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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1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18 ✦
예수신경의 공동체(6)
“영원의 공동체”
(마태복음 25장 31~46절)
1. 예배인가, 공동체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일부분만 보여주고, 그것도 가끔씩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2천 년 동안 천국을 상상으로 그려왔습니다. 상상은 눈에 보이는 그림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래서 많은 화가들, 특히 기독교 화가들이 그린 성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시각을 통해 그림은 우리의 지성에 강력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천국에 대한 인간의 확신도 변했는데, 때로는 아주 급격하게 변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천국이 약간 위에(다락방 쯤에) 있다고 생각하다가, 이후에는 더 고상하게 저 하늘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을 파문하고 두 그룹은 늘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가운데 예수회(Jesuit)가 종교개혁자들과 같은 의견을 가진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천국을 예배의 장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천국이 예배를 위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배를 준비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예배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천국관은 그들에게 삶에 관한 관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천국이 예배를 위한 곳이기 때문에 지금 열심히 예배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서는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고 하며, 따라서 찬양과 예배와 하나 됨과 휴식만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종말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이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기독교의 주요 교단과 교파들은 대부분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한 천국은 신학자, 신비주의자, 고독을 즐기는 사람, 그리고 여행할 때 음악(특히 서양 클래식 음악)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잘 와 닿는 곳입니다. 그들의 천국은 한마디로 ‘하늘에 있는 나라’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을 가리켜 영광스러워진 세상과 완벽해진 사회, 즉 예배와 가족과 사회가 조화를 이룬 곳으로 묘사합니다. 예배도 드리지만, 세상에서 죽음으로 헤어졌던 부모와 자녀가 다시 만나고, 또 친구와 다시 만나 우정이 다시 새로워지는 곳입니다. 모든 사람이 완벽한 천국 안에서 영광스럽고도 영원한 봉사의 사명을 받습니다.
그러한 천국은 대인관계가 원만한 사람들, 위원회를 구성하여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대도시 생활의 분주함을 원하는 사람들, 또 여행할 때 토크쇼(특히 문화 관련 토크쇼)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와 닿는 곳입니다. 그들의 천국은 한마디로 ‘땅에 속한 나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가 휴가를 선택할 때 어디를 가기로 선택하는지 보면 그 사람의 천국관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한 사람이 여기에 갔다 저기에 갔다 하기 때문에 아주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습니다.
한적한 장소를 찾아 텐트를 들고 산과 들로 나가는 사람은 천국을 예배의 장소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휴가 때 대도시나 디즈니월드 또는 사람들이 붐비는 해변 가로 가는 사람, 여러 사람이 함께 밴이나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지로 떠나는 사람은 천국을 공동체의 장소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합니까? 천국은 두 가지 다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위층에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예배처가 있고, 아래층에는 인간 사회의 기쁨과 완벽한 문화의 즐거움이 있는, 복층으로 된 천국이 있지 않겠습니까?
2. 예수와 천국
예수신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인데, 이것이 영원에 대해 우리가 시각을 형성하는 것을 어떻게 도와줍니까? 우리는 영원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이리저리 억측할 필요도 없고 너무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 또는 영원한 나라가 심판과 함께 시작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고, 아바 아버지와 그분의 백성이 그곳에서 식탁 교제를 나누며, 그 영광과 강렬함과 찬란함이 엄청난 곳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천국은 심판과 함께 시작되며, 그 심판이 끝나면 그곳 전체가 하나님과 또 이웃과의 영원한 교제를 위한 곳으로 꾸며집니다.
1) 먼저 임하는 심판
성경적 종말론에 의하면, 심판은 부활 뒤에 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천국에 관하여 수많은 추측들이 있었던 것만큼 부활에 대해서도 많은 논쟁들이 벌어졌습니다. 부활은 죽음 이후에 현재의 우리 몸이 영원한 천국에 적합하도록 변화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심판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하여 양은 영원한 생명으로 보내고 염소는 영원한 불로 보내는 것처럼,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두 종류로 심판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한 번 심판받으면 그 결과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4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1절)
이 말씀을 보면 지옥이라는 곳은 원래 사람을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니라 사탄과 악령들을ㅇ 위해 예비 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46절)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게 영생이 아니고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게 영생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안 죽고 사는 것은 영벌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 13:41-43)
“누가 더 높으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냐,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나라에 들어와 내 밥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고, 옥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겠다.” (눅 22:27-30, 새)
종말에 관하여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습니다. 신학에서도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이 있는데,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천년설은 받아들이기 힘들고 교회는 전통적으로 후천년설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데살로니가전서 4~5장과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휴거, 환난, 두 번째 재림, 천년왕국, 마지막 심판, 그리고 천국이라는 복잡한 과정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주장합니다. 특히 이단들은 이런 종말에 관한 것을 들고 나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사건들을 훨씬 더 단순하게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그 일들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고 적게 아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2) 그 다음에 오는 교제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에 일어날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반면, 심판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같습니다. 심판 다음에는 엄청난 규모의 축제와 잔치가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교제가 다시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 교제는 영원한 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막 14:22-25)
여기서 분명히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이 올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가리켜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극찬하시면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마 8:11-12)
천국에도 식탁이 있는지, 화장실이 있는지, 또 수정으로 만든 잔, 비싼 그릇, 튼튼한 금 세공품, 푹신푹신한 황금보좌 같은 것들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상태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교제라는 사실입니다. 천국에 화장실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더 중요한 건,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영원히 사랑하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현재의 나라가 예수신경에 비추어볼 때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면, 종말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신경에 의해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사랑을 안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땅의 것이든 영원한 것이든 간에,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이 땅에 사실 때에도 예수님은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을 가르쳐주셨고, 영원한 저 천국에서 완벽한 사랑의 공동체로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가 저 하늘에서도 어떤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모습을 예수님이 암시하신 것에서 영원한 공동체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마 19:28)
조금 전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누가복음 22장은 최후의 만찬이 끝날 때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툴 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 마태복음 19장은 부자 청년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질문한 것에 대해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슬퍼하며 돌아간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라고 하시니까 제자들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뿐 아니라 천국에서 열두 보좌에 앉아 열두 지파를 심판한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우리는 영원의 모습이 어떤지를 자세히 다 알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윤곽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체적인 모습이 충분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더 뚜렷해져야 하는 것은, 이 전체적인 영원한 천국의 모습이 우리의 지금의 삶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공해준다는 점입니다.
3. 올바른 관점 – 종말이 시작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관점이 뭔가 하면 바로 종말(마지막)이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한 것, 즉 종말에 대한 관점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삶에 올바른 관점을 제공해줍니다. 믿음의 성장을 이끌어주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우리가 역사의 끝을 보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묵상하고, 이 종말이 우리의 일상의 시작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종말이 시작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을 보면서 지금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다 천국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 천국의 백성다운 삶을 지금 살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15세기 영성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들을 지금 실천해야 한다.” 천국에 가서 할 것을 지금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신경은 현재의 삶에 관한 신앙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신경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신경에 따라서 지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영원히 살면서 하는 일이 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예배인가, 공동체인가를 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천국인가, 아니면 사랑하던 사람과 죽음으로 헤어졌는데 다시 만나 기쁨으로 교제하는 것인가? 둘 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영원히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것을 알 때 지금의 삶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주어지며, 그 관점과 함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공동체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삶에 관하여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가끔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굳이 교회에 안 나가도 나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교회에 안 나오는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혼자 해도 충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 꼴 보기 싫어서 안 나오든지, 무슨 문제가 있든지, 뭐가 틀려서 안 나오든지, 자기의 문제 때문에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천국에 갔는데 ‘나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만 항상 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미워해서 교류를 하지 않는 그런 천국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천국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한다면 이웃도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부족하지만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함께 힘을 모아서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유명한 분인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는 현대의 고전이 될 만한 책을 남겼는데, 그 책 제목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지성)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참 지식’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해줍니다.
만일 영생이 성부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라면, 우리는 우리가 식탁 교제를 나누게 될 그분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것저것 배운 단편적인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어떤 전통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헌신하도록 예수신경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부분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영생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 영생이라면, 우리는 지금 그분과 교제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저 영원한 나라에서 할 일에 대하여 스스로를 미리 준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와의 영원한 교제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한 가지 구체적인 방법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중심, 특별히 ‘성부 하나님 중심으로’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성경을 읽기도 하고, 신학적인 논쟁을 준비하기 위해, 또는 감정의 응어리를 풀고 위로 받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정보를 얻으려고 성경을 읽기도 합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관계를 세우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위해서만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는 사명,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역시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할 때,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진짜로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성경 읽기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의사전달을 넘어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성경 읽기는 정보 습득이 아니라 믿음 성장의 길이 되며, 사랑에 관하여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소위 큐티(QT)를 하거나 통독을 할 때, 여러 주석이나 성경공부 교재나 그 외의 도구들은 옆으로 치우고, 오직 노트 한 권과 펜(연필)을 준비하여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운 것을 기록해보십시오.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는 이유는 기록을 하지 않아서입니다. 기록을 할 때 많은 것이 변화가 됩니다. 읽고 묵상하고 기록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오직 아바 아버지에 관해 배운 것만 써보는 겁니다. 때로는 묵상과 통독이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가 될 때 성경을 성부 하나님 중심으로 읽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 보는 겁니다. 그럴 때 놀랍게도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정말 듣기 원한다면, 성경 읽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은 안 읽으면서 다른 데서 자꾸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하고, 예언 기도를 하는 사람을 좇아다니고 그러면 잘못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성경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는데, 그 중에는 성 어거스틴도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뜰에서 하나님께 신음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이것을 집어 들고 읽으라”라는 어린 소년 또는 소녀의 음성을 듣고서 회심했습니다. 그는 그 음성을 듣고 성경을 집어 들어 펼친 다음 두 구절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3-14)
그는 그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구절을 다 읽기도 전에 견고한 신뢰의 빛이 내 마음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 어거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아바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여 흘러넘치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 외에 교회 역사에서 영적 거인들이 남긴 뛰어난 책들을 읽으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든든히 할 수도 있습니다. 크게 네 가지의 기독교 전통이 있는데, 각각에 속한 대표작들은 이런 것입니다.
- 동방 정교회의 <필로칼리아(The Philokalia)>
- 로마 가톨릭 소속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묵상의 능력(Inner Experience)> (두란노 간)
- 개혁,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간)
- 성결 진영에 속한 토저(A. W. Tozer)의 <하나님을 바로 알자(The Knowledge of the Holy)> (생명의말씀사 간)
성경 읽기와 교회 역사의 영적 거인들이 남긴 글 읽기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준비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입니다. 성경을 읽고 이런 책들을 읽은 후 지식이 쌓인 것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서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사는 겁니다. 그 핵심이 뭐겠습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법,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실천할 때, 우리는 저 영원한 천국을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이미 다 믿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 번 질문 드립니다. 여러분은 오늘 밤이라도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하게 될 일을 얼마나 준비하고 계십니까? 다시 말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할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지금 얼마나 연습하고 훈련하고 준비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한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셨습니까? 직장이나 사업체에 있을 때 무엇을 했습니까? 일하는 시간에도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얼마나 사랑을 실천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생각하며 일을 했고,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실천을 했습니까? 집에 돌아와서도 얼마나 사랑을 실천했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혹시 오직 자기나 자기 가족 밖에 모르는, 그런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천국에서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적인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천국에서 할 일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죄가 아예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살면서 천국에 없는 것인 죄를 열심히 짓다가 가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는 전도도 없습니다. 다 믿어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전도’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섬김’이라고 표현하는 게 훨씬 더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저 영혼을 우리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천국에서 없는 죄를 열심히 지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할 사랑을 지금 열심히 실천하고 연습하며 사는 것이 저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