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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일 수요예배
✦ 나는 믿는다 – 사도신경 3 ✦
천지의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
(열왕기하 19장 14~19절)
1. 창조주를 고백하는 신앙의 중요성
성경 전체의 시작인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로 시작합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1-2)
신학교 때 교수님이 이 부분을 설명하시면서, 이 말씀은 창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는 내용이라고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 이 말씀을 읽을 때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혼돈, 공허, 흑암, 깊음’이 창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하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2절이 창조 이전을 묘사한 것이라면,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분명히 1절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이미 선포했는데, 2절에 다시 창조 이전 모습이 나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일반적인 내용은 그냥 읽고 넘어가도 괜찮겠지만, 이런 부분은 좀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생각을 조금만 해보면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문을 가지고 답을 찾아나가면서 참된 성경 지식이 쌓이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일종의 제목입니다. 그러니까 신문으로 치면 ‘헤드라인’(headline)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선포하는 1절은 성경 전체의 헤드라인이기도 하고,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아주 간단하지만 분명하고 단호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고백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신경에서 열두 개의 ‘나는 믿는다’의 고백 가운데 그 첫 번째로 성부 하나님에 대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이어서 ‘천지의 창조주’를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인정하는 대로, 사도신경은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한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은 단지 성경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 교리를 요약한 정도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압축하고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순서까지도 성경과 똑같이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로 시작합니다. 그만큼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영적으로 가장 많은 해악을 끼친 것 중 하나가 바로 ‘진화론’입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사실을 부정했다는 면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세상의 모든 방향을 다 망가뜨리는 타락과 죄악을 가져왔다는 면에서 아주 심각한 영적 해악을 끼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자 이 땅의 시민으로서 ‘진화’와 ‘진화 이론’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화는 과학이고 진화론은 이론이라는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해악을 가져온 것은 진화 그 자체가 아니라 진화주의, 즉 무신론적 진화론입니다.
진화는 과학 현상인데, 실제로 진화가 일어난 증거는 넘쳐납니다. 예를 들어, 아기를 가지면 산부인과에 가서 초음파 사진을 찍는데, 그 크기가 아주 작습니다. 그렇게 작은 존재가 이렇게 큰 성인으로 자란 것도 일종의 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화는 과학적 현상이고,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진화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화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 진화주의 즉 무신론적 진화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진화 자체는 신이 있다 없다를 보여 주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무신론적 진화론의 흐름에서 인류에 큰 해악을 끼친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공산주의 유물론 사상’입니다. 무신론적 진화론이 없었다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나올 수 없었습니다. 1859년에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써서 생물학적 진화론을 발표한 이후 13년 뒤인 1872년에 공산주의의 효시인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론>이 같은 영국의 런던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 책의 앞부분에 자필로 ‘존경하는 다윈 선생께 드립니다’라는 헌정사를 썼을 정도로 다윈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의 동물적인 존재에 불과하고 물질은 모든 것의 근본적인 가치가 되기에, 필요하면 인간의 개체를 얼마든지 숙청하고 개조할 수 있다고 보는 공산주의 이론에 근거하여 구소련에서 2천만 명, 중국의 마오쩌둥(Mao Zedong) 치하에서 6천5백만 명, 베트남에서 백만 명, 북한에서 2백만 명(3백만 명의 아사자 제외), 캄보디아의 폴 포트(Pol Pot) 정권하에서 2백만 명, 동구 공산 정권 하에서 1백만 명, 아프리카에서 150만 명 등 총 1억 명 가량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범죄가 자행되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바로 무신론적 진화론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현대 문명의 타락과 인간 경시 풍조,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일탈과 물질주의와 쾌락 중심의 사고는 모두 무신론적 진화론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함께 정말 중요한 두 가지를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이것은 무엇보다도 무신론적 진화론에 의해 부정된 이 두 가지를 분명하게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이 부정한 그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첫째, 무신론적 진화론, 즉 진화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부정합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지금도 세상을 경영하고 계시기에 그분의 말씀과 뜻을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는 진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무신론적 진화론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에 그 가치와 존엄성은 절대적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절대자가 될 수 없다는 진리를 부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신론적 진화론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바로 이 두 가지를 힘 있게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 우리는 올바른 영적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2. 섭리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신앙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도록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지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을 주장하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바로 섭리라고 하며, 참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 섭리에 순종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결혼 예배를 다섯 번 인도해보았는데, 결혼은 정말 큰 기쁨과 감사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릴 꿈나무 같은 소중한 부부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할 때 그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결혼 생활을 해 나가는 마스터키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냥 자기들이 결혼할 장소가 필요하고 목사가 필요해서 요청한 경우, 그러한 교훈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살기보다는 그냥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나가는 부부들이 더 많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어도, 원하지 않는 모습이나 상황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신앙으로 서 있지 않으면서 그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배우자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와 함께 오래전 유명 가전제품 광고의 문구였던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라는 말이 막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귀가 역사하기 쉽습니다.
그런 순간을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부부가 함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믿음의 가정으로서 함께 ‘섭리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섭리의 하나님께 순종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결혼 생활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운명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로 살아가게 됩니다.
3.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청지기 신앙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에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아름답게 관리하며 지켜야 하는 청지기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를 보십시오. 인간은 결코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입니다.
‘청지기’라는 단어는 우리 인간을 묘사하는 아주 정확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결코 세상의 주인이 아니고 또한 세계가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청지기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 신앙에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신앙적 특성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을 끝까지 지킬 때 진정한 의미에서 ‘청지기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영적 권위와 권세
청지기에게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권위와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청지기로 세우시면서 우리에게 당신의 권위와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며, 그것을 당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열왕기하 19장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위험하고 힘든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 주변의 다른 나라들은 이미 다 앗수르에게 멸망했고, 북이스라엘 역시 벌써 패망한 상태였습니다.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만 근근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나라여서 아직 망하지 않고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모욕하고 협박하는 편지를 써서 히스기야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가서 그 편지를 펼쳐 놓고 기도합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4절)
그런데 그가 이때 드린 기도의 내용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5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라는 표현입니다. 왜 히스기야는 갑자기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는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입니까?
어느 신학교에서 구약학 교수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속주, 즉 창조하신 하나님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눌 수 있는데, 믿음의 사람이 삶에서 감당 못할 어려움을 당할 때 이 두 하나님 가운데 어떤 하나님을 부른다고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연히 어려울 때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수의 답은 학생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예레미야 32장 17절을 찾아 읽으라고 말했습니다.
“아, 주 하나님, 보십시오,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니, 주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렘 32:17, 새번역)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며 하나님 앞에서 슬픔 가운데 기도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간절한 기도인데,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기도를 통해 그가 무엇보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비롯하여 성경의 인물들, 특히 구약의 인물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 구속주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입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왜 극심한 어려움 앞에서 창조주를 찾았던 것입니까? 물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그들은 ‘청지기로서의 영적 권위와 권세’를 사용한 것입니다.
특히 히스기야의 기도에는 그런 영적 권위와 권세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상황은 아주 힘들고 어렵지만, 이 모든 것을 맡겨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영적 권위와 권세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권세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권세를 지금 사용합니다. 역사해 주십시오!’
“16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여겨 보아 주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전한 저 산헤립의 망언을 잊지 마십시오. 17 주님, 참으로 앗시리아의 왕들이 여러 나라와 그 땅을 마구 짓밟아 버렸습니다. 18 여러 민족이 믿는 신들을 모두 불에 던져 태웠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참 신이 아니라, 다만 나무와 돌로 만든 것이었기에, 앗시리아 왕들에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마는, 19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 그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가, 오직 주님만이 홀로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16-19절, 새번역)
지금 우리는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로서의 영적 권위와 권세를 온전히 붙들고 선포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모습이요, 이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이 고백을 사도신경은 ‘천지의 창조주’라고 고백하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자세
청지기로서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자세는 ‘아무것도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청지기가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열매를 자신의 것으로 챙기는 순간, 그것은 횡령이 되고 불충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인생은 완전히 망가집니다.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에는 ‘나는 세상의 주인도 내 삶의 주인도 아닙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청지기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서도 절대 아무것도 주장하거나 열매를 챙기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제가 가진 것 중 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가 잘할 때도 이것은 제가 받을 영광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께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이 고백의 장소가 가정이든, 일터이든, 교회이든 상관없이 바로 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지의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맛보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