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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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6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26 ✦
예수님과 함께하기(2)
“광야에서”
(마태복음 4장 1~11절)
1. 먼저 시험이 온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들의 삶은 시험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시험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시험(test)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뭔가 잘못 가고 있거나 영적으로 흐트러져서 주님의 소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테스트입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이 대표적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1-2)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주된 방법은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창 22:12, 16-18, 새)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늦게 얻은 외아들 이삭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 이삭이 우상이 될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상도 찍혀 쪼개지고 우상숭배자도 망하게 되기 때문에, 이삭도 아브라함도 다 망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이 다시금 하나님께 집중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삭도 살고, 이삭을 통해 수많은 민족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둘째, 마귀의 시험(temptation)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파괴하기 위해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 요셉에게 임한 유혹이나(창 39장), 밧세바를 통해 다윗에게 온 유혹 같은 것입니다(삼하 11장). 우리가 알 듯, 요셉은 이겼고, 다윗은 실패했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이기기 위한 방법은 ‘피하는 것’인데, 요셉은 피했기 때문에 이겼고, 다윗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찾았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셋째, 시련(trial)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테스트와 비슷하게 우리를 단련시켜서 예수님을 닮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테스트와 다른 점은, 우리가 크게 잘못한 것이 없을 때에도 온다는 것입니다. 욥에게 임한 시련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임한 핍박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겼을 때 엄청난 영광이 찾아오게 됩니다.
시련을 이기는 주된 방법은 ‘인내’입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시련이 올 때 기쁨으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인내를 통해 예수님을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하는 순간에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입으로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올 때 원망하고 불평하고 미워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소명, 즉 부르심은 시험을 거칩니다. 예수신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가져야만 하는 소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언제나 시험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신경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시험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테스트를 받기도 하고, 잘하고 있을 때 마귀의 유혹을 받기도 하며, 별 이유 없이 시련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 혼동하면 굉장히 곤란합니다. 하나님이 잘되라고 테스트를 주시는데 피하고, 마귀가 유혹을 하고 있는데 순종하면 곤란합니다. 무슨 시험인지를 잘 봐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뭔가 잘못 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바로 잡아주시려고 테스트하시는 것인가? 마귀가 나를 무너뜨리려고 유혹하는 것인가? 아니면 별 이유는 없지만 인내해야 할 시련인가? 이것을 잘 보고 순종하거나, 피하거나, 인내해야 합니다. 특히 시련이 올 때 침묵하며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요단 강을 건너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을 때, 뒤도 돌아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방금 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셨습니다(3:17).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 그곳의 높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며 세상을 바꾸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을 건너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 자기 백성에게 천국을 선포하시기 전에, 성령께서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광야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라고 명하신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일은 백성들에게 천국, 곧 예수신경이 삶을 변화시키는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어떻게 실천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이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영원한 저 하나님 나라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토록 서로를 사랑하는 곳입니다. 그것을 미리 연습하도록 이 땅에서 교회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 다 예배드릴 수 있지만 왜 이렇게 나와서 공 예배로 함께 드립니까? 주일에도 혼자 또는 가족끼리 모여서 예배할 수도 있는데 뭐 하러 교회에 나와서 같이 예배를 드립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 예배입니다. 얼마든지 개인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큐티 하고, 새벽기도 혼자 하고, 철야기도 혼자 하고, 기도원 가고 그럴 수 있는데,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이 모여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부르심, calling)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부르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또한 사명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하나님의 사명(mission)을 이루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곧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소명과 사명이라는 단어를 같이 사용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명을 받은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받는 시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황하게 됩니다. 소명자의 삶에는 종종 모진 시험들이 찾아옵니다. 아니,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시험을 이기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소명은 사탄에 의해 세 차례 시험을 받았을 때 검증되었습니다.
2. 우리를 위해 광야로 나가신 주님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시험은 광야에서 찾아왔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1절)
광야에서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실 때 신명기에서 세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세 구절은 모두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직접 체험한 것들 가운데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혹독한 압제로부터 벗어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벗어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은 먼저 시험을 받고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중요한 세 가지 문제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시험하셨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할 것인가?
둘째, 이스라엘은 시련 가운데 하나님께 인내로 순종할 것인가?
셋째,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인가?
이 세 가지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시험이었는데, 그들은 이 세 가지 모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광야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첫째, 아바 하나님께서 자신의 육체적 필요를 공급하심을 신뢰할 것인가?
둘째, 아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적으로 알리기 위해 정하신 시간을 인내로 기다릴 것인가?
셋째, 아바 하나님만을 경배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께 주어진 세 가지 시험이었고,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시험이 세 가지라는 점, 그리고 이스라엘과 예수님에게 임한 시험이 모두 광야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받았던 광야의 시험을 다시 받으셔야 했고, 또 그 시험을 통과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다른 세대가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공하셨고, 자기 백성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해 그 땅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표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에게 오는 시험을 통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 광야에서 예수님과 함께하기
우리가 천국 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죄인임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즉 천국에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순종하는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착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순종이 삶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도 주님이 원하시는 뜻에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정말로 믿은 것인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순종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시험이 순종하는 삶이라면, 즉 말씀대로 온전하게 사는 것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옛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이미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우리 삶에 너무 많습니다.
이 예수신경이 전체 성경의 요약이고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예수님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웃을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것만 보아도 실패한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정말 가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이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사시는 삶이 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일어난 변화는 단지 새 속성이라는 ‘어떤 것’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새로운 속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고 간주할 수 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말이 아닌 말들을 마구 뱉어 냅니다. 예수님이 하실 만한 행동이 아닌 것을 아직도 많이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는 옛 속성의 지배를 아직도 받아서 그렇습니다. 새 속성, 즉 예수님의 지배를 받을 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확신의 삶> 교재인 <매일 영적 성장 가이드>(랄프 네이버)에 이것을 잘 설명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정리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는 옛 속성의 행동을 살짝 바꾸어 마치 새로운 속성인 그리스도의 삶처럼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옛 속성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의 왕으로서 다스리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께 나의 생각을 인도하시고 나의 행동을 주관하시도록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어떤 선한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분을 안에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새로운 속성입니다.
나는 그분을 나의 삶 전체, 즉 말과 습관과 그 밖에 모든 것들의 인도자로 모시겠다고 선택하기만 하면, 그분은 내 인생의 왕으로 내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영적 은사들이 나의 삶을 통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더 이상 나 자신의 삶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위대한 축구선수가 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노력을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최선이 성공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나와서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입니다. 그가 이상한 제안을 합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기술과 체력과 지식을 모두 나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러자마자 나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술로 공을 차고 빨리 달릴 수 있게 됩니다. 머리가 놀랄 만큼 잘 움직여서 축구경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공이 오는 자리를 미리 예측해서 움직여 골을 만들어냅니다. 그러자 관중들이 열광적으로 내게 환호를 보냅니다. 나는 전설적인 축구선수처럼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놀라운 게임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축구선수의 기술과 체력과 지식과 능력을 내 몸에 가지고서 시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줍니다. 사실은 내가 그렇게 잘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바로 그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두 번 잠깐 해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 평생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절대로 시시한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엄청난 삶입니다. 나는 형편없지만, 내 안에 그 엄청난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도 엄청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넉넉히 이길 수 이도록 보장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우리는 예수신경으로, 즉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완벽하게 실천하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절대로 완벽하게 해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저도 자신에게 늘 질문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런데 이러고 있나? 이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가?’
또한 지금 이웃을 정말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왜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고, 껄끄러운 사람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고, 화도 내고 왜 그렇습니까? 그게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겁니까? 절대로 아니지요. 이웃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것은 관계인데, 그렇다면 관계에 실패하면 신앙생활 자체가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달달 외우고, 매일 하나님 말씀을 몇 번씩 읽고, 매일 몇 번씩 기도하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실패하면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까? 얼마나 실패를 많이 합니까? 신앙생활이 성공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바로 그 일을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셔서 그것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 우리 안에 계신 그분 때문에 그런 사랑의 삶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실패합니까? 그 순간만큼은 아직도 내가 내 주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 노릇을 해서 불편한 겁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나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실까요? 그것을 점검해보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는 것,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뢰와 순종과 예배의 영역들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야 하지만, 특히 앞길이 희미하고 잘 안 보일 때 더욱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평소에는 신뢰의 필요성을 잘 모르고 있다가 어려움이 닥치고 막막할 때에야 신뢰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광야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의 삶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와 같을지라도, 예수님은 우리가 있는 바로 그 광야에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거기서 우리의 삶이 아니라 그분의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몹시도 힘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때 예수님은 굶주린 상태였습니다. 그분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탄은 그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2-3절)
이것은 사실 예수님이 충분히 자신의 능력으로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 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절)
하나님의 아들로서 필요한 것을 공급할 자격이 있는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이 선택을 하는 주체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육체적 욕망이 결정하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만 신뢰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갈등할 때, 광야에서 우리는 이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시험받는 동안 연약해진 믿음을 예수님께서 북돋워주시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말고 당장 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을 때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며 기다리셨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에게 살짝 보여주신 영광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그분을 하나님의 메시야로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님 앞에 나서서 한 걸음에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7절)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마련해두신 것을 얻기 위해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면, 하나님의 때를 망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다리고 인내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기다리기로 선택하신 것처럼, 기다림으로 능력을 얻은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예수님에게 자기가 원하는 천국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는데, 그것은 사탄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의 부모에게서 배운 쉐마를 고백했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8-10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나는 그분만을 예배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아셨고,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것은 그분만을 경배하는 것을 의미함을 아셨습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혹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로, 또한 하나님을 우리 예배의 중심에 모시는 일로 발버둥 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들을 이미 행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신뢰는 연약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에 있어 실패하며, 우리의 예배도 초점을 잃은 예배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전한 신뢰와 끊임없는 인내, 그리고 그분이 드린 온전한 예배에 의해 다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지만, 종종 예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특히 신뢰의 문제로 시험을 받을 때 이렇게 기도를 드리기 원합니다. “예수님,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완전한 믿음으로 제 연약한 믿음을 강하게 해주십시오.” 이미 그 길을 가보신 예수님께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신뢰와 인내와 예배는 바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소망이 없는 광야에서 그분과 동행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에 동참하여 그분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실제 삶에서 예수신경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에게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해주신 일을 기억하며 광야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동시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주는 것입니다. 나도 실패하지만 저 형제자매도 실패합니다.
그때 왜 실패했느냐고 손가락질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 실패하는 존재이지만 주님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서로 격려하고 힘을 주고 기도하며 하나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