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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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반부에 인터넷이 갑자기 끊어짐에 따라 온라인 예배를 다시 시작해서 두 개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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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6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41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25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람들이 누구십니까? 대개는 가장 먼저 가족이 떠오를 겁니다. 또는 친한 교회 성도님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공동체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또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도들에게 임하게 하셨을 때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를 깨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사람이 내 배우자가 아니라면, 내 자녀가 아니라면, 내 부모님이 아니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까? 또한 지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신앙생활에도 역시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묶어주신 공동체의 지체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까?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하기는 하는데 어떤 사랑을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집착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안식월 때 프랑스 파리를 갔는데 당시 12살이던 아들이 군사박물관을 가보겠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 건물 안에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데, 거기 유언이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나의 유골이 세느 강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 한가운데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을 사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사랑한 게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청년들을 죽였고,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억지로 전쟁터에 끌고 가서 러시아로 데려갔다가 얼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처럼 자신의 정복욕을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서도 승리의 영광을 자기 가족들에게 돌렸고, 또 정복한 나라의 왕의 자리도 다 자기 가족들에게 주었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철저히 그의 야심을 성취하는 도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국민을 ‘그토록 사랑했다’고 말했습니다.
독일 나치 정권의 아돌프 히틀러도 연설할 때마다 ‘나는 독일을 사랑합니다. 게르만 민족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유대인들을 비롯한 많은 다른 민족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게르만 민족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진짜 사랑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그런 식의 사랑이 많은 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중심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일 뿐입니다. 자기만족만을 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상처를 주고받고, 심하면 다른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1.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양을 먹일 수 있다
1) 회복을 위한 세 번의 같은 질문
지난번 본문과 연결되어,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셨는데, 제자들이 고기를 잡지 못하던 것을 잡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같이 하는데 식사 내내 제자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이 피워 놓으신 숯불을 보았을 때, 자기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가 숯불을 쬐고 있던 장면이 그대로 생각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두 사람만 알고 있는 그날 밤의 일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그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자기는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향해 열심히 달려갔지만,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다가 ‘주님이시다’라는 말에 바다에 뛰어내려 예수님께 왔지만, 방금 잡은 생선을 가장 빨리 예수께 갖다 드렸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는 풀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까 아무리 맛있는 밥을 먹어도 맛을 못 느끼고, 아무리 즐거운 프로그램을 봐도 재미가 없고, 잠을 실컷 잔 것 같은데도 영 찌뿌둥합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문제를 풀고 싶었지만 풀 수가 없었습니다. 풀 능력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저녁에 오셨고, 그때 도마가 없어서 일주일 후에 한 번 더 나타나셨지만, 그때 말을 못했습니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문제를 풀도록, 그래서 그가 회복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자신이 주님을 부인했던 자리인 숯불 앞에서 하나님의 신뢰를 회복하는 역사가 이제 베드로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15절 상)
예수님이 세 번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데, 마지막 질문이 ‘시몬아’라고 부르시면서 ‘네가 나를 정말로 믿느냐?’라고 하신 게 아니라, 또는 ‘네가 나를 잘 아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베드로는 이전에 분명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 따르며 고백했던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이었느냐는 겁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그분을 따라다녀야 그분이 왕이 되시면 그분 밑에서 높은 자리를 하나 차지하니까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베드로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던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리더라고 으스댔던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었는데, 이 순간 예수님이 물어보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이제 너 자신을 향한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포기했느냐?’라고 물어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던 순간에도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이 잡혀가신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거기까지 따라갔습니까? 사랑하지 않았으면 따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여종의 질문에도 버티지 못할 만큼의 사랑이라면 그것이 어떤 사랑이란 말입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첫 번째 질문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늘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버리고 떠나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자신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과 행동부터 앞섰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앞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제자가 뭘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14:15)라고 하셨고, 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14:21)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말로만 ‘사랑합니다’ 한다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15절 중)
베드로는 ‘예, 저는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다만 주님을 사랑한다고만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칭찬도 책망도 하지 않으시고 한 가지 명령만 하십니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절 하)
이것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며, 그의 사랑 고백을 믿어주시고 그를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주님의 양을 먹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양이 자기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임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가끔 보면 목회자를 목자라고 하고 성도들을 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래서 ‘내 양’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양’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방식대로 양에게 풀을 먹이면 안 되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을 먹이면 안 됩니다. 주님이 선택하신 것을 먹여야 합니다. 인간 목자는 먼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라서 양을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 같은 목자, 즉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목자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말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죽을 때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베드로가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말로만 큰소리치지 말고 너 자신을 희생하여 내 양을 먹이는 목자가 될 때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을 수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한마디로 말해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강하게 윽박지르는 게 아니라 먼저 본을 보이는 목자, 더러운 이득을 얻기 위해 주님의 양을 이용하지 않는 목자, 약함으로 주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목자, 이 땅에서 시들어버리는 거짓 영광을 구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목자가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 영광의 상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편지를 썼습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보십시오. 양 무리에게 본이 되라고 다른 교회 지도자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리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지 말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지도자들에게 권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6절)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데, 두 번째로 물으실 때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생략하십니다.
우리가 남들과 비교할 때는 대답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아주 형편없이 살지 않고 어느 정도 괜찮게 살면 남과 비교하며 ‘예, 저는 괜찮지요.’라고 대답하기 쉽습니다. ‘내 사랑이 아주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지.’라고 비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합리화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를 통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 질문을 하면 그런 말을 합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 것 같습니까, 지옥에 갈 것 같습니까?’라고 물으면 ‘천국에는 못 갈지 몰라도 지옥에는 안 갈 것 같습니다. 남을 해친 적도 없고 살인, 강도, 사기 등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 테러리스트나 범죄자를 보십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어느 정도 괜찮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이 정도면 됐지.’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위로하는데, 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과는 비교하지 않습니까? 왜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만 비교합니까?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착하니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스스로 자꾸 합리화합니다. 비교를 해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지, 자기보다 나은 사람, 더 착한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다툼과 갈등이 일어날 때,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실 교횡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는 목회자와 직분자들이 가장 갈등의 중심에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뭘 몰라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잘 알아서 그렇습니다. 교만 때문입니다. 결국은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 내가 더 뛰어나다. 내 생각이 옳다. 내 힘으로 된 거다.’라는 교만이 다툼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통해야 하는 것은 누가 실력이 더 좋으냐,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느냐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와 믿음의 원리만 있어야 합니다.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닥터이신 분들이라고 ‘닥터 아무개’, ‘프로페서 아무개’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의 직분이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로, 권사, 집사 등 좋은 직분이 많은데 왜 그런 걸로 부릅니까? 또 성도가 그런 것보다 더 높습니다.
그런데 자꾸 세상의 직위에 따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불러야 합니다.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면 ‘어이, 김 학사!’ 또 석사를 받은 사람에게는 ‘어이, 이 석사!’라고 불러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전부 타이틀 따라 불러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통하는 것은 사랑과 은혜와 믿음의 원리이어야지, 세상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런 생각에 포함된 것은 남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인데, 남을 나보다 낮게가 아니라 낫게 여기는 겸손에서 귀한 신앙생활이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잘 알지 못하는 우둔한 사람이라는 겸손한 고백에서부터 사랑과 은혜와 믿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런 비교의 잣대를 버리고, 즉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라는 식을 버리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냐? 그것을 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이번에도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에서 ‘내 양으로’ 바뀌었고, ‘먹이라’에서 ‘치라’로 단어가 조금 바뀌었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농담으로 ‘치라’ 했으니까 진짜 쳐 주고 때려줘야 한다고 말하는데, 전혀 맞지 않습니다. 농담일 뿐이지 뜻이 똑같습니다. 조금 더 광범위할 뿐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7절)
예수님은 두 번의 대답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세 번째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하시니까 ‘내 대답을 완전히 믿지 않으시는구나’ 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근심합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 질문을 받고 근심할 때 왜 예수님이 지금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는지 그 의도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예수님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려 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건은 그가 그냥 묻어 두고 싶은 일입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자기가 부인한 것을 숨기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도 모른 척해주면 좋겠다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숨기고 싶은 일을 예수님이 드러내려고 하시는 것을 알고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사랑은 아주 작은 사랑일 뿐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자기가 부인한 것을 다 아신다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을 다 아시는데도 저는 주님을 사랑하는데, 그러니까 제 사랑은 작은 사랑입니다. 부족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로 이렇게 겸손한 사랑입니다. 돈이나 건물이나 유능함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기 사랑이 인정받지 않거나 자기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부인해버리는 베드로가 아니라, ‘주님, 저는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지만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통해 교회를 세우시게 됩니다.
베드로와 같이 그렇게 겸손한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 지금도 주님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양을 먹이고 칠 사람은 바로 그러한 겸손한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가 언제든지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며 고백하는, 그러면서도 주님을 향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십니다.
사실 사역자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늘 스스로 감탄하는 것은 ‘아니,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계속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역을 하는가?’ 사실 매주 30-40분 가만히 들어주는 이런 데가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을 제가 계속 할 수 있습니까?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사역자들도 ‘내가 잘났으니까 이런 것을 하지.’라고 하는 분은 없으실 줄 압니다. 다 자기가 부족한 것을 압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 직분을 받은 것이나, 목자 목녀를 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이런 걸 할 수 있는가? 당연히 못하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르시니까 제가 감당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겸손하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사실 예수님은 앞의 두 번은 ‘네가 나를 아가페로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제가 필리아로 사랑합니다.’라고 친구간의 우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로 물으실 때는 ‘네가 나를 필리아로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예, 필리아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고 필리아는 친구 간의 우정과 사랑을 주로 의미하지만, 예수님이 처음에는 조건 없는 아기페로 사랑하느냐고 하셨더니 필리아로 사랑한다고 해서 세 번째는 낮춰주셔서 필리아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아가페냐 필리아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세 번의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떠올려주시기 위해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베드로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며 주님 앞에서 고백을 했다는 것, 그러면서도 자기의 사랑을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회개를 한 사람에게만 합당한 사명을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2)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배신으로 사실 스스로 그 마음에 얼마나 상처로 남아 있었겠습니까?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친히 찾아오셨고, 앞의 두 번에 제대로 고백을 못하니까 세 번째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되풀이해서 물으시면서 세 번 부인했던 그가 세 번 사랑한다고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슴에 꽉 차 있던 상처를 치유해주시고 그를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이게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나중에 그토록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이 오히려 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회를 주니까 그때부터 그 사람이 아주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기회를 준 다음에도 그 기회를 통해 바로 서는 것이 금방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때까지는 내 속이 상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가리켜 소위 ‘사랑 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랑의 속성으로 가장 처음 뭐가 나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 여기서 ‘오래 참는다’는 말에는 ‘나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기회를 주면서 오래 참는 것은 내가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사랑을 입은 나도 다른 사람에게 오래 참으면서 기회를 줄 때, 그래서 나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줄 때, 반드시 부활의 역사,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기회를 주었더니 속을 긁어 놓습니까? 사랑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기회를 주기 때문에 내 속이 상할 수 있습니다. 속이 상하다면 제대로 가고 계신 겁니다. 기회를 주었는데도 속이 상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희생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회를 받은 사람들인데도 기회를 베풀줄 모른다면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없겠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배신한 사람에게까지도 기회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그런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지금 내 마음속에 배신의 못을 박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관계를 끊어버려야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요즘은 SNS에서 이상하게 구는 사람은 친구에서 끊어버리는 게 쉽다 보니까 실제 관계도 그런 식으로 막 끊어버리는 것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볼 수도 있고 억지로 웃을 수도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지워버리고 제쳐버리고 교류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회를 다시 주면 내 속이 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상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배신자였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처절히 고통을 당하며 상하셨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리시는 역사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2. 각자 다른 사명을 주신다 (18~25절)
1) 베드로의 사명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8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는 말은, 베드로가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사실은 자기를 위한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는 말씀은 그 당시 통용되던 속담인데, 이것은 남이 옷을 입혀 주고, 해야 할 일을 정해 주고, 가야 할 곳으로 데리고 가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베드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원래 속담에는 ‘네 팔을 벌리리니’라는 표현은 없는데, 이 말은 노인의 무기력함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려는 체념의 몸짓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팔을 벌린다는 것은 로마시대의 십자가형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처형당했다고 교회 전승에 전해집니다.
띠를 띠운다는 표현 역시 십자가에 팔을 묶는 행동을 암시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묶여서 복음의 신실한 증인으로 자기가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끌려갈 것이며, 예수님이 당하신 죽음을 그도 맞이하게 될 것을 암시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9절)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라는 겁니다. 죽기까지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은 “나를 사랑하라. 내 양을 먹이고 치라. 선한 목자가 되라.”라는 말씀입니다.
2) 요한의 사명
예수님이 제자들과 교회에게 남겨주신 사명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증언의 사명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런데 목양의 사명을 위해서 베드로를 준비시키셨듯이, 증언의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 동안 다른 한 제자를 준비시키고 계셨는데, 그는 바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입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0-21절)
‘주님이 사랑하시는 저 제자도 저처럼 주님을 위해 죽게 되는 겁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퉁명스럽게 보이고, 듣기에 따라서는 가벼운 책망 같게도 들립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2절)
그 제자는 죽지 않고 있을 수도 있고 일찍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베드로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야, 이것은 네가 관심을 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다. 너에게는 하나의 의무만 있다.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사명이 있고, 요한이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베드로는 목자와 설교자와 교회의 증인이 되며 결국 순교자가 됩니다. 반면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느라 숨어 다니며 나중에 오래 살았지만, 교회 지도자와 예언자가 되었고 또 신실한 작가가 되어 요한복음, 요한1, 2, 3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살다 죽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각자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한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나를 따르라!” 따르는 모습은 다릅니다. 그런데 따르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의 초점은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속해야 하고, 그분께만 책임을 져야 하며, 그분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으로 다른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나가자 오해가 생깁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3절)
그 제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설령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하고 가정하신 것 뿐인데, 제자들은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전해 듣고 오해한 것입니다. 악한 의도는 없었겠지만 본의 아니게 요즘 말로 ‘가짜뉴스’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약 그 제자가 죽지 않게 되든지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그것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결정하실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양을 돌봄과 희생을 통해서 나타난다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사랑은 신실한 기록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인데, 요한이 쓴 글들을 보면 그는 아주 지적으로 예민한 사상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서론을 보면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모든 상황을 다 목격했던 제자인 요한은 지성과 통찰력과 감수성을 겸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의 일을 기록한 것은 아주 신뢰할 만하다는 겁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4절)
여기서 ‘우리’는 요한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일 수도 있고, 그가 섬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그의 기록을 토대로 이 책을 최종적으로 묶으면서 마지막 언급을 여기에 쓴 겁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5절)
이것은 과장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이 과장법을 잘 씁니다. 시편에도 보십시오. ‘눈물이 너무 많이 흘러서 침대가 둥둥 떠다닙니다.’라는 식의 과장법을 씁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더라도 우리 지식과 교리의 한계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가는 말]
마지막으로 정리해보면, 요한복음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겠다는 약속으로 시작되었습니다(1:12). 그런데 이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질문과 “나를 따르라”, “내 양을 먹이라”라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입어 영생을 얻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라고 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사랑 없이는 그 누구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질문을 드립니다. 우리의 참 행복은 어디에 달려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진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돈이나 내가 소유한 어떤 것도 진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줄 수 있지만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비싼 옷을 입거나 고급 음식을 먹거나 유명한 곳을 여행한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작은 회사에서 크고 유명한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사업체가 번성해서 큰 사이즈로 옮기고 매출이 두 배, 세 배 올랐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던 학교에 합격하거나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 잡아 엄청난 연봉을 받는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행복해집니까? 참된 행복, 영원한 행복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명령대로 사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때 행복해집니다. 누가 내게 못되게 할 때 확 끊어버리면 행복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고 속이 상해도 오히려 품어주고 기회를 줄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신자인 우리를 품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수준이 낮은 우리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끌어 올려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우리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행복과 기쁨과 평안, 그리고 주님의 이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