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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24일 수요예배

나는 믿는다 사도신경 6

우리가 믿는 고난의 십자가

(고린도전서 118~24)

 

[들어가는 말]

 

LA의 어느 교회 주일예배 때 방문자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방문자 카드를 쓰면서 단순 방문이라고 표기했기에 목사님이 궁금해서 오늘 어떻게 오셨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대답하기를, 자기는 애리조나에 사는데 LA에 방문했다가 주일이 되어서 친구의 추천으로 이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목사는 아니지만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 교회에 와 보니 정말 좋은 교회인 것 같다고, 사업상 LA 출장이 많은데 주일이 낄 때마다 예배는 꼭 여기에 와서 드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분이 그다음에 한 이야기가 문제였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이 교회 예배가 정말 좋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예배 순서에 사도신경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신경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그 짧은 시간에 설명하는데, 나름대로 그쪽 분야에서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음모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은 웬만하면 다른 사람의 말을 중간에 잘 자르지 않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그냥 들어 주면 마치 자기가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여서 교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이 갈까 봐 중간에 말을 자르고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사도신경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예배 중에 고백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순서상 꼭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안 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신경의 신앙 고백에 그대로 동의합니다. 몇몇 표현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근본적인 의미로 본다면 그 모든 것은 다 성경적인 신앙의 고백입니다.”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그 목사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나중에 고백했습니다. 물론 그분은 그 뒤로 두 번 다시 그 교회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 교회 주일예배 때 사도신경순서가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에 문제가 있다고 하고, 사도신경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사도신경이 성도들의 영혼을 노략질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주 교활한 의도가 있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신경에 나온 이런저런 표현을 파헤치면서 신학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합니다.

 

한 예로, 앞에서 살폈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내용이나 거룩한 공교회같은 표현이 그것입니다. 특히 공교회가 라틴어로 가톨릭인 것을 말하면서 이것이 바로 로마가톨릭이 사람들을 장악하려고 만든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왜곡된 관점에서 바라본 잘못된 해석입니다.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보면 사도신경은 잘못된 신앙 고백이 아니라, 너무나 성경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1.   본디오 빌라도와 예수님의 고난

 

그런데 사도신경 가운데 이런 부정적인 의도의 논란이나 신학적인 해석에 있어서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논란이 아닌, 아주 합리적인 의구심을 자아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왜 굳이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을 언급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실명을 그대로 언급했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볼 때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당하셨지, 빌라도의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복음서에 보면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한 것으로 나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는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님을 옳은 사람’(27:19)이라고까지 하면서 상관하지 말도록 당부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빌라도가 손까지 씻으며 자기는 결백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7:24-25)

 

이런 것만 보아도,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합리적인 의문인데, 여기에 어떻게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1)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맞다

 

1세기 당시에는 유대인의 유월절 때 총독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요구하므로,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놓아주자는 뜻을 비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당시 죄수로 잡혀 있던 사람이 예수님과 바라바였는데, 바라바는 강도였고(18:40), 살인자였으며, 민란을 일으킨 자였습니다(23:19). 그는 당시 로마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운동을 벌이던 유대인 열심당원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놓아달라고 외쳤습니다.

 

바라바는 로마 정부에 대항해 싸운 투사이고, 반란을 일으키며 싸운 민족의 영웅입니다. 반면, 예수는 너무 부드럽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원수도 사랑하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될 줄 알았는데 너무나 무기력하게 체포된 예수보다, 강하고 투쟁적인 바라바가 더 매력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놓아주려고 굉장히 애를 썼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무죄를 선포하며 놓아주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는데, 예수님이 빌라도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왜 그렇게 힘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쓴 것은, 그가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그랬거나 진리에 따라 행동하려고 해서 그랬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빌라도는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바라바가 풀려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다른 폭동이나 요인 암살이나 로마 군인 습격이 일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치안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빌라도 자신의 총독 자리가 위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렇게 위험 부담이 있는 바라바 대신, 전혀 위험하지 않은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애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흥분해서 큰 소리로 외치며 소동을 일으킵니다.

만약 민란이 일어나게 되면 그 때문에 자신의 총독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스스로 왕이라고 하는 자를 놓아주면 황제의 충신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황제 밖에는 왕이 없다.’라고까지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것을 본 빌라도는 자기의 입장을 180도 바꿉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켜 주려고,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다음에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넘겨주었다.” (마가복음 15:15, 새번역)

 

그는 예수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아무런 죄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를 그들에게 내어줌으로써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는 아주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임을 보여 줍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로 옆에 두고도 빌라도는 진리를 아는 데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정치적 출세와 성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빌라도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했고, 예수를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우리가 매주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주 옳은 일입니다.

 

 

2)  예수님은 세상 나라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또한 알아야 할 것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구절은 본디오 빌라도라는 개인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내용은 결코 마리아를 돋보이게 하는 신앙 고백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초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결코 사람을 신앙의 모델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내용 역시 사실은 빌라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빌라도가 초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고백하며 우리도 마리아처럼 좋은 신앙인이 되자고 하는 뜻이 아닌 것처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도 빌라도처럼 하면 안 된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표현을 라틴어 원문으로 보면 번역이 잘못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아라고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라는 한 개인에게 고난당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 아니라, 본디오 빌라도라는 통치자가 있던 시대와 상황 가운데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는 개인의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 당시의 세상 나라를 상징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의 정치적 이득에 따라 먼저는 바라바 대신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쓰다가 사람들이 난리를 치며 민란이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보고 또 다시 자기의 정치적 이득을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사람입니다. 아주 비열하고 비겁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정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고백에는 단지 빌라도 개인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의미를 넘어, 당시 빌라도가 통치자로 있던 시대에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2.   고난의 고백에 담긴 영적인 의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것은 곧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도신경의 네 번째 신앙 고백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고백을 하면서 우리는 어떤 영적인 역사를 경험하고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이 고백 안에는 정말 중요한 영적 의미와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중요한 영적 역사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는 실제다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36년에 유대 총독을 지낸 실존 인물입니다. 보통 유대 총독 재임 기간이 5~6년인데, 이 사람은 아첨도 잘하고 수완이 좋아서 10년이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겠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했는데, 그 후 몇 년 못 갔습니다. 진리를 희생하고 자기가 권력을 유지하겠다고 했지만 5~6년 정도밖에 더 못 갔습니다.

 

그는 잔인한 총독이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 때문에 그동안 로마에서 지켜보다가 드디어 그를 소환합니다. 로마 소환은 곧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는 말이기 때문에 그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자살하라고 시켰다는 말도 있고 스스로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그의 유골을 로마의 테베레 강에 던졌는데, 그 후부터 강이 자꾸 범람하여 그의 뼈를 수습해다가 저 멀리 스위스(당시 변방) 어느 산꼭대기에 있는 호수에 던졌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번개가 치고 용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완전히 전설입니다. 계속 날씨가 안 좋아서 16세기에 성직자들이 올라가서 그 호수를 메우고는 예배했더니 나쁜 날씨가 사라졌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그 산이 바로 지금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필라투스’(Pilatus) 산입니다. 필라투스가 바로 빌라도의 라틴어식 이름입니다. 지금은 산 이름으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초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자기 권력을 지키려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었는데, 몇 년 가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 버리고 지금은 산 이름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스위스에 가서 필라투스 산에 가시게 되면 빌라도의 허무함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권력을 지키려 해도 이렇게 허무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빌라도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처형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분명히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가져온 이단이 바로 영지주의’(靈知主義)입니다. 이들은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기 때문에 성자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육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가현설’(假現說)로 설명합니다. 성자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환상이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실제가 아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영적으로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실제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식으로 깨달아 아는 것, 그래서 육신의 세계를 초월한 영적인 역사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의 득도’(得度)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닌 거짓이기 때문에도 문제이지만, 현실적인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도 주지 못하는 일종의 현실 도피인 것은 더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어떤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일이 아니라,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 현실 속에서의 고난과 죽음을 실제로 이기는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환상은 더더욱 아니며, 신비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무슨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실제적인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지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 , 육을 포함한 전인적인 것이며, 구원도 단지 영적인 것만이 아닌 우리의 삶과 존재의 모든 것이 회복되고 구원받는 은혜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신앙 고백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잘 쓰는 표현 그대로 레알’(real)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이 그 십자가를 통해 받는 구원 역시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바로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참 믿음의 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도신경의 네 번째 신앙 고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 즉 세상 나라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패배의 인정이나, 고통스러운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참된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 세상 앞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다 들으라고 외치는 신앙 고백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영적 진리와 믿음의 역사를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참 신앙은 이렇게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라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전능자이자 하나님이신 분이 기꺼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렇게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것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또한 단호하고 결연하게 믿음으로 고백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혹시 속이는 자가 와서 그렇지 않다고,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것은 문제가 있다고 속삭여도 전혀 흔들리지 않으면서 그렇지 않다. 고난의 십자가, 그것이 바로 참신앙의 길이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이 십자가 신앙의 핵심을 가장 잘 붙들고 선포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이 사실을 붙든 채 현실의 고난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참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진짜 제자였습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2-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라는 말은 언뜻 황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은 말도 안 된다고 하며 조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임을 확신하면서 선포하는 바로 이 고백이야말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믿음의 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고난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을 가며 신실하게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잘 섬기는데도 일이 잘 안 풀리고 오히려 삶에 고난이 오고 실패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창피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영광이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정죄와 사람들의 비난을 겁내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잘 믿고 열심히 봉사도 하지만 일이 잘 안 풀리네.’라며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에 겁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죄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 즉 세상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신앙 고백으로 당당하게 선포하는 믿음의 사람답게 힘 있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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