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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9일 성탄주일 연합예배
✦ 성탄절 메시지 ✦
“가장 높으신 분의 겸손한 탄생”
(누가복음 2장 1~7절)
[들어가는 말]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사람들은 샤핑하느라 분주하고, 또 상점들도 매출을 높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요즘에는 온라인 샤핑이 굉장히 활발해져서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상점들을 방문합니다.
이 근처에는 샤핑몰과 상점들이 아주 많기 때문에 Thanksgiving Day 다음 날인 Black Friday에도 그렇고 크리스마스 전 며칠 동안도 그렇고, 이 앞에 차가 엄청나게 몰립니다. 저희 집이 이 근처인데 앞길에 차가 너무 많아서 들어가기도 힘들고 나가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5분 걸리는 거리를 거의 한 시간 걸려서 갈 때도 있었습니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6일 남았기 때문에 이번 주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크리스마스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느라 바쁩니다. 직접 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주변에 보면 아주 화려하게 장식해놓은 집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인가 크리스마스 준비가 점점 더 일찍 시작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요즘은 추수감사절 직후부터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을 해놓는 집들이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10월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는 집들도 있는 것을 봅니다.
이전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굉장히 잔잔하고 조용했습니다. 한국에서 신앙생활 하셨던 분들은 ‘새벽송’도 있었는데 그때 얼마나 조용했습니까? 찬송부터 조용합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아기 잘도 잔다.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Sleep in heavenly peace.” 얼마나 잔잔하고 평화롭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요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Rockin’ around the Christmas tree”(크리스마스트리 옆에서 흔들어)나 “Grandma got run over by the reindeer”(할머니가 순록에게 치였어요) 같은 노래가 있는데 다 오래 된 노래들입니다.
오늘은 성탄주일이고 토요일이 성탄절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맞이하는 성탄절이기에, 더욱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1. 누구든지 사용하시는 하나님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1절)
여기 보면 요셉과 마리아에게 베들레헴으로 가라고 지시를 내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입니다. 그러니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이 사람이 BC 27년부터 AD 14년까지 로마 황제로 통치했는데, 그가 바로 첫 번째 로마 황제입니다. 그 전에는 황제가 없었고, 이 사람부터 황제가 시작된 겁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역사에 보면 유명한 악티움 해전(BC 31년)이 있는데, 그 전투에서 강력한 장군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누스인데, 황제로서 칙령을 내려 로마제국 내 모든 사람들에게 호적을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 옥타비아누스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로부터 자기 후계자로 지명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다들 우습게 봤습니다. 특히 안토니우스 같은 사람에 비해서 한참 경력이 모자란 사람이 옥타비아누스인데, 결국은 그가 승리를 거두고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누가의 이 기록은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읽은 분들이 계실 텐데, 일본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그 책에서 옥타비아누스 황제 때 있었던 인구조사를 다루면서 누가의 기록을 논리적으로 비판합니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 통치 시기에는 로마 전역에 세 번의 인구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BC 28년, BC 8년, AD 14년, 이렇게 세 번 있었다는 겁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서기 원년을 전후로 해서는 인구조사가 행해진 적이 없기 때문에 누가복음의 기록은 논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실제로 태어나신 해를 잘못 계산했습니다. 사실 원래는 원년이 있어야 하는데 원년도 없고, 그러면 최소 AD 1년이 되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BC 4년에서 5년 정도에 태어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헤롯대왕이 죽기 전에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헤롯대왕은 BC 4년에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전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이 BC 4-5년에 잘못 태어나신 게 아니고, 해를 계산한 사람들이 잘못 계산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어쨌든 시오노 나나미가 언급한 세 번의 인구조사는 사실 로마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당연히 로마 시민이 아니니까 그들에게 해당되는 인구조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누가복음에 언급된 ‘호적’이라는 것은 시오노 나나미가 언급한 세 번의 인구조사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금 부과를 목적으로 한 인구조사는 예수님의 탄생 전후로 행해진 적이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AD 5세기 교회역사가 오로시우스라는 사람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제국 각 지역의 남자들을 대상으로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고, 바로 그때 쯤에 예수님이 탄생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대인 1세기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도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은 기록을 이렇게 남기고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옥타비아누스 황제에게 호의를 나타내기 위해 모였을 때 바리새인 중 6,000명이 맹세를 거절했다.” 그러니까 인구조사를 위해서 유대인들이 모였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왕위에 오른 후 각 지역에서 충성 맹세 성격의 인구조사가 일어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호적’이었던 것입니다.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메시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남자아이들을 다 죽인 폭군 헤롯대왕을 왕으로 임명했고, 어느 정도 유대인들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나 메시야에 대해 전혀 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다스리는 로마제국의 이익을 위해서 황제의 칙령을 내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가 내린 이 영을 통해서 그는 메시아에 대해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도구로서 사용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2-4절)
2절에서 ‘구레뇨(Quirinius)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이 호적을 처음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 가지고도 말이 많습니다. 그것까지 다 설명하면 길지만, 역사적으로는 이러한 내용이 다 설명됩니다.
4절에 보면,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 즉 다윗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를 데리고 황제의 명령을 따라 호적을 하기 위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황제의 이 칙령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저 또 다른 인구조사를 하는 것이라고 여겨졌겠지만, 특히 유대인 지도자들과 헤롯은 황제에게 충성하기 위해 열심히 인구조사를 한 것이지만, 사실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똑같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때, 과거 역사도 마찬가지이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이 세상은 권력자, 부유한 자, 강한 자, 높은 지위를 가진 자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중요한 결정을 하고, 법을 만들고, 대법원에서 판결을 하고, 위정자들이 나라를 이끌어 갑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런 지도자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G7이라고 해서 가장 강력한 일곱 개 나라가 모여서 회의를 하고 많은 결정들을 내립니다.
그러나 그들을 포함해서, 그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데 사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용을 받는 겁니다. 이 세상 위정자들이 결정하는 일들을 보면, 가끔은 굉장히 이상한 결정들도 있고 저건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것들도 있지만, 그런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책을 많이 쓰고 한국 사람들도 좋아하는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 1898-1963)라는 분이 있는데, 영국의 지성인이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Oxford) 대학 교수로서 유명한 문학가였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는데, 아주 유명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든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등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의 글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고 지금도 그의 책들을 통해 감명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도록 해준 사람이 아주 뜻밖의 인물이었습니다. 루이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해준 사람은 전혀 그럴 뜻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에 대해 냉소적인 비신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T. D. 웰든(Weldon)인데, 아주 지적이고 냉소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웰든이 복음서를 변호하는 한 신학자의 글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 글을 읽으며 연구하다가, 한참 읽은 후 기가 막혀서 허공에 대고 자기 혼잣말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에이, 이런 허튼 소리 같으니라고! 하나님이 죽는다는 또 그 이야기를 하네. 마치 진짜 있었던 일처럼 말하는군.” 자기 혼자 외쳤습니다.
그런데 웰든이 무심코 내뱉은 이 말이 바로 그때 그의 옆에 있던 씨에스 루이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겁니다. 예수의 자기주장, 즉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주장이 정말 있었던 일이거나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가 처음 하게 된 것입니다. 그도 역시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반기독교적인 사람이 한 말을 듣고 당시 비신자였던 이 영국 최고의 지성인은 기독교를 혐오하던 사람에 의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신기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도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 악한 일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악을 일으키시는 것은 아니지만, 악한 일도 선으로 바꾸셔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저절로 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 안 보이는 데서 열심히 일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2.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초라한 탄생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의 나사렛으로부터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 두 곳 사이의 거리는 약 80마일 정도 됩니다. 갈릴리는 북쪽이고 베들레헴은 남쪽입니다. 요즘 같으면 한 시간 반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길도 험하고 걸어서 가기 때문에 최소 3일 이상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여행으로 아주 지쳤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특히 아무리 십대 소녀였더라도 만삭의 몸이었던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무리가 되는 여행이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5-7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보니까 그들이 머물 여관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마구간으로 갔고, 거기서 마리아는 첫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마구간이 어디냐, 진짜 마구간이었느냐는 등 여러 가지 말이 많지만, 오늘은 그것이 초점이 아니고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구세주, 그리스도)의 탄생은 엄청나게 기적적이거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너무 평범했고 초라했습니다.
아주 특별하고 존귀한 아기, 가장 높으신 분인 예수님의 탄생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었던 아주 평범한 탄생이었고, 평범하다 못해 아주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라면, 사실 어느 누구보다도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왔는데, 그 사람들은 당연히 왕으로 태어나신 분은 왕궁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 당시 왕인 헤롯대왕에게 온 겁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러 왔다.’ 당연히 왕궁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왔지만, 왕궁은커녕 정말 초라하고 형편없는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때 첫 아들을 낳은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이렇게 형편없고 추한 곳에서 아기를 낳고 싶은 부모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아기를 낳으신 분들은 이런 마구간의 구유에 아기를 낳으신 분은 하나도 없으실 줄 압니다.
옛날에는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초라한 방에서 낳거나 심지어 들에서 낳은 경우도 있는데, 일반적인 경우 누가 이런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습니까? 누가 말이나 소나 양의 여물통인 구유 같은 데에 무슨 아기를 올려놓습니까? 만약 그렇게 해야 된다면 정말 서러워서 엉엉 울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왕이시면서 그런 곳에 오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여러분, 지금 힘든 일이 있습니까?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습니까? 물론 코로나 상황 때문에도 힘들고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는 ‘아이고, 힘들다, 힘들어’ 또는 ‘아이고 죽겠다’라고 하는데, 이런 데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 힘든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아이고, 힘들어’가 아니라 ‘예수는 나의 힘이요!’를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힘이 나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또 옆에 있는 사람이 ‘아이고, 죽겠네’라고 하면 ‘예수는 너의 힘이요!’라고 해주십시오.
그런데 성경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불평하거나 스스로 처량해서 울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힘들고 서러워서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한 겁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마태복음 1장에서 천사를 통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메시아(구원자)를 낳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마리아도 누가복음 1장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물론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말도 안 된다고 거부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그것을 붙들고 순종했습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이 약속을 받아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어렵고 견디기 힘들었지만, 정말 서러웠지만, 주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들을 통하여 태어난 이 아기가 만왕의 왕이고 인류의 구원자라는 말씀을 확실히 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태어났어도 서럽지 않을 수 있었고 괴롭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언제나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시험들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 말씀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주님의 말씀을 붙들 때 우리도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어려움을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작게 보이게 하고, 어려움은 항상 확대해서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만듭니다.
안개가 끼면 얼마나 자욱하고 넓게 퍼져 있습니까? 그런데 열 블락 이상 꽉 채우고 있는 안개가 따지고 보면 물 한 컵의 반의반도 안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허망합니까? 우리도 문제가 있으면 그런 안개가 자욱한 것이 엄청나게 넓고 큰 것처럼 느끼는데, 실제로는 아주 작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주 작은 겁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어려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없고 형통하니까 ‘하나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물론 그것도 믿음이지만), 어려움이 있어도, 아주 힘들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붙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지금의 상황이 ‘야, 이건 아니다.’라고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이게 맞는다.’라고 하며 그분께 기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판단, 나의 능력, 나의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계기판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가끔 비행기 조종사들이 착시현상을 이기기 위해서 항상 계기판을 믿는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계기판을 잘못 보면 큰 사고가 나고 추락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하며 여러 가지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빙빙 돌기, 하늘로 솟았다 갑자기 확 떨어지기, 땅으로 떨어지다 급상승하기 등 아주 고난도의 훈련을 하고 있었고, 이제는 평행으로 가다가 갑자기 위로 솟구치는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이제 비행기 조종에 완전히 자신감이 붙어서 ‘야, 나는 이제 충분하다.’ 하며 가고 있는데, 계기판을 보니까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계기판이 고장 났다? 이건 말이 안 된다. 고장이 났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계기판이 가리키는 아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확 틀었습니다. 즉, 내려가라는 것을 확 올라갔습니다. 그래야 상승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에 그대로 추락했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행으로 갈 때 자기가 거꾸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기판은 아래로 가라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은 위였고, 자기는 위로 간다고 했는데 사실은 아래였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추락했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합니까, 아니면 내 생각을 의지합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이상합니다. 그래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건 내 생각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내가 옳은 게 아닙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뭔가 다른 것 같다면, 예를 들어 아까 언급한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의 경우와 같이 그것이 역사적으로 틀렸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자기가 모르는 것이지 성경이 틀린 게 아닙니다. 실제로 정확한 사실을 자기가 모르고 있으면서 성경이 틀렸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성경을 보다가 만약 이게 말이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은 ‘말씀의 삶’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뭐가 잘못되었고 뭐가 맞는지 알려드립니다.
내 생각을 의지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가는 엄청난 차이를 갖고 옵니다. 초점을 하나님의 약속에 맞추는가, 아니면 지금 나의 어려운 상황에 맞추는가, 이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성탄절은 마냥 우리가 선물을 주고받고 기뻐하고 파티 하는 때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성탄절은 상식과 경험과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며 나아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이루어진 그 사건이 바로 지금 나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그런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지금 우리들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바로 그런 일이 우리를 통해서도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상황을 보면 여전히 좋지 못하고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을 통하여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