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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17일 수요예배

예수신경 14

예수신경의 공동체(2)

겨자씨 공동체

(마태복음 1324~32)

 

1.   겨자씨와 천국

 

예수님이 주로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 나라인데, 하나님 나라는 그 안에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기존의 관념과는 반대된다는 그런 역설이나 모순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역설이라는 것이 천국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역설들 중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낙원(Paradise)이 임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면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이고, 죄는 지옥으로 쫓겨날 것이고, 불의한 것들이 새롭게 될 것이고, 폭력은 없어질 것이고, 오직 사랑과 평화가 사회를 이끌어갈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그 모든 것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을 낙원이라고 하시는 대신, 하나의 역설을 통해 천국을 정의하십니다. 만일 천국이 무엇과 같은지 알고자 한다면 놀랍게도 겨자씨를 보라는 것입니다. 겨자씨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굉장히 작습니다. 깨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겨자씨를 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때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아니, 천국이 어떻게 저런 겨자씨 같은 것인가?’ 그 말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다 놀란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통해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그 당시 사람들이 기존에 생각하던 것들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했던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되겠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구약에 나오는 천국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던 천국은 이런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 한 분만이 왕이시고, 모든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토라(율법)를 순종하게 됩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정복하기 위해 에워싸는 대신, 그곳에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순례를 오게 됩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이 기쁨에 동참하게 됩니다. 들짐승들, 심지어 사자 같이 무서운 짐승도 온순한 양처럼 되고 가정용 애완동물들과 함께 장난을 칩니다.

 

이러한 모습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바로 낙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낙원 대신 하나의 모순을 제시하십니다. 천국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럼 뭡니까?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1-32)

 

예수님 시대 사람들에게 겨자씨는 모든 씨 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호화스러운 낙원과 같은 곳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겨자씨와 같은 곳이라고 하십니다.

 

미국의 국립공원들, 특히 서부에 가보면 엄청나게 큰 나무들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에 있는 Yosemite National ParkSequoia National Park에 가보면 나무들이 엄청나게 큽니다. 또 워싱턴(Washington) 주에 있는 Olympic National ParkMt. Rainier National Park에 가보면 정말 엄청나게 키가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국이 그런 거대한 나무와 같은 것이 아니라 겨자나무와 같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요즘의 마케팅 전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셨고 관심도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천국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면 천국이 엄청나고 위대한 곳이라고 소개하셔야 하는데, 천국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라는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 역설입니다. 천국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영적 역설이 성경에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왕이면 극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시면 다들 믿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무기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또 부활의 첫 증인이 여자들이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당시 숫자를 셀 때 들어가지도 않고 재판에서 증인이 될 수도 없는 여인들을 왜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내세웁니까? 이왕이면 교회의 지도자였던 베드로 같은 사도나,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던 니고데모 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 같은 사람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었다고 기록해 놓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텐데, 왜 하필 여자들이고 그것도 막달라 마리아 같은 아주 비천한 여자가 왜 부활의 증인입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못 믿을 이야기를 더 기록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라는 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위대함과는 거리가 먼 곳입니다. 천국은 분명히 위대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곳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까? 예수님에게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상적인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독수리처럼 거의 볼 수 없는 희귀한 새가 아니라, 참새처럼 흔한 것입니다. 천국은 국립공원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엄청난 아름드리나무가 아니라, 뒷마당에 자라는 나무처럼 바로 옆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엄청나게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평생 어쩌다 한 번 맛볼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진귀한 음식이 아니라, 아침에 마시는 커피처럼 아주 일상적인 것입니다. 천국은 세월이 지나면서 나이가 드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행동과 모습들 위에다, 사랑이라는 특별한 행동을 덧입혀서 특별하게 만드십니다. 천국은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데, 거기에 사랑이 더해질 때 놀라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대함이나 영광이나 위엄 가운데서 찾지 않으시고, 지극히 일상적인 것에서 찾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신경(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그들을 특별한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비천한 사람들이 예수신경을 따라 살아갈 때 위대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천국이라고 하면 완벽한 낙원을 바라는 우리의 성향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역설을 통해 천국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엄청난 것, 위대한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에는 셀류코스 왕조나 헬라의 영향으로 헬라식 도시들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의 수도는 세포리스였는데, 예수님이 자라신 나사렛에서 3마일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아주 가까운 곳이었으며,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거기서 큰 토목 공사가 벌어졌을 때 예수님과 그 아버지 요셉이 참여했음에 틀림없습니다. 목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위대한 세포리스가 성경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화려함과 위대함은 예수님께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저번에 수요예배 때 왕들을 살펴보았고, <말씀의 삶>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댜의 왕들을 살펴보는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진 다음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그 사람 때 나라가 가장 부강했고 저 남쪽까지 땅을 다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단 몇 절뿐입니다(왕하 14:23-29).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그가 악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인간적인 화려함이나 위대함은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신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를 형성한 것은 예수신경이며, 예수신경대로 사는 공동체의 모습은 겨자씨로 가득한 바구니와 같은 모습이 됩니다. 그 바구니에는 삶의 변화라는 특별함으로 가득한데, 그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거룩한 사랑이며, 그 거룩한 사랑은 놀랍게도 예수신경을 실천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할 때 보통 어떻게 합니까? 자녀가 세상에서 잘되기를 다 바랍니다. 내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 잡고, 연봉도 높고,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사실 그런 것에 하나도 관심이 없으신데, 우리는 관심이 높습니다. 정작 하나님이 가장 관심 있으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전혀 살지 않으면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을 높게 쳐줍니다. 세상에서는 잘 안 되었는데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높게 평가를 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믿음으로도 성공하면 좋겠지만, 사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서 성공하기가 참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인정을 받을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교회를 다니는 분들도 세상의 인정을 받는 길을 자꾸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으로 가져갈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올 텐데, 그 날을 대비하여 살아야겠습니다.

 

 

2.  겨자씨의 역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역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놀랍습니다. 크게 세 가지의 놀라운 점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가운데서 싹을 틔우는 겨자씨

 

예수님은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그 나라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대부분 한참 떨어지고 부족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자신을 따르게 하시고, 이어서 그들을 천국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을 부르셨는지를 확인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종교적으로 열심 있는 바리새파 지도자들이나 돈 많은 사두개파, 혹은 권력을 쥔 헤롯당 출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대신, 배운 것 없는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또 세리를 부르셨으며(19:1-10), 평판이 좋지 않은 여인도 선택하셨습니다(7:36-50). 그 외에도 수많은 비천한 사람들과 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교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9:10-11, )

 

그런 사람들의 목록은 얼마든지 계속 늘릴 수 있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천국은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이나 용사들, 또는 유대교의 엘리트들과 그 측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하고 미천한 민중들과 부랑자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1980년 동계 올림픽 때 미국 아이스하키 팀의 감독을 맡아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소련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땄던 허브 브룩스(Herb Brook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최고의 선수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필요한 선수들을 선택한다.” 최고의 팀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선수를 택하는 것이지, 최고의 선수들을 모아 놓았다고 최고의 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적합한 사람들을 찾으셨고, 그런 사람들이 다 겨자씨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완벽하고 엄청난 곳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크고 위대하고 굉장한 것들을 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거대한 아름드리나무가 아니라 아주 작은 겨자씨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삶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2)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퍼져나가는 겨자씨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은 겨자씨가 처음 땅에 심겨졌을 때는 비록 작지만 나중에는 커다란 관목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성장합니다. 주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라는 씨앗처럼 한 번에 하나씩,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퍼져나갑니다.

 

물론 예수님도 많은 군중에게 말씀하시며, 어떤 때는 성전 뜰에서 권력자들과 깊이 있는 토론을 벌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시고 만져주셨습니다. 그 중 한 예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셨던 사건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 절하였다.” (9:35-38, )

 

그분은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아침에는 제자들과 함께 있으셨고, 무더운 오후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셨으며, 서늘한 저녁에는 온갖 사람들과 더불어 식탁에 둘러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거대하고 화려한 사역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작은 겨자씨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사역을 강제적으로 요구하는 시스템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역이 거룩한 관계의 중심에 있는 사람을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커다란 사건이란 작은 사람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놀랍게 비쳐진 것은 그분이 작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도 작아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평범하기보다는 특별하기를, 비천하기보다는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더욱 높은 데를 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가 바로 그 높은 자리를 바라고 예수님을 따른 게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사람을 추구하셨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3)  평화롭게 성장하는 겨자씨

 

사람들을 놀라게 한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나가는 예수님의 방법이 평화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천국을 세우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는 인내와 평화 가운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방식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폭력을 사용해서 강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회에서 예수님이 선택하실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을 상징하는 두 가지 중 하나는 겨자씨이고 다른 하나는 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머니에서 겨자씨를 꺼내시고, 칼은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평화를 선택하시고 폭력은 반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칼은 젤롯(열심) 당원들이 사용하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신경에 나오는 대로, 자신이 추구하는 나라는 폭력과 함께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26:52-54)

 

예수님은 얼마든지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고, 당연히 십자가에서 달리지 않을 힘도 있으셨습니다. 비록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원하기만 하면 내려올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부분인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예수님이 평화를 선택하셨음을 잘 설명해줍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또 하나의 역설을 말씀하시며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4-26)

 

천국은 밭에 좋은 씨를 뿌린 농부와 같습니다. 분명히 좋은 씨를 뿌렸는데, 밤사이에 대적들이 와서 밭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그래서 결실할 때가 되니까 알곡뿐 아니라 가라지도 보입니다.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7-28)

 

주인의 종들은 밭에서 가라지가 알곡과 함께 자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가라지를 뿌리째 뽑아버릴 것을 제안합니다. 가라지를 뽑아버린다는 것은 폭력적인 이미지이며, 젤롯 당원들이 하는 일을 암시해주는 표현입니다. 그냥 보면 악한 가라지를 다 뽑아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다른 말을 합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29-30)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천국은 바로 이렇다는 것입니다. 추수하는 날까지 가라지가 곡식과 함께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입니다. 왜 그냥 둡니까? 추수 때 하나님께서 가라지를 뽑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첫째, 지금은 가라지를 뽑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입니까? “추수 때”(30)입니다. , 심판의 날에 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가라지와 곡식을 구분하여 가라지는 불사르실 것입니다. 그것도 지금 뽑아버리는 게 아니라, 심판 날에 거두어서 묶어 불태우는 것입니다.

 

둘째, ‘가라지를 뽑는 것은 너희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합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추수꾼, 즉 천사들을 시켜서 하실 것입니다. 왜 주인의 종들이 하면 안 됩니까? 그냥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인이 말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종들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의도는 선하고 좋은데, 곡식까지 뽑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실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정의를 외치며 악한 자들을 심판하려고 해도, 악한 자들만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까지 상처를 주고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지도자들이 너무 악하게 할 때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러다 그것을 다 징계하면 속이 통쾌해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악을 행한 자라도 다 벌을 하게 되면 그 가족들이 또 상처를 다 받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아무리 정의롭게 한다고 해도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와 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정의롭게 한다고 해도 남을 다치게 만듭니다. 그것도 알곡까지 다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가라지를 뽑겠다는 의도는 좋은데 곡식까지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내가 할 테니 놔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한계를 아시기 때문에 말리시는 겁니다.

 

 

3.   개인 안의 겨자씨

 

오늘 말씀에서 겨자씨와 곡식과 가라지는 역설적으로 천국을 구성하는 재료들을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천국은 예수신경이 삶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입니다. 예수신경으로 삶이 변화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신경을 실천하여 변화된 삶의 특징은 폭력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또한 마음이 급해서 자기가 직접 나서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 가운데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의 주머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것을 심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에 대해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하나의 겨자씨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준 높은 유대 지역이나 화려한 대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의 아주 보잘것없는 동네인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름드리나무가 아니라 겨자씨이셨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전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친인 요셉은 명예가 실추된 차디크’(의인)였고, 그분의 모친 마리아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아프’(간음한 여인)라고 손가락질을 받은 비천한 아나빔’(경건한 빈자) 출신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사촌인 세례 요한은 성령에 붙들려 열광적인 삶을 사는 가운데, 광야에 거하면서 메뚜기를 잡아먹었고, 온 나라에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 요한은 마케루스 요새의 감옥에 갇힌 뒤 결국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더 심한 것은 그분이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맘제르’(사생아)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대교 엘리트들은 그를 무시했고, ‘학교 공부를 못 받았다. 비천한 나사렛 출신이다라는 등, 온갖 빈정거리는 말과 비방하는 말로 예수님에게 꼬리표를 달아줌으로써 그분의 명성에 상처를 주려고 했습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7:14-15)

 

나중에는 결국 예수 근처에 가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누구든지 그가 있는 곳을 알거든 알려 달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 (11:53, 57, )

 

예수님은 위험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9:51)

 

예수님은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하나의 씨가 죽으면 그 이후에 신비롭게 자라서 커다란 식물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도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몸은 죽을지라도 부활 가운데 싹이 터서 곧 온 세상에 미치도록 자라게 될 것입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입니다. 가장 낮아지고 비참해지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로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역설의 연속입니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한 알을 통해 엄청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교회로서 무엇을 추구합니까? 혹시 우리가 추구하는 게 큰 사이즈, 화려함, 영광, 높음, 부유함 같은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히려 작아지고 낮아질 때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지금 우리가 작은 겨자씨 같아 보여서 실망이 될 때가 있습니까? 힘이 없어서 무력함을 느낍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큰 나무가 아니라 작은 겨자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겨자씨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신경을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하며 나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며, 그러한 우리가 모인 이 사랑의 공동체인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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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예수님과 함께하기(1): "요단 강에서" (마 3:1-17) - <예수신경> 25 (8/30/17) kpccoh 2017.08.31 879
113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6): "예수 안에서 전하기" (마 10:1-10) - <예수신경> 24 (8/23/17) kpccoh 2017.08.24 935
112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5): "예수 안에서 용서하기" (마 18:21-35) - <예수신경> 23 (8/16/17) kpccoh 2017.08.17 1066
111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4): "예수 안에서 회복하기" (요 21:15-22) - <예수신경> 22 (8/9/17) kpccoh 2017.08.10 900
110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 (3): "예수께 항복하기" (막 8:27-38) - <예수신경> 21 (8/02/17) kpccoh 2017.08.03 1007
109 니카라과 단기선교 보고 및 간증 (마 28:18-20) - 홍영락(Steve Hong)전도사 (7/26/17) kpccoh 2017.07.27 485
108 가정교회 리더쉽 컨퍼런스 간증 및 나눔 - 허연희 주재윤 장순덕 박태경 집사 kpccoh 2017.07.20 537
107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 (2): "예수 안에 거하기" (눅 10:38-42) - <예수신경> 20 (7/05/17) kpccoh 2017.07.06 966
106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 (1): "예수를 믿는다는 것" (막 7:24-30) - <예수신경> 19 (6/28/17) kpccoh 2017.06.29 1282
105 예수신경의 공동체(6): "영원의 공동체" (마 25:31-46) - <예수신경> 18 (6/21/17) kpccoh 2017.06.22 829
104 예수신경의 공동체(5): "기쁨의 공동체" (요 2:1-11) - <예수신경> 17 (6/14/17) kpccoh 2017.06.14 1194
103 예수신경의 공동체(4): "회복의 공동체" (마 8:1-4, 9:20-22) - <예수신경> 16 (5/31/17) kpccoh 2017.05.31 956
102 예수신경의 공동체(3): "공의의 공동체" (눅 4:16-30) - <예수신경> 15 (5/24/17) kpccoh 2017.05.24 1027
» 예수신경의 공동체(2): "겨자씨 공동체" (마 13:24-32) - <예수신경> 14 (5/17/17) kpccoh 2017.05.17 1035
100 예수신경의 공동체(1): "변화의 공동체" (막 3:31-35) - <예수신경> 13 (5/10/17) kpccoh 2017.05.10 918
99 예수신경의 이야기 (6): "여인들과 긍휼" (눅 9:49-56) - <예수신경> 12 (5/03/17) kpccoh 2017.05.04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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