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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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5일 수요예배
✦ 누가 나의 왕인가 6 ✦
예후: 위선적인 신앙을 버리라
(열왕기하 10장 28~31절)
[들어가는 말]
이스라엘 역사에 많은 왕이 있었는데, 그중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악한 길을 가겠다고 작심하고 악하게 다스린 왕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왕권을 안전하게 유지하며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다 보니 세상 기준과 타협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지니까, 그런 것을 붙잡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한국에서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 강사로 초청받은 목사님이 설교 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조폭 세 명이 갇힌 교도소에서 예수님이 그들과 같이 지내시게 된다면, 예수님이 조폭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조폭이 선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조폭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겁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영향력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서 ‘나는 조폭보다 훨씬 못한 인간이야.’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조폭보다 훨씬 나은 사람인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 왜 변하지 않는 걸까요?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면 조폭도 변하는데, 왜 우리는 변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예수님의 강력한 능력이 우리 삶에 미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다면 둘째,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말이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유입니까? 지금 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삶에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동떨어져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왕입니까? 나의 실질적인 왕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나의 왕이 아니시면 나는 세상과 타협하여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1. 세상과 타협한 예후
북이스라엘의 왕 예후는 꽤 괜찮은 왕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제자였던 선지자 엘리사에게도 제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 제자 중 하나를 보내어 예후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9장). 그 제자는 예후에게 기름 부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6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 7 너는 네가 섬기는 상전 아합의 가문을 쳐라. 나는 내 종들인 예언자들의 피와 또 주님의 다른 종들의 모든 피를 이세벨에게 갚으려고 한다. 8 나는 아합의 가문을 모두 다 멸망시킬 것이다. 그렇다. 아합에게 속한 사람은 매인 사람이건 놓인 사람이건 가릴 것 없이, 남자는 누구나 이스라엘 안에서 끊어 버릴 것이다. 9 나는 아합의 가문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과 같이 만들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가문과 같이 만들 것이다. 10 그리고 개들이 이스르엘 땅 안에서 이세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를 매장할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 (왕상 9:6-10, 새번역)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이전에 알려주신 대로 한 것입니다. 그 후 예후는 실제로 아합 가문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이세벨도 처단했습니다. 심지어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연합하기 위해 와 있을 때 그도 죽였습니다. 또한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백성을 다 잡아 죽이고 바알 우상들과 신전을 다 파괴하며 대단한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예후는 이처럼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을 단행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그것이 가짜라고 지적합니다.
“2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29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28-29절)
예후는 이방 신을 멸하였으나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입니까? 남 유다와의 국경에 가까운 벧엘과 북쪽 지역인 단에 각각 금송아지를 세워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백성이 그곳에 절하게 하고, 아무나 제사장으로 삼고, 절기도 율법과 비슷하게 만들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영적인 일들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왕이 된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라고 맡기신 백성이 자기를 떠나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으로 가서 르호보암 편이 될 것이 두려워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의 핵심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며, 백성을 우상에 절하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뜨린 것입니다. 자기가 죄를 짓는 것도 큰일이지만, 남들까지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은 더 나쁩니다. 자기만 죄를 짓고 말지, 남들도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더 악합니다.
사람들이 주일을 가리켜 ‘거룩한 성일’이라고 하고, 또 교회당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건물에 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일만 거룩한 날이 아니라 매일이 거룩한 날이듯, 교회당만 성전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어느 곳이나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건물이라고 생각해서 교회당을 중요시할 때, 교회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길로 가게 되고 타락하게 될 위험이 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로보암처럼 계속해서 우리의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싶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드리는 순간에만 신앙인으로 살고, 거기를 벗어난 곳에서는 편하게 살고 싶은 겁니다.
이 시대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에 들어서면 나름 간절히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며 성령 충만한 성도인 것처럼 보이는데, 교회당을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죄에 빠져 살 때가 많습니다. 죄를 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문제는 죄와 벗하며 살아가면서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가십거리가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되어 버린 주된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삶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안 믿는 사람이 볼 때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배드릴 때는 거룩한 것 같은데 삶의 현장에서는 주님을 안 믿는 자기보다 도덕성이 떨어지고 인격도 안 좋고 또 얌체 짓을 할 때가 많은 겁니다. 다 그런 게 아닌데 그런 사람들이 더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교회가 비판을 받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이전에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부산에 갔다가 유명한 시장에 가서 김밥, 순대, 어묵 같은 길거리 음식을 드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길거리를 다니며 이것저것 먹고 있는데 어떤 분이 그분을 알아보고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책이나 방송 등을 통해 유명하니까 알아본 겁니다.
그 후 저녁 식사 약속이 있어 식당에 갔더니 거기서도 목사님을 알아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과 동행했던 ‘안 유명한’ 목사님이 그 목사님에게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불편하시겠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목사님은 “아니요, 불편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언젠가부터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지 말고 즐기자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 목사님이 이전 젊은 시절 청년부 목회자로 있을 때는 솔직히 그런 상황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부교역자에게 사택으로 살게 해준 아파트 단지에 교회 성도들도 많이 살았기 때문에, 길을 가다 교인을 마주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굉장히 곤란한 말들을 했다는 겁니다. “목사님, 어제 비디오 가게 가셨죠? 뭐 빌리셨어요?” “목사님, 어제 늦게 주무시던데, 왜 그렇게 늦게 주무셨어요? 저는 목사님 댁에서 불이 꺼지면 잠자리에 듭니다.” 교인들은 관심의 표현으로 그랬을지 몰라도, 그럴 때마다 그 목사님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아서 많이 불편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 이것은 불편한 일이 아니라 너무 감사한 일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면 하나님께서 곳곳에 천사를 세워서 내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주실까?’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후로는 그런 일들을 불편해하지 않고 즐기기로 마음먹고 나니 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셨다고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결코 불행하거나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불편하면 자기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분명히 주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너무 열심히 믿어서 푹 빠지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여러분, 바로 그럴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그렇게 할 때 신앙은 위선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후는 여로보암이 그랬던 것처럼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놓고 그것을 숭배하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그것만큼은 포기하지 못했던 겁니다. 성경은 그런 예후를 위선적이라고 평가합니다. 바알 우상들을 불태우는 등 영적으로 무너진 나라를 깨끗하게 해보려 했지만, 그 후에는 좀 더 쉽고 편하게 가고 싶어서 타협했고, 그 한 가지 때문에 예후는 위선자가 되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과 타협해야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쉽게 세상과 타협합니다. 예배당에만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얼마든지 마음에 거리낌 없이 세상과 타협합니다.
세상 속에 있을 때는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에야 보이는 십자가는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라는 말입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과 구원 사역을 기억하는 크리스천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교회에만 모셔져 있습니다. 심지어 목에도 걸려 있고 귀에도 걸려 있지만, 그것은 그저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십자가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장식품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게 아닙니다. 당연히 세상에서 살지 어디서 삽니까? 그리고 세상을 떠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갑니까? 무조건 산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속에 살면서 세속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그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후는 개혁의 기치 아래 무섭게 몰아붙였지만 한 가지를 포기하지 못해 실패하고 맙니다. 그 한 가지란 그가 가진 권력이었습니다. ‘이것만은 절대 안 돼!’라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인데, 그런 우상이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2. 신앙적 욕심이 낳은 위선
“30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31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30-31절)
예후는 위선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왜 위선적이었습니까? 누군가를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위선적인 사람은 솔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종교개혁을 한 것 같았던 예후가 끝까지 권력욕과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을 아셨습니다.
한국 교회 초창기에는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기도하는 철야기도회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철야기도회가 몇 년 전부터는 사람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시간을 조금씩 앞당기다가 아예 저녁 7시 예배로 드리는 교회까지 생겼습니다.
이런 상황을 늘 아쉽게 생각하던 어느 교회가 다시 철야기도회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조금 늦은 저녁에 모여 새벽까지 기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정이 넘어 1시나 2시쯤 되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기도하면서 졸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까지 골며 잤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은 졸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너무 조용해서 눈을 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장로, 집사 할 것 없이 다 저 모양이니 하나님 얼마나 민망하십니까?”
그러고는 저쪽에 보니까 그래도 깨어 있는 장로님이 있어서 그분에게 가 불평을 쏟아놓았다고 합니다. “장로, 집사 모두 저렇게 졸고나 있으니 철야기도회를 뭣 하러 합니까? 이럴 거면 그냥 관두시죠.” 그러자 장로님이 미안해했습니다.
그래도 자기 혼자라도 기도하자는 생각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얘야, 그렇게 깨어서 남의 흉이나 보고 불평할 거면, 너도 얼른 잠을 자거라.”
기도 시간에 자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깨어 기도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더 나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남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혼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옛말도 위선을 꼬집는 말입니다. 말리는 척하지만, 사실은 진심으로 말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미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구제나 헌금도 잘하고 안식일도 거룩하게 지켰지만, 예수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7-28)
마태복음 23장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독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뭡니까? 그들의 행위 가운데 진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권력욕을 감춘 채 우상을 멸한 예후에게서도 진심은 없었습니다.
예후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스라엘 전 지역을 다니며 아합의 집과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서 다 죽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땅을 우상숭배의 땅으로 만들어 버린 바알의 선지자들과 바알을 숭배하는 백성을 모두 죽였고, 바알의 신전과 우상을 깨뜨렸으며, 심지어 바알의 신전을 화장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열심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이 곧 드러났습니다.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왕하 10:16)
그를 맞으러 나온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 예후는 “나의 열심을 보라”면서 으스댑니다. 그의 열심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자기 입으로 자백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열심을 가장한 욕망을 채웠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삼으신 까닭은 아합과 이세벨을 심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후는 아합의 온 족속과 이세벨을 심판할 때 유다 왕 아하시야까지 죽입니다. 심지어 그의 형제들 42명도 길에서 만나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9장과 10장을 보면 예후가 아주 잔인하게 심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떤 구약학자들은 아하시야도 악한 왕이었지만 예후가 그와 그의 형제들까지 모조리 죽인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행한 지나친 행동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면서 열심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어선 안 되겠습니다. 자신의 지나친 열심이 혹시 쉽게 믿음 생활을 하려고 하는 편의주의 때문은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헌신은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돌아보며 자기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정에서, 일터에서, 또 교회에서 맡기신 사명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는 것이 참된 헌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여러 가지 ‘유전’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안식일과 모든 절기, 그리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나중에는 그것이 너무 지나쳐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잊어버리고 율법주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토대로 ‘~하라’는 248개 조항과 ‘~하지 말라’는 365개 세부 조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미드라쉬(Midrash)’라고 합니다. 그중 안식일에 지켜야 할 조항만 39개나 되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지나친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열심이 되어 버렸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행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잘못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예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합의 온 집안을 심판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저 권력을 향한 예후의 야망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위선자라고 평가합니다.
우리 역시 신앙의 열심만 좇다 보면 위선자가 되고 타락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성만찬을 할 때 떡을 씹어야 하나 삼켜야 하나를 가지고 교단이 갈라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니, 아무 거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그런 걸로 교단이 갈라졌습니다. 기도하는 모습도 소리를 내서 해야 하느냐 조용히 해야 하느냐를 가지고 서로 정죄하는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밥을 그릇에 담을 때 주걱으로 밥 위에 십자가를 그린 다음 담는다고 합니다. 새 차를 사면 십자가를 부적처럼 걸어 두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정치가가 된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정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믿음을 이용하려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비전을 주셔서 사업을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사업을 위해 믿음을 이용하려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회자가 되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목회자 직분을 이용해서 권력을 얻고 싶어 합니다. ‘노회장’, ‘총회장’ 등 ‘장’을 좋아합니다. 사탄은 이처럼 우리의 욕심을 이용해 호시탐탐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유혹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고, ‘한 가지’를 순종하지 못해 죄를 짓는 것입니까? 왜 그 한 가지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많은 복을 누리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순종하고 헌신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까? 왜 우리는 내 꿈을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면서도, 하나님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감각합니까? 우리 삶에 불만이 생기는 것은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예후처럼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게 되면 예후처럼 우리의 열심도 그렇게 무섭게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그 어떤 행위도 위선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신앙적 열심이 위선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하고 돌아보며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