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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1일 수요예배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7 ✦
부활 신앙
(고린도전서 15장 12~20절)
1.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주의 신학에는 ‘변증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변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폴로기아’(apologia)라는 단어인데, 여기에서 변증론을 뜻하는 영어 ‘Apologetics’가 나왔습니다.
‘변증론’은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변증론’이라는 용어 때문에 조금은 오해를 받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변증론’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것 같아서 ‘변증’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골치가 아프고, 특히 일반 성도에게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게 한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변증’이라는 말 가운데 자꾸 ‘변명’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신앙을 변호하는 것이지만 뭔가 자기 입장을 설명하는 데 있어 아주 방어적인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Apologetics’의 어근이 ‘apology’, 즉 ‘사과’라는 뜻의 단어이다 보니까, 변증이라고 하면 왠지 사과하거나 사죄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매달리는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변증론’은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신학뿐 아니라 신앙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기독교 변증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모두 변증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변증론의 근거가 되는 핵심 구절이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
이것은 일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다 ‘기독교 변증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 ‘변증의 방법’에 대한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입니다. 많은 신학자가 기독교 변증론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그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내리는 결론은 바로 ‘변증은 말이 아니라 삶이고, 그 사람 자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과학자이고 신학자이자 영국 성공회 사제로서, 박사 학위를 세 개(과학, 신학, 역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는 이 시대의 복음주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책을 정말 많이 썼는데 한국어로도 많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중 <기독교 변증>(국제제자훈련원 역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Mere Apologetics>로서, 직역하면 ‘순수한 변증론’ 정도가 될 것입니다. 풀어서 말하면, ‘변증론이면 충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책에는 ‘변증의 6단계’가 나옵니다.
1단계: 신앙을 이해하라
2단계: 청중을 이해하라
3단계: 명쾌하게 전달하라
4단계: 접촉점을 찾아라
5단계: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라
6단계: 실천하고 실천하고 실천하라
맥그래스가 말한 ‘변증의 6단계’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입니다. 기독교 변증은 결코 말로만,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믿음, 내가 받은 은혜, 내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이 모든 것을 ‘나’라는 존재가 삶 속에서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변증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신경’은 기독교 변증론의 핵심이며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가장 먼저 고백했고, 초대 교회와 그 이후 시대의 교회가 고백했으며, 그것을 우리도 똑같이 붙들고 고백하면서 사도들이 보여 준 그 참된 신앙의 길로 함께 가는 그 자체가 변증론과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을 기독교 변증론의 핵심이라고 할 때 그중에서 또 핵심은 바로 오늘 살펴보는 이 신앙 고백입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렇습니다. 기독교 변증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부활 신앙입니다. 사도행전에도 나오지만, 사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는 언제나 그 핵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초대 교회에서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의 기준을 보면 그것이 잘 나와 있습니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1:21-22)
이것을 보면, 사도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외칠 때의 핵심 메시지는 바로 ‘예수는 부활하셨고 우리가 그 증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대 교회 당시 복음을 박해하던 자들이 가장 싫어한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행 4:1-2)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가장 강조했던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고, 대적들과 가장 많이 논쟁했던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 때부터 기독교 변증론의 최대 핵심 이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신앙의 대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2.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던 부활에 대한 공격들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가설들을 주장했습니다. 그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1) 기절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했는데, 죽은 줄 알고 무덤에 장사를 지냈더니,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무덤이 밤에는 아주 싸늘해져서 그 한기에 재채기를 하며 깨어났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보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서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혹시 살아 있었으면 즉시 다리를 꺾어 죽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기절설을 주장한 사람은 로마의 십자가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로마의 십자가 처형은 정말 무시무시해서 가장 최악의 고통을 가장 오랫동안 받게 하고 죽이는 형벌입니다. 역사 기록에 보면 로마의 십자가에서 살아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정말 만에 하나 죽은 게 아니라 살아서 기절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수의를 그렇게 단단히 묶어 놓으면 살아 있던 자도 죽게 됩니다.
2) 혼동설
새벽에 어두워서 예수님의 무덤을 잘못 알고 다른 무덤과 혼동하여 그리로 갔는데 그 무덤이 비어 있어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퍼뜨렸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공동묘지가 아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기 개인의 새 무덤을 드린 것입니다. 그곳은 갈보리 언덕 바로 근처에 있어서 잘못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3) 도난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가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에 보면 종교지도자들이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그렇게 헛소문을 퍼뜨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실 때 두려워서 도망쳤던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하나가 되어 그리도 용감하게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로마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시신을 훔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게다가 시신을 훔쳐 가면서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 수건을 벗겨서 차곡차곡 개켜 놓고 갔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됩니다.
무엇보다 시신을 훔쳐 간 것이라면, 그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 삶과 목숨을 건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거짓을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4) 환상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거기에 너무 몰두하면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며 부활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사실인 것처럼 퍼뜨렸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똑같은 환상에 빠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심지어 도마처럼 만져 보기까지 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반박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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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당시 이런 식으로 부활에 대하여 집요한 반박과 공격이 대적들로부터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적들은 왜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공격했던 것입니까? 언뜻 생각하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이야기를 인간의 상식과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에 부활을 부정하며 공격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동정녀 탄생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역사 전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것보다 특히 부활에 대해 그렇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기독교 변증론의 최고 대가인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해 변증하면서 그에 대한 답을 줍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2-14절)
그렇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면 바로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과 우리의 믿음이 다 ‘헛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그 한 가지가 우리의 신앙 전체를 다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대적들은 그렇게 집요한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말에 미혹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부활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17-19절)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참믿음으로 온전히 승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영적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어떻게 부활의 진리를 지킬 것인가
조금 전 부활을 부정하며 반박하는 주장들을 살피면서도 느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과 말로 맞서 싸워서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소위 인간의 논리와 이성과 상식은 바로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그런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은 기적이고 역사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부터 부활에 대한 변증에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진술과 증언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주로 두 가지를 가지고 부활에 대하여 변증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계속해야 하는 부활에 대한 변증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포하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0절)
이것은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에 대한 첫 번째 변증은 주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분명히 보았고, 확실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엄청난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고 다른 식으로 전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문서나 객관적인 증거를 남기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체험했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은 빈 무덤을 확인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살아 계신 주님의 음성을 통해 무너졌던 마음이 다시 회복되었고, 그래서 도망가던 삶에서 돌이켜 돌아온 역사가 있었는데 다른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논증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그분이 살아나셨다고, 자기들이 증인이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도들의 고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동일하게 고백하는 것이 모든 믿음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부활 변증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나는 그분이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습니다.’라는 이 고백이 바로 부활 변증에 해당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 사도들의 부활 변증을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믿음을 헛것으로 만들려고 교활한 이성과 세상 논리와 과학이라는 편협하고 구부러진 잣대를 가지고 공격해 오는 대적들에 맞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반지성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일반적인 지식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고백은 그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2)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라
첫 번째보다 훨씬 강력한 부활의 변증은 바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대적들이 아무리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반박하려 해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아주 강력한 변증은 부활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하겠습니까?
어떻게 실패했던 마음이 충만한 능력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낙심하고 무너졌던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도망자가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새 생명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신앙은 한마디로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 부활 신앙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삶이 부활을 위한 최고의 변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부활에 대한 믿음의 선포는 곧 부활 신앙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되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삶의 모든 십자가와 죽음과 장사 지낸 것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소망과 생명과 감사와 기쁨을 회복하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가능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보여 준 부활 신앙이고, 이것이 사도들이 했던 신앙 고백을 동일하게 고백하는 가운데 우리도 가지고 누리는 동일한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이 부활 신앙을 선포하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부활 변증의 결정타가 됩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세상의 논리와 인간적인 판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고 반박하며 흔들어대는 대적들을 향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한 그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웃긴다고 하고 말이 되느냐고 하며 조롱하고 비판하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 신념이 있는데 신념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조롱하는 이들도 자기 신념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가졌다고 고백하는데, 보니까 진짜 믿는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그것을 볼 때 그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를 보며 겉으로는 조롱할지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충격을 받고 그러한 우리를 통해서 도전받고 마음이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경험했던 놀라운 부활 능력의 역사가, 바로 오늘 동일한 부활 신앙을 선포하며 나아가는 우리에게도 충만하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