씀은 예수님보다 500년 이상 전에 살았던 스가랴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의 성취입니다.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나 또한 그 어린 것들을 칠 것이다” (슥 13:7b, 새번역)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가 벌써 왔다고 하십니다. 가룟 유다가 이미 떠난 데다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의가 이미 구체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암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겠지만, 예수님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바로 이것이 나중에 제자들도 누리게 될 복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고, 또 환난 중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복을 누리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든든하게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 (33절 상)
앞에서는 ‘기쁨’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평안’(히브리어: 샬롬)이라고 하십니다. 평안(샬롬) 가운데 거하는 삶이 기쁨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고난의 순간이 올 것인데, 그때 넘어지지 말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도록 이 말씀을 미리 주셨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또 여기서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33절 하)
세상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똑같이 악하게 대우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의 어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더욱더 주님의 평안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환난을 당할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환난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평안과 기쁨은 도망가고 흩어지고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라 담대한 사람이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환난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에 있습니다. 이것은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실 승리를 가리킵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에게는 승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평안하게 되며 기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이 승리자가 되신 것처럼 이렇게 승리자가 됩니다. 로마의 박해 아래서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하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이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계 3:21, 새번역)
우리가 아는 분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이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상황 중에 우리가 함께 협력하던 선교사님 한 분은 코로나에 걸려서 산소호흡기만 있었어도 사실 수 있었는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순교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남긴 채 가셨습니다. 나이가 50이 채 안 된 분이셨습니다.
또 다른 가정도 코로나에 걸려서 굉장히 고생하다가 지금은 나은 상태에 있지만 후유증이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조금 전 돌아가셨다는 선교사님의 부인 선교사님도 후유증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또 다른 부부도 코로나에 걸려서 많이 힘들어하시다 지금은 조금 나은 상태에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우리가 아는 선교사님들이 코로나에 걸리거나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도대체 저분들은 왜 저렇게 하셔야 하는가?’ 그분들을 세상적으로 보면 최고 일류대학 나오고 그냥 살면 얼마든지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저분들이 저기 가서 20년씩 복음을 전한다고 선교사로 있다가 코로나에 걸려서 고생하고 지금도 재정적 어려움과 사역의 힘든 점들 때문에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왜 저러십니까?
대답은 하나입니다. 이긴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볼 때는 코로나 걸려서 고생하는 사람, 괜히 저러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긴 사람’입니다.
[나가는 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동료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이 말씀은 로마에서 예루살렘까지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가지고 갈 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진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만이 자신들도 부활의 영광과 승리에 참여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며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협력하는 선교사님들도 그런 마음으로 사역하다 순교하셨고, 병으로 그렇게 고생했지만 지금도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역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까 불렀던 찬양곡 중 “영광의 왕 찬양합니다”라는 곡이 있습니다.
영광의 왕 찬양합니다
위대하신 주 우리 구원자
존귀하신 주 경배합니다
보좌에 계신 어린 양
예수 죽임 당한 어린 양
예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영원히 찬송받기 합당한
영광의 그 이름 예수
이 곡의 악보 맨 위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Arab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랍권에서 나온 찬송이라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집에서 쫓겨나고 심하면 공격당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이슬람권에서 아랍 형제자매들이 이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오, 예수, 영광의 왕이시죠. 네네. 보좌의 계신 어린양, 그럼요.’라고 하는 찬송을 거기서는 쉽게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영광의 왕 찬양합니다. 위대하신 주 우리 구원자”라고 찬양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 테러를 당합니다. 그럼에도 “존귀하신 주 경배합니다. 보좌에 계신 어린 양. 예수 죽임 당한 어린 양. 예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영원히 찬송받기 합당한 영광의 그 이름 예수!”라고 담대히 찬양합니다.
알라가 유일하고 참된 신이라고 하는 그 사회 속에서 “아닙니다. 예수가 참된 신이시며 우리의 구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들의 고백이 담긴 아주 심플한 찬양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의 생명을 어떻게 할 수는 있어도 그 후에는 어떻게 할 수 없다. 우리의 영혼까지 어떻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나는 두려워한다.’라는 고백을 하는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바로 이 사실을 믿고 따르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고 가장 기쁨의 길이고 가장 평화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 승리한 사람들이며 또한 승리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담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 안에서 이렇게 놀라운 삶이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