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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2일 수요예배
✦ 누가 나의 왕인가 11 ✦
요시야: 정직한 삶으로 세상을 바꾸라
(열왕기하 23장 21~25절)
1. 정직은 믿음이다
북이스라엘 19명의 왕과 남유다 20명의 왕이 있었는데, 요시야처럼 극찬을 들은 왕은 없습니다. 요시아는 여덟 살에 왕이 되어 31년간 남유다를 다스린 16대 왕입니다(22:1).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5절)
성경은 요시야만큼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른 왕은 전무후무하다고 그를 칭찬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22:2)
요시야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이유는 한마디로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정직하다고 평가받은 남유다 왕은 요시야까지 8명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정직하다고 평가받은 왕들을 보면, 5명은 잘하다가 잘못된 길로 갔습니다.
아사는 잘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에게 삐져서(?) 병이 났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요아스는 아달랴의 살육 사건 때 간신히 살아남아서 어릴 때 왕이 되어 멘토가 살아 있을 때는 잘하다가 나중에 악한 길로 갔습니다. 아마샤도 처음엔 잘하다 나중에 잘못됐고, 웃시야도 잘하다가 나중에 교만해져서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분향을 함으로 징계를 받아 나병에 걸려서 실질적으로는 왕위에서 내려왔습니다. 요담은 별다른 잘못은 없지만 산당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다들 잘못한 점들이 있는데도 선하게 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성경에서는 ‘정직히 행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그들 외에 정직히 행하면서 다윗의 길을 따랐다고 평가받은 왕은 단 3명,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입니다. 그들 역시 여호사밧은 산당을 없애지 않았고 아합의 딸과 자기 아들을 결혼시켰으며, 히스기야는 병에서 나은 뒤 바벨론 사신들이 왔을 때 왕궁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다윗의 모든 길을 본받았고, 곁길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정직히 행한 사람’은 요시야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정직하다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사실임을 강조할 때 ‘솔직히 말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많이 하면 오히려 수상해 보입니다. 참기름을 파는 가게에서 그냥 ‘참기름’이라고 하면 손님들이 사지 않으니 ‘진짜 참기름’이라고 하고, 더 나아가 ‘원조 진짜 참기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더 믿기 힘듭니다.
‘정직하다, 솔직하다’라고 말하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워지는 게 사실인데, 그렇다면 요시야의 ‘정직’에는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는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았다. 그의 조상 다윗이 밝히 보여 준 길을 똑바로 따라갔고,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왕하 22:2, 메시지)
여기서는 정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직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정직하게 사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2장을 보면, 요시야가 왕이 된 지 열여덟째 해에 대제사장 힐기야에서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했습니다. 그런데 성전 보수 공사 중에 성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 율법 책을 건네받은 서기관 사반이 요시야 왕 앞에서 그 책을 읽었고, 그 말씀을 듣던 요시야는 애통해하며 옷을 찢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장 힐기야와 신하들에게 주님의 뜻을 묻도록 보냅니다.
“그대들은 주님께로 나아가서, 나를 대신하여, 그리고 이 백성과 온 유다를 대신하여, 이번에 발견된 이 두루마리의 말씀에 관하여 주님의 뜻을 여쭈어보도록 하시오. 우리의 조상이 이 책의 말씀에 복종하지 아니하고, 우리들이 지키도록 규정된 이 기록대로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진노가 크오.” (왕하 22:13, 새번역)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봄으로써 정직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자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땅히 행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직은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불이익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에게 자기 조상들이 습관에 따라 하던 행위를 어느 날 갑자기 못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이었겠습니까?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도 백성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시야는 말씀을 읽고 말씀에 따라 종교개혁을 단행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성경이 요시야를 정직하다고 평가하며 칭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가끔 뉴스를 보면 제발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더 속상한 일은 가해자가 거짓말을 하며 자기 혐의를 부인할 때입니다. 때로 그들의 거짓말은 너무 뻔뻔하기까지 해서, 나중에 모든 혐의가 드러나 유죄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가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한 것이 분명한데도 혐의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그들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도 그 사실조차 아니라고 믿는 심각한 정신질환에 걸린 것인지, 아니면 정말 거짓말이 완전히 몸에 벤 사람인지 궁금해집니다. 사회에 가득한 부정직함은,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잘못이 전혀 없어서 위대한 믿음의 인물이 된 게 아닙니다. 그들도 실수하고 잘못했지만, 그럴 때 정직하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정직하게 살면 인생이 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편안하게 살려면 정직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세금 문제가 그렇습니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장관이나 총리를 새로 임명할 때 청문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청문회를 보면 뭔가에 안 걸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뭔가 정직하지 못하게 이익을 본 게 있는 겁니다. 사회 고위층 중에서 불법이나 편법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음주운전까지 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도 세금 보고 때나 일할 때 정직하지 않게 살짝 숫자를 바꾸거나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내용을 바꾸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손해를 안 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직하게 사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최후에 형통하게 해 주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면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이고 위험한 모험을 해야 합니다. 온 나라에 가득해 있는 우상들을 깨뜨려야 하고 무당과 점쟁이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왕으로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그런 모험을 하기로,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기로 결단합니다.
이처럼 정직하다는 것은 ‘내가 좀 더 편하게 살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할 일이기 때문에 모험도 감행하고 불이익도 감수하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했던 ‘마땅히 할 일’은 무엇입니까?
“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1-23절)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그들에게 역사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새롭게 하겠다는 결단의 의미가 있습니다.
요시야가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믿음의 기억을 붙잡기 위함입니다. 이 믿음의 기억이 환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지켜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억은 우리가 살면서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정직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요시야가 한 개혁은 바로 믿음의 기억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의 마음의 중심에 놓아 정직하게 행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16세기 당시의 중세 교회는 요시야 시대와 여러 가지 면에서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역사상 그런 때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번영했습니다. 돈도 많았고 아주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과 번영을 맛보던 중세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졌습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성경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중세 교회는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인이 읽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오로지 성직자들만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반 대중을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로 만들어놓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할 자리에 성모 마리아상과 사도들의 그림과 동상들, 그리고 수많은 성인들의 형상을 세웠습니다. 심지어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성직자들의 말을 우상처럼 숭배하면서 순종했습니다.
요시야 시대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멀쩡히 서 있으면서 건재했습니다. 백성은 유월절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것입니다.
말씀이 실종되면 사람들이 우상에 빠지고 타락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와 목회자들이 왜 그렇게 욕을 먹습니까? 교회가 커지면 목회자가 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영광 받으려는 욕심을 부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목회자나 그 어떤 사람이 숭배와 복종의 대상이 될 때 교회는 타락하고 우상에 빠지게 됩니다. 요즘 크게 화제가 된 JMS 같은 데를 보십시오. 교주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영광을 받으려 욕심을 부리니까 그대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면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와 크리스천이 타락하는 때는 힘들고 어려운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잘나갈 때, 유명해졌을 때, 영광의 자리에 있을 때 타락합니다.
나는 지금 정직하게 행하고 있는지 점검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정직해도 무슨 기준으로 정직한 겁니까? 기준이 없는 정직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닌 정직이라면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정직하게 행해야 합니다.
2. 세상을 거스르라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4절)
히스기야 때 이런 것들을 다 없앴는데 그 몇십 년 사이에 우상들과 무당들이 또 많이 나타났습니다. 므낫세 때 다시 나온 겁니다. 나중에 므낫세가 회개하고 없애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요시야가 하나님께 칭찬받은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시야가 완전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요시야는 영적으로 경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지만, 정치적, 외교적으로는 미숙해서 잘못된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 점이 참 아쉽습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남유다는 실질적으로 끝난 겁니다.
“그가 다스리고 있던 때에,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이 앗시리아 왕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올라갔다. 요시야 왕이 그를 맞아 싸우려고 므깃도로 올라갔으나, 바로 느고에게 죽고 말았다.” (왕하 23:29, 새번역)
이것은 요시야의 죽음을 묘사한 말씀인데, 그토록 칭송을 듣고 훌륭했던 요시야의 죽음을 성경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허무한 죽음입니다.
므깃도는 당시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전쟁이 끊이지 않던 지역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가 약해지면서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에게 니느웨가 함락됩니다(BC 612년). 그 후 앗시리아의 살아남은 자들이 북서부에 있는 갈그미스(최근 지진 난 곳과 가까움)로 가서 모여 있었는데, 바벨론이 그리로 쳐들어와 앗시리아와 전쟁을 벌인 것이 제1차 갈그미스 전투입니다.
이때 이집트의 바로 느고는 앗시리아가 바벨론에 맞서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의 팽창을 저지하려고 했는데, 이 성경 구절이 그때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의 바로 느고는 앗수르를 도우려고 왔는데, 개역 성경에는 ‘치고자’라고 되어 있지만 도우려고 올라온 것이 맞습니다.
이때 요시야는 바로 느고와 이집트 군대에게 길만 내주면 되는데, 굳이 바로 느고를 막겠다고 싸우다가 전사하고 맙니다. 요시야는 정세를 잘못 판단한 겁니다. 요시야는 그때까지도 자기들 유다의 주적이 앗시리아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지금 거의 망하게 된 앗시리아를 이집트가 도와서 바벨론을 막아주면 좋은 것인데, 요시야는 국제 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앗시리아를 도우러 가는 바로 느고를 막아선 것입니다. 아직도 앗시리아가 망해야 유다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집트와 바벨론이 서로 싸우게 내버려 두면 오히려 유다에게 더 좋은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괜히 앗시리아를 도우러 가지 못하도록 이집트 군대를 막음으로써 결국 죽음까지 맞게 됩니다. 이때가 BC 609년이었습니다. 요시야의 죽음으로 유다는 이제 완전히 망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요시야는 이처럼 어리석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의 극찬을 듣는 것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애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비록 그는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것을 보셨습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에 완전하게 성공했거나 그것을 완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삶 가운데 말씀에 순종하려고 했던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완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완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어진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애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상을 따르는 습성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조상 대대로 몸에 붙은 악행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악을 행하고 우상을 섬기는데, 나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려면 바보같이 느껴지고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려면 참 고독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고독하고 외로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살다가 힘들어 눈물을 흘릴 때,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독하다면, 말씀대로 살기 위해 나아가다가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너무 힘들어 쓰러진다면, 그때는 괴로워할 때가 아니라 기뻐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곧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대적할 때 그들과 함께하면 비록 악인은 되겠지만 사는 건 쉬워집니다. 그런데 그들과 다른 길을 가면 하나님의 사람은 되겠지만 사는 게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꾼 위대한 사람들은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어려운 길을 택함으로 고독하고 삶이 힘들어졌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해 주셨고 그들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역사로 보면 요시야는 실패한 개혁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도한 노력은 어두운 시대를 살던 이스라엘 역사에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이 실패한 뒤 유다는 결국 바벨론에 의해 곧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가 밝힌 개혁의 불빛은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붙드는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요시야의 이런 종교개혁이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계속 남아서 그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끈이 이어진 겁니다. 그래서 포로기 이후에는 성전을 재건하여 말씀 앞에 서도록 이끄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요시야가 비록 실패한 것 같고 허무하게 죽은 것 같지만, 그가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것이 바벨론 포로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나중에 돌아와서 영적 재건을 이루는 토대가 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곳에 느보 산이 있습니다. 모세가 느보 산에서 죽었습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다바’라는 곳이 있는데, 이 마다바에는 6세기경에 세워진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성당 바닥에는 이스라엘의 지도를 그려 넣었습니다. 흔히 사해를 죽음의 바다로만 알지만 유명한 휴양지이며 물이 파랗습니다. 그래서 콘크리트로 된 그 성당 바닥에 그려진 사해는 푸른빛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사해 주변으로 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져 있는데, 하나는 사해로 흘러들고 다른 하나는 사해를 거슬러 나아가고 있습니다.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들기 때문에 물고기들도 자연스럽게 사해로 흘러듭니다. 그러나 사해로 들어서는 순간 물고기들은 죽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들은 그 물을 거슬러 살기 위해 다시 올라갑니다.
크리스천은 그렇게 사해를 거슬러 생명으로 나아가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아무리 모든 사람이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어도 우리는 죄악과 불의를 거스르고 어둠을 거슬러 생명으로 나아가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이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 ‘좀 적당히 믿어라. 그렇게 미치지 말아라. 너무 푹 빠지지 말아라.’라고 하는 것을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독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옷을 찢고 회개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요단강이 있고 사해가 있습니다. 물이 요단강에서 사해로 흘러가지만 우리는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옷을 찢고 회개함으로 세상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고기가 거슬러 올라가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우리가 생명 길로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보면 너무 안타깝고 절망이 되지만, 우리 각자는 절망할 게 아니라 이 절망 가운데 소망의 빛을 드는 요시야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행한 요시야로 인해 역사를 바꾸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요시야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며 나아간다면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요시야와 같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들이 다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