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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5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39 ✦
“교회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 20~26절)
[들어가는 말]
오래 전 한국의 어느 교회 청년부에서 기도 모임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먼저 청년부 담당 목사님이 청년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한 기도는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관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기도할 때는 자기만 위해서 하지 말고 자신의 영역을 넘어 다른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봅시다. 예를 들어, 일단 가깝게는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시고, 더 나아가 사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또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 그리고 선교사님들을 위해 같이 기도합시다.”
이러한 목사님의 말씀 후에 각자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죽 돌아가면서 소리 내어 한 명씩 기도하다가 한 형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 형제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그 동안 제가 너무 저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해왔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오늘은 일단 저의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하기 원합니다. 제 부모님은 무엇보다 좋은 며느리가 필요합니다. 우리 부모님이 착하고 예쁘고 상냥하고 남편 말 잘 따르고 집안일 잘하는 훌륭한 며느리를 맞이하여 당신들의 아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이런 것은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틀림없는데, 이처럼 우리가 이기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기도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풍자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드릴 수 있는 기도 중에 가장 비이기적인 기도, 가장 순결한 기도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기도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기도가 풍성해지고 또 오래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저는 3분, 4분, 5분만 되면 기도할 게 없던데요?’라고 하시는 분들은 중보기도를 안 해서 그런 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시작하면 기도제목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몇 시간씩 지속되는 겁니다.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요한복음에서 마지막으로 드린 중보기도입니다. 인류를 위한 짐을 지고 기도하신 것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합니다. 이 기도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5절은 기도의 목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 기도인데, 하나님의 영광이 초점입니다. 두 번째로 6-19절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고, 오늘 본문은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 전체적인 구조가 말해주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제자들과 교회를 이 땅에 남겨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은 완전히 패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승리하시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점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할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제자들과 교회입니다.
1. 하나 되게 하소서 (20~23절)
지난주 본문에서 열두 제자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 즉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0절)
이게 바로 우리들 아닙니까? 제자들 즉 사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예루살렘 교회가 생기고 안디옥 교회가 생기고 여러 군데에 교회가 생기면서, 그들이 또 복음을 계속 전하고 전해서 그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만 위해서 기도하신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믿게 된 우리를 위해서도 2천 년 전에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교회를 위해 무엇을 구하십니까? 먼저는 교회의 내적인 영역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1절)
여기 보면 성도들이 하나가 되도록, 신자들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2절)
여기서도 역시 성도들의 하나 됨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2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3절)
여기도 역시 하나 됨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하는데(엡 1:23), 몸은 유기체를 말합니다. 몸에는 여러 가지 기관이 있습니까? 팔이 있고 다리가 있고, 눈, 코, 입 등 많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린다면 그것을 가리켜 ‘몸이 두 개가 되었다. 세 개가 되었다.’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냥 팔다리가 잘렸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몸에서 잘려 나갔기 때문에 몸이 두 개가 된 게 아니라 그것은 그냥 잘린 겁니다. 몸이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몸은 나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엡 1:22; 골 1:18).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말은, 몸이라는 것은 머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 머리가 가려우면 머리를 긁는 것 등은 모두 뇌가 지시해서 팔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지시하는 명령에 몸이 즉시 순종해야 하는데,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이 ‘이렇게 해라’라고 하실 때 거기에 순종하면 그럴 때 강력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된 교회라는 것은 건강한 교회를 말합니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 또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가 된 교회입니다. 반대로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교회가 분열되도록 여러 가지로 시험하고 공격합니다.
교회가 분열될 때 가만히 보면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오는데, 완전히 틀린 주장은 별로 없습니다.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정의롭고 좋은 주장인 것 같지만 그것을 통해서 교회가 분열된다면 그것은 좋은 주장이 아닙니다. 나쁜 주장입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악한 주장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좋아할 일이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분열이었습니다. 교인들이 나뉘면 교회는 약해지고, 아무리 강했던 교회도 보잘것없어집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다음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이 ‘음부의 권세’(죽음의 세력)를 이기는 강력한 교회가 바로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하나 될 때에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지난 2018년 4월에 우리 교회가 ‘목회자를 위한 가정교회 컨퍼런스’를 주최했습니다. 컨퍼런스를 준비하기 위해서 집회를 했는데, 그때 강사로 당시 국제가정교회사역원 원장이신 최영기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가정교회를 시작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이 여기 콜럼버스 출신이십니다. 당시 교회가 딱 하나일 때 거기서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원래는 전자공학으로 OSU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이전에 공부하셨던 곳과 사셨던 곳을 돌아보는데, 그때는 2월이었지만 그날따라 기온이 70도로 올라가서 더웠습니다. 그 전 주에 눈이 많이 와서 길에는 눈을 다 치워 산처럼 쌓여 있었고, 잔디밭에는 눈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날 날이 더우니까 잔디나 보도에 쌓여 있던 눈들은 쉽게 다 녹아버렸습니다. 그런데 눈 치우는 차들이 치워서 산처럼 쌓여 있던 눈들은 안 녹는 겁니다. 땅에 있던 눈은 다 녹았는데 산처럼 쌓여 있던 눈은 안 녹았습니다. 모든 곳이 다 그랬습니다. 그냥 조금 녹아서 물만 약간 흐르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게 하나 됨의 파워입니다. 아무리 날이 더워도 같이 뭉쳐 있으니까 눈이 안 녹는 겁니다. 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공원에서 숯불을 피워서 고기를 구워 먹고 끌 때는 흩어 놓습니다. 불은 모여 있으면 활활 타고 뜨거운데 흩어 놓으면 금방 꺼집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 됨의 파워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모입니까? 바로 그 하나 됨, 같이 모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물방울이 하나둘씩 모여서 거대한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지나간 자리에는 홍수가 나기도 하고, 또 물방울이 댐에 모이면 수력발전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모일 때 이런 능력이 나옵니다.
개미 한 마리는 아주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불개미라도 한 마리만 있으면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도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개미인데, 그 개미들이 떼로 모이면 어떻게 됩니까? 큰 황소도 몇 분 안에 뼈만 앙상하게 남게 할 수 있는 무서운 힘이 나옵니다. 이것이 모임의 힘입니다. 하나 됨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 됨은 적당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 됨이라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힘써 지켜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힘써 지키지 않으면 하나 됨이 깨질 수 있습니다. 힘써 지키지 않으면 하나 되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하나 될 때에만 교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 됨을 위하여 이렇게 같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교회는 말씀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20절을 다시 보면 ‘그들의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말합니다. 그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주신 말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이 기초가 될 때 교회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사도행전 2장). 초대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었고 주님의 말씀이 기초였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를 친교 단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골프클럽이나 계모임이나 친목회와 비슷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술 담배를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도 목장 모임에서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교회에서는 술 담배를 하면 안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이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1부로 예배를 끝낸 다음 2부나 3부로 술도 마시고 카드놀이도 하면서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물론 친목을 다지면서 오락을 할 수는 있지만, 교회의 기본은 그게 아닙니다. 교회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모여서 그런 것을 하자고 하는 건데, 교회는 단순한 사교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 3:15b)
주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 진리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모든 성도가 살아나서 생기가 돌고 은혜가 임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16에서 말씀하는데, ‘감동’이라는 말이 원어로 ‘숨결’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과 생기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살아 있으면 생기가 돌고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계속 조용하고 평안해서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교회들이 분열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웃에도 그런 소식이 들려서 참 안타깝습니다. 왜 교회들이 서로 싸우고 분열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소견을 먼저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사사시대와도 같이, 자기 소견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누군가와 관계가 불편해질 때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은 분명히 뭐라고 합니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 하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기분이 나쁘면 하나님의 말씀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분열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기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가면 분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영적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나누는 가족이 교회입니다. <부모의 삶>에서 강조하는 것은 가정에서 아빠와 엄마가 자녀에게 똑같은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와 엄마가 <부모의 삶>을 같이 들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분만 들으신 경우 아빠와 엄마가 아이에게 다른 소리를 내고, 그러면 아이는 헷갈리는 겁니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하나?’ 하나님의 영적 가족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야 하는데, 이 말도 듣고 저 말도 듣고 혼동이 되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계속 문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투기 때문인데, 사실 그것은 성도들이 먼저 하나 되는 모임에 많이 참여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서로 교제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통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주일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특히 코로나 상황에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린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하나 되어 제대로 나가려면 한 번 살짝 교회에 왔다 간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이 선포되는지도 잘 모르고 또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모르니까 모이면 다른 소리를 하게 됩니다. 매주 모여도 쉽지 않은데 몇 번 빠지게 되면 마음이 하나가 되기 힘듭니다.
주일예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본이고, 그 외에 수요예배, 새벽기도, 목장 모임, 삶 공부, 영상 목회편지 등을 계속 우리가 같이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되기 위함입니다. 같은 생각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직분을 맡았을 경우, 당회원은 당회로 모이고, 안수집사로 위원장 하시는 분들은 연석회의로 모이고, 제직은 제직회로 모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미국장로교에서 목사가 당회장(moderator, 인도자)이고 시무장로는 당회원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관심도 없고 귀찮으니까 나는 당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라고 하며 목사가 자꾸 당회에 결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회원 장로가 ‘나는 귀찮고 내 일도 바빠서 당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라고 하며 자꾸 결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직인 분들이 제직회에 많이 참석을 안 하고 있습니다. 제직으로 제직회에 일단 참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회원이 당회에 안 나가는 것이나 제직이 제직회에 안 나가는 것이 사실은 같은 겁니다. 만약에 장로님이 당회에 안 나갔다면 ‘저럴 수가 있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제직이 제직회에 안 나가는 것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인이 공동의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도 똑같습니다. 활동교인이 된다는 말은 ‘내가 이 교회를 통해 주님을 함께 섬기겠다.’라고 헌신하며 나아가는 건데, 공동의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겁니다. 물론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몸이 아프거나 한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보통의 경우를 말합니다.
교인이 되는 것도 헌신이고, 직분을 맡는 것도 헌신입니다. 서리집사이든, 권사이든, 안수집사이든, 장로이든 다 헌신입니다. 목사도 당연히 헌신입니다. 그런데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서 안 가겠다.’라고 하면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알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교회 지도자로서 함께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 제대로 섬길 수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와 교인으로 해야 할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면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다른 교인들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는 빠져서 그것을 몰라 방황하게 됩니다. 지금 코로나 상황에는 더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더욱 촉각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지금도 이집트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라는 농담도 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거기 많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BC 1500년경 모세가 이끌고 나올 때 광고를 제대로 못 들어서 못 나온 유대인들이 있다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하나가 되어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게 참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거기서 빠지게 되면 뭐가 뭔지 모르니까 자꾸 자기주장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교회가 분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 되는 비결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함께 모이면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하나로 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아래 같이 모여서 꾸준히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기본입니다. 특히 지도자들이 하나가 되어야 교회도 하나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많거나 은사가 많거나 똑똑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일예배를 비롯해서 주중예배와 교회의 모든 공식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분들이 교회 리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여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는 참여하는 분들이 리더가 되어야 교회가 제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듣고 한 자녀가 되어서 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할 때 강력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나 있는 곳에 그들도 있게 하소서 (24절)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으로 하나 되고, 주님의 영광으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후에 두 번째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 기도는 처음 한 기도보다는 조금 더 나중을 내다보며 드리신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4절)
예수님의 기도의 요지는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계신 곳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그 영광에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된 신자들도 참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을 보전(보호)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믿는 자들을 끝까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보호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을 ‘내게 주신 자’, 즉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자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앞서 1장 11절에서는 ‘자기 땅, 자기 백성’이라고 불렀고, 10장에서는 ‘내 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왕이신 예수님, 목자이신 예수님께 주신 그분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이 책임지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영적 안전은 우리 자신보다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안전하게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유명한 말씀을 하시기 직전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3)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영원한 거처에 참여할 때 어떤 복을 누리게 됩니까?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라고 하신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최종 목표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에 세우신 하나님 나라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누리셨던 영광을 우리도 보고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을 보면서 ‘야, 참 영광스럽다.’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우리의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주님 안의 그 영광을 우리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3. 기도의 마무리 (25-26절)
예수님은 “하나 되게 하소서”, “나 있는 곳에 그들도 있게 하소서”라는 두 가지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자신의 사역을 총 정리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기도를 마무리하십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5절)
예수님은 여기서 먼저 자신의 사역을 요약하시는데,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를 “의로우신 아버지여” 하고 부르십니다. 11절에서 “거룩하신 아버지여”라고 부르신 것만큼이나 신약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표현입니다. 앞에서는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의를 실행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을 바라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자신은 맡겨주신 사역을 잘 감당했으니까 이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판단해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 결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과 하나님을 아시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임을 아는 제자들로 나누어집니다. 여기서도 ‘안다’라는 말을 ‘믿다’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다 순종하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그리스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결국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셨더라도 결과가 이렇게 갈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복음을 들고 나가 전하지만, 결과가 갈릴 수 있다는 겁니다. 아니, 갈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말씀을 전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몇 명이나 구원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주께 돌아올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맡겨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돌아가신 테레사 수녀가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어떤 기자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인도에서 이삼백 명쯤 되는 고아들을 돌본 것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데, 사실 어떤 기업 하나가 수천, 수만 명의 아이들이라도 도울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도 한 것으로 노벨평화상이라는 것을 받으니 미안한 마음은 없는가?” 그때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충성(신실)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성공이 아니라 충성(신실함, faithfulness)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시기 전에 ‘대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서 제자를 만들어라’, 즉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로 만들어라.’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명대로 해야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신실하게 계속 그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께 순종하겠다는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26절)
그간 예수님이 해오신 일은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신 일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인격이고 그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으면서도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게 하리니’ 하고 미래시제로 말씀하신 것은, 남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제자들과 또 그들을 통해 믿게 될 미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이 일은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이 아닙니까?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신 사역이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처럼 직접 하시는 게 아니라 바로 신자인 우리를 통해, 교회를 통해 그 일을 계속 감당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 안에 있고 예수님도 성도들 안에 있게 하려 한다고 하십니다(26b).
제자들과 이후에 믿는 신자들 즉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권능과 그분의 사랑을 알 때 두 가지 일이 벌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스도인들 안에도 있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도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신자들 안에 계신다는 것이 사실상 같은 겁니다.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말 아닙니까?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정점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한마디로 사랑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사랑의 사역입니다. 예배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해서 함께 모여 드리는 겁니다. 훈련도 마찬가지이고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전도와 선교는 정말 사랑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험한 세상에서 우리의 힘으로 살거나 우리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일, 그리하여 영생을 누리고 영광중에 사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나 같은 사람을 이런 영광 속에 살게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사랑입니까?
그 사랑의 사역이 바로 전도와 선교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듣기 전에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 영광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을 통하여 그 영광을 알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은 사랑의 사역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나가는 말]
교회를 통해 주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2천 년 전에도 기도하셨고, 오늘도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말씀과 영광을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고, 우리의 하나 됨을 통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가 하나 되어 주님의 제자답게, 성령의 성전답게 보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믿을 때 가능합니다. 말씀과 영광으로 살 때 가능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의지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 교회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교회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공동체, 말씀 공동체가 될 때 먼저는 우리 자신이 살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공동체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들이 일어나고 계속해서 제자를 만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로 계속해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