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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4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17 ✦
예수신경의 공동체(5)
“기쁨의 공동체”
(요한복음 2장 1~11절)
1.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갈증
우리가 살면서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사실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는가, 왜 바라는가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모두 지금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갖기를 바랍니다. 돈, 자동차, 집, 최신형 전화기, 옷, TV 등과 같이 보이는 물건도 더 많이 갖고 싶어 하고, 기쁨이나 사랑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도 더 많이 느끼고 싶어 합니다.
사실 순수하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지금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 스스로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왜 이것을 간절히 바라는가? 나는 왜 그것을 원하는가?’ 세상의 헛된 욕심을 갈망한다면 우리에게 해가 되지만,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깊은 갈망입니다.
사실 그러한 영혼의 깊은 갈망은 인간의 특징입니다. 동물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동물은 그저 배부르고 등 따시면 만족하지만, 인간은 그런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큽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줘도 만족이 안 될 정도로 우리가 세상보다 더 큰 존재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뭔가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얻었더라도, 마음속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들 때가 있고, 뭔가 마음속에 아련한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느낌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도 계속 존재합니다.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더라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더라도, 계속해서 그 갈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깊은 갈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도 왜 그런 갈증이 있는가? 그것이 사실은 천국을 향한 갈망입니다. 진정한 본향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러니까 마침내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때 없어지는 갈망인데,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이 갈증이 완벽하게 해소되지 않습니다. 운동이나 여행이나 취미생활이나 드라마나 어떤 재미있는 활동을 했을 때, 순간적으로 기쁨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빈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면 참된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살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뭔가 다른 것으로 그 갈망을 만족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으로만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빌 3:18-21, 새)
이것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땅의 것으로는 우리의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 즉 천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갈망이 없게 채워주신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눈물로 말한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이들은 물론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복음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며,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땅의 것으로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으로 되는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 영원한 의미를 가진 천국의 갈망을 가진 것입니다. 이 천국을 향한 갈망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천국을 향한 갈망은 우리 안에서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향한 우리의 굶주림의 원천이 됩니다. 둘째로, 영원한 것이 아니면 그 어떤 의미도 만족하기를 거부합니다. 적당히 세상의 재미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한 만족을 항상 구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삶에서 하고 있는 활동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매일 하고 있는 일상생활의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중에 내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물론 돈도 벌어야 하고, 여행도 해야 하고, 골프도 쳐야 하고, 드라마나 영화도 봐야 하고, 좋은 음식도 먹어야 하고, 자녀도 공부를 잘해서 좋은 데 가야 하겠는데, 그런 일들이 내 마음에 참된 만족을 줍니까? 더 이상 갈망이 없게 해줍니까?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일에 그토록 우리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왜 그런 일에 우리가 우선순위를 두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참된 의미를 주고 참된 만족을 주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겠습니다. 바로 그것이 뭡니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 즉 예수신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합니다. 억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직분자이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위에서 이웃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인생에 참된 의미가 있고 마음속에 참된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즉 예수신경을 실천하는 삶을 살 때 그 채워지지 않던 내면의 갈증이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러신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귀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신경으로 살 때에만 우리가 인생의 참된 의미와 만족을 경험하고 갈증이 해소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신경을 실천하며 살 때,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영원한 것을 향한 굶주림이 있고, 그래서 간절히 목말라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영원히 그리고 무한정으로 만족시켜줄 기쁨의 생수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마르게 간절히 바라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것의 실체가 뭔가? 그 핵심이 뭔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기쁨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곳은 예수신경이 삶을 변화시킨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데, 그 변화의 큰 특징은 바로 천국 백성들이 예수님 안에서 그 갈망을 발견하고 참 만족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많은 시간을 들여 하고 있는 활동들이 주는 것과 같은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내적 만족이며 영원히 지속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기쁨의 생수를 넘치게 마실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분이 주는 기쁨은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시켜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여기서 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하고 있는 활동에 비교해도 됩니다. ‘모든 다른 활동을 하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 기쁨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늘의 기쁨을 땅에 아주 조금 떨어뜨리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그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부릅니다. 표적이 일반 기적과 다른 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기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표적은 기적인 동시에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계시입니다. 그러나 그 번쩍이는 빛은 표적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표적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창문이 됩니다. 삶의 어떤 순간에 ‘아!’ 하고 깨닫는 것처럼, 이 계시의 빛은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그런 빛을 기대하지 않고 있던 한 결혼식장에서 그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2. 표적으로서의 기적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초대를 받고 참석하는데, 거기에는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와 또 제자들도 있습니다(1-2). 지금도 유대인들이 ‘마젤 토브(Mazel Tov)’ 즉 ‘행운을 빈다’라고 말하듯이, 그 마을 전체와 나사렛 같은 이웃 마을 사람들은 안식일에 입는 좋은 옷을 입고 한 젊은 커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3절)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잔치의 흥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문화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면 결혼식은 밋밋해지고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그런 기쁨이 없는 결혼식은 결혼식이 아닌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들 예수에게 좋은 뜻을 가지고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 대해 알려주는데, 이것은 그가 뭔가를 하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도와달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좀 의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4절)
1) 기쁨의 표적
마리아는 예수가 사람들 앞으로 나서서 자기 능력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는 자기가 선택한 때에 자기가 선택한 곳에서 사역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능력을 보이게 되겠지만,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에게 자신을 드러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 그 자체는 마리아가 자기 아들의 때에 순종하면서 일어납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5-6절)
마리아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해라.’ 하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이 잔치 자리에 물 두세 통이 들어가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항아리들이 무엇을 위해서 여기 있다고 합니까?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6). 그러니까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요한은 한 가지 중요한 핵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돌 항아리들에 담긴 물은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물건을 정결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물건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서도록, 이 물은 그들을 정결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이 항아리에서 물로 손을 씻고 정결한 상태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고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7-10절)
예수님은 정결 예식을 위해서 손을 씻는 물을 기쁨의 잔치 때 마시는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성탄절에 선물을 주고받는데, 선물마다 가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의 가격의 가치를 넘어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포도주를 뛰어넘어 그 안에 있는 신비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서, 의식을 위한 정결 예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혼인잔치의 즐거움이 강조됩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정결은 물로 손을 씻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새롭게 바꿔주신 포도주를 마실 때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은 단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그 양을 더욱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물 두세 통이 들어가는 항아리가 여섯 개였다면, 지금으로 약 400리터 정도나 되는 많은 양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객들이 마시기에 넘치고도 남는 것입니다. 이미 다 마셔서 떨어진 상태인데, 더 많은 양을 공급해줌으로 넘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풍성함과 넉넉한 기쁨은 천국의 특징입니다.
또 연회장이 이 포도주를 보고서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양적으로 풍성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뛰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기쁨은 양적으로도 아주 풍성하고 질적으로도 그 기쁨의 깊이가 다른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천국의 특징입니다. 천국은 기쁨이 그저 간신히 넘칠까 말까 할 정도가 아니라, 아주 풍성하게 넘쳐나는 곳입니다. 예수신경이 실천되는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모든 기쁨이 이렇게 풍성하게 넘치는 곳이고, 또 그 기쁨은 잠깐 있다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질적으로 뛰어나고 깊이 있고 지속적인 기쁨입니다.
우리 삶에 이런 풍성함이 있습니까?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런 풍성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넘치고 있습니까?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문제의 핵심은 예수신경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채우고도 넘쳐서 옆으로 흘러 나가 이웃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풍성한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2) 예수님의 표적
이 일로 인해서 결혼식의 즐거움이 하객들에게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분위기가 그냥 끝날 뻔했는데, 더 좋은 게 왔으니까 더 기뻐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처럼,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간절히 바라던 천국의 기쁨이 지금 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가나의 결혼식에서 일어난 기적을 요한이 ‘표적’이라고 부르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11절)
여기 보면, 이 표적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신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 즉 자신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과 이 땅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 사명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만드셨는데, 그때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이 항아리 속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다면, 그 믿음의 눈은 거룩한 물이 아니라 거룩한 기쁨의 포도주를 보게 됩니다. 믿음의 눈은 포도주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예수님의 정체성도 봅니다. 이 포도주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기쁨을 보여주고 제공해줄 뿐 아니라 그 기쁨 자체가 되는 분이십니다.
온 인류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가나의 결혼식 때 사람들이 맛본 포도주와 같은 풍성함입니다. 그런데 그 풍성함과 기쁨의 본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의 갈망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에서 나오는 기쁨을 진정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는 것이 사실은 결국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것은 예수님만이 제공하시는 결혼식 포도주의 즐거움과 풍성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제공하시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영광’이며, 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맛보게 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로 우리는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신경이며,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인생의 참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합니다.
3. 사랑이 핵심이다
우리가 목장으로 모이는 주된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고 그 풍성함을 함께 맛보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을 미리 연습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바로 그런 사랑의 나눔과 주님 안에서의 풍성함과 즐거움이 넘칩니다.
천국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싸움이 있겠습니까? 테러나 폭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치 천국 사람(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천국 백성)은 천국에 가서 할 일을 이 땅에서 미리 연습해보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고, 특히 목장에서 그런 것을 연습해보자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교회인데, 이 땅에 사는 한 그런 풍성함을 맛보기도 하지만 또 끊어지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맛보는 기쁨은 계속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가면 그 사랑과 풍성함과 기쁨이 정말 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이전에 어떤 일이나 활동을 했을 때 참 기쁨을 맛본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했을 때 너무 기뻤습니까?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드라마를 보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좋은 성적을 받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에서 성공할 때도 기쁨이 있습니다. 인정을 받을 때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기쁨은 거기에 또 뭐가 있는가 하면 아쉬움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 기쁜데 ‘좀 더 잘할 걸. 좀 더 많이 할 걸...’ 하는 아쉬움도 함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일시적인 즐거움 밖에 주지 못합니다. 항상 아쉬움이 남고, 씁쓸함도 따라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원한 천국까지 가져갈 수 있는 일을 할 때 지속적인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럼 어떤 것이 영원히 남습니까? 이 땅을 떠날 때 천국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돈은 아닙니다. 명예도 아닙니다. 아무리 미국의 대통령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별 것 아닙니다.
영원히 남는 것, 하나님도 인정해주실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로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것이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사랑만이!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고전 13:8, 새)
우리가 천국에 가서 무슨 예언을 하겠습니까, 방언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우리가 할 일은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도 사랑을 하지만, 천국에서는 계속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혼 구원과 제자 만드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섬깁니다. 특히 주님을 모른 채 영원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저 영혼을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시고, 또 우리도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과 함께 천국에 가고 싶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만이 영원한 가치가 있고, 또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고 천국에 가도 영원히 남는 것은 그겁니다. 그리고 그것만을 저 영원한 천국에까지 가져갈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가져갈 게 없습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었던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 1898~1963)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도 쓰고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도 쓴 사람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와 신화들을 읽고 쓰면서 가끔씩 경험한 기쁨의 맛을 간절히 원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와 신화들은 일시적인 기쁨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또한 고백했습니다. 그는 더 많은 기쁨이 다른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했는데, 그는 오히려 자기가 추구하던 것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931년 9월 19일 늦은 시간에 동료들과 토론이 벌어졌는데, 루이스에게 그들은 몇 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었고, 그 중 한 사람은 지금은 우리에게도 아주 유명하게 된 J. R. R.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휴고 데이슨(Hugo Dayson)으로, 그는 독서회의 강연과 강의를 맡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루이스와 함께 잉클링스(The Inklings)라는 문학 모임의 핵심 회원이었습니다.
그 날 밤 그들은 루이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자네는 왜 이교도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들이 말하는 희생 장면에 놀라울 정도로 감동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이야기에 나오는 희생을 읽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그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갖는 의미가 루이스를 깨어나게 했고, 그는 비로소 예수 이야기가 자신이 찾던 기쁨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이스는 톨킨과 데이슨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한 뒤에, 친한 친구인 아서 그리브스(Authur Greeves)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분명히 참된 이야기일세. 그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가운데 작동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점을 갖고 있다네. 다른 이야기들은 인간의 이야기인 반면에, 그것은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점을 자네도 명심하게.”
더 중요한 것은, 그날 밤에 발견한 것을 루이스가 ‘기쁨’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연을 그린 그림을 감상하거나, 노르웨이의 신화를 읽을 때, 그리고 언덕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거나 달빛이 비친 풍경을 바라볼 때, 가끔씩 그런 기쁨을 살짝 맛보곤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기쁨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따금씩 찾아온 기쁨은 루이스로 하여금 그 기쁨의 참 근원을 찾아가도록 더 깊이 이끌었습니다. 다른 어떤 기쁨도 그에게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참된 기쁨은 마침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비로소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의 발견은 그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가 간절히 바라고 찾던 것이 결국에는 기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찾던 것의 실체는 그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간절히 찾던 것은 이 기쁨이 항상 가리키고 있는 한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무엇의 기쁨인가? 솔직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후 나는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거의 잃고 말았다.” 루이스는 왜 기쁨에 대한 관심을 잃어 버렸습니까? 그가 발견한 기쁨은 예수님이 베푸신 포도주(생수)를 마신 결과로 발생한 것이지, 포도주(생수) 그 자체가 기쁨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 기쁨이시며, 오직 예수님만이 이 만족을 주신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의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이것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참된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성공, 돈, 재산, 자녀의 성공 같은 것으로 참된 만족이 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참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사회에서 높이 올라가고, 학벌이 좋고, 성공하고, 자녀가 최고의 학교를 나오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살더라도, 거기엔 진정한 기쁨이 없습니다. 참된 기쁨과 만족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오직 예수! 이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우리 인생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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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정말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오직 예수님께 투자하는 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나는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이 예수님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어떤 헛된 것을 추구합니까?
적당히 신앙생활하면서 하라는 것은 하지만,
정작 주인은 아직 ‘나’이고 내가 원하는 것만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도 여기 나오신 분들은 주님을 향한 갈망과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려는 열정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직 예수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 오직 예수님만을 구하는 삶,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먼저 구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먼저 할 때,
나머지 모든 것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거꾸로 가서는 안 되고 주님만을 먼저 구하기를 원합니다.
다시 한 번 결단하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주님, 제가 헛된 것을 너무 많이 구했습니다. 지금도 헛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선순위를 바로잡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구하기 원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