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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4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15 ✦
예수신경의 공동체(3)
“공의의 공동체”
(누가복음 4장 16~30절)
1.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상과는 다른 질서, 곧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생활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 성장은 단순히 말씀 묵상과 성경공부와 예배 참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삶 공부에 참여해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또 공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신앙 성장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신앙 성장의 기초가 되고 계기가 되는 것이지, 그런 활동을 한다고 저절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이나 미국 대도시에서는 기도원에 올라가거나, 새벽기도를 매일 하거나, 매일 QT를 하거나, 예배에 한 번도 안 빠지고 꼬박꼬박 참석합니다. 그 자체로는 참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정말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고 있어도 지금 이 순간 딴 생각을 하고 있다면 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럼 신앙은 어떻게 성장합니까? 그런 말씀 묵상과 성경공부와 예배를 통해 배우고 깨닫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성경 전체의 핵심이 뭡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을 삶에서 실천할 때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QT, 기도, 예배가 다 뭔가 하면, 하나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을 하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 사랑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할 때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영적 성장은 예수신경의 실천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을 통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해서 하면 안 되고, 둘 다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사회에서 불의가 일으키는 여러 문제들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포함하며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것들이 제거되기를 원하며 그것을 위해 실제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벌어질 때 어떻게든 막으려 할 것입니다. 그냥 당하게 놓아둔다면 진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은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너무 이웃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충분히 내밀지 않으며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을 우려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1980년대 대학생 시절에 가난한 지역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야학 교사로 섬겼는데, 어느 진보적인 교단 소속 교회에서 운영하는 야학이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함께 일하는 분들은 평소에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것은 거의 관심이 없었는데, 그래도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있었고 그것은 바로 아모스 5:24 말씀이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그런데 하루는 거기 목사님과 교사들이 함께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거기서 두꺼비를 많이 잡았다고 합니다(진로 소주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교사들이 한 잔 하면서 어떻게 잘 가르칠지를 이야기하니까, 이분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충격을 받고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하나님만 너무 사랑하는 것도 문제이고, 그렇다고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만 너무 사랑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벌어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측면보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이웃 사랑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제도가 개인이 자유와 시민의 권리를 강조합니다. 또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고귀한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민주주의가 최고로 발달한 나라라고 해도, 여전히 불의 때문에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되고서는 흑인도 대통령이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오히려 인종간의 갈등이 더 많아졌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인종 갈등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는 아직도 평화로운 정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더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신경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로 노력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배우며 훈련의 과정 중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천국의 꿈을 생각하며,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 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천국의 정의가 무엇인가?
정의(justice)는 이 미국 사회에서 오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흉악한 범죄의 희생자가 될 때 희생자의 가족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나는 정의를 원한다. I want justice.” 이 말은 살인범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 영국 맨체스터의 공연장에서 폭탄이 터져 이십 여 명의 무고한 생명들이 죽고 수십 명이 다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못 폭탄을 사용했다고 하니 너무 잔인합니다. 그런 것을 보며 “I want justice!”를 외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내 눈앞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면 살인범을 향해 “I want justice!”를 외치게 됩니다. 지난 몇 년간 계속 일어난 테러 사건들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테러범들을 향해 “I want justice!”를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테러범들을 잡아서 법정에 세워 사형 선고를 받게 할 때,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정의라는 용어가 그런 식으로 너무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그것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의는 처벌을 원한다는 뜻으로 여겨지는 형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정의는 악을 저지른 사람에게 공정한 심판을 내리는 것인가?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뜻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악한 사람들을 벌하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회복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사건을 생각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즉 유대 종교지도자들, 로마 군인들, 빌라도를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다 해치워버리면, 그 반대쪽에 있던 사람들은 마음이 후련하고 통쾌했겠지만, 예수님은 로마 사람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구주와 주님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사람들, 원수들의 구원자도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정의는 ‘어떤 것을 바르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세계에서 그 기준은 토라, 곧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의는 율법을 따라서 일을 바르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어떤 것을 바로잡는 것은 그것이 미국의 헌법이나 대법원의 판결과 일치하는가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1세기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활동하셨는데, 그분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부분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생각하는 회복적 의미의 정의와, 사회에서 말하는 정의가 갈라지고 차이가 나는 지점입니다.
예수님의 정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신경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옳은가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수님에게 정의란, 사람들과 사회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사랑이 핵심이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공의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자신이 불공평하게 당한 것에 대해 보복하는 것이 정의라고 하는 이 세상의 정의에 대한 기준을 거절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징은 바로 이 말씀과 같이 “의(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그런데 이 “의”는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정의나 헌법에서 말하는 정의(justice)가 아니라, 예수신경이 인정하는 공의(righteousness)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세우는 공의인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것을 바로잡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표현하는 제도를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예수님이 선포하신 공의
예수님께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메시지를 살펴보면, 예수님에게 정의가 중심적인 문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의 회당에 돌아와서 행한 그분의 첫 번째 공적인 설교부터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십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6절)
당시에는 회당에서 랍비들이나 종교적으로 유력한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으며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는데, 매주 순서대로 읽는 성경 내용을 받아 읽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신 성경은 마침 이사야서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7절)
예수님은 이사야를 받으셨는데 그 중에도 일부러 61:1-2를 찾아서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18-19절)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공의입니다. 그 관점에서 본문 18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은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되어 갇힌 자에게는 ‘자유’를, 눈이 멀어 앞을 못 보는 자에게는 다시 볼 수 있는 ‘시력’을, 또 눌리고 압제받는 자에게는 ‘놓임’을 약속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도 계속해서 고집스러울 정도로 공의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 (눅 6:20-23)
여기 보시면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배고프고 주린 자에게 ‘배부름’을, 애통하며 우는 자에게는 ‘웃음’을, 주님을 믿기 때문에 핍박받는 자에게는 ‘기쁨’과 ‘뛰어노는 것’과 ‘하늘의 큰 상’을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을 회복시켜 공의가 올바로 서게 하는 데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공의에 대한 비전을 사역의 초기에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무렵에 들려주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심판 날의 뚜렷한 모습을 생생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마 25:31-33, 새)
하루 일과가 끝날 때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염소와 분리하여 가자의 울타리로 들어가게 하듯이, 예수님도 사람들을 의롭게 행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누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마 25:34-40, 새)
그런데 두 그룹을 나누시는 기준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염소)에게는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항의를 할 때 임금은 똑같은 기준으로 선포합니다.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마 25:44-46, 새)
예수님의 제자들을 구별되게 만드는 것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예수신경을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신경의 공의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심판하실 날까지 일관되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공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습니까? 또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예수신경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이 미국 사회에서 예수신경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크리스천들은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모든 사람, 특히 노약자, 이민자, 어린이, 가난한 자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미국 내에서 인종들 간에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증오와 미움의 악순환이 가진 위험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의료 혜택, 주택, 음식 등이 제공되는가? 노동자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고 공평한 대우를 받는가? 정부는 노동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수당을 받도록 도와주고 있는가?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유학생)로서 우리도 비슷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인종차별을 당한 희생자라고 말하면서도, 혹시 다른 인종들을 무시하며 차별하는 적은 없는지를 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특히 히스패닉 사람들, 인도와 중국 사람들에 대해 그런 마음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예수신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복되고 서로와의 관계에서 회복되는 일을 추구함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 일에 참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함꼐 힘을 모아 애쓰며 나아가야겠습니다.
3. 예수신경의 공의를 실천하는 삶
그렇다면 ‘정의’와 ‘공의’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거의 비슷하지만, 굳이 구분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의(justice)’란 불의를 저지른 사람들을 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누가 잘못을 저질렀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가 질문하며, 올바르게 벌을 내리는 데 집중합니다.
반면, ‘공의(righteousness)’란 그런 불의한 일이나 범죄를 통해 상처 받고 희생당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이 과정을 통해 누가 상처를 받았으며 어떻게 하면 그들을 회복시킬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것을 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자들을 정서적으로 만지고 보듬어주는 것입니다.
지난 2009년에 한국에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이 쓴 책입니다. 샌델 교수가 하버드에서 1980년부터 진행한 ‘정의(Justice)’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인데, 미국에서 10만부 정도 밖에 안 팔렸지만, 한국에서 유독 인기를 끌어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130만 부 넘게 팔려서 샌델 교수 자신조차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그런 현상은 한국 국민들이 그만큼 공정성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라고 분석되었습니다.
한국은 잘 아시다시피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 정의와 관련된 일로 굉장히 시끄러웠고, 심지어 현직 대통령이 최초로 탄핵되어 파면되고, 갑자기 새 대통령이 선출된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느낀 국민들이 다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국정농단 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정의가 이루어지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진짜 개혁이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을 잡아서 벌하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이 잘못된 과정을 통해 상처 받은 사람들과 희생당한 사람들을 보듬고 돌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공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공의는 예수신경에 기초한 공의입니다. 그러니까 미움과 증오가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공의입니다. 그것도 먼저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그래서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입니다.
왜 이 사회에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처벌하려는 자와 처벌을 받지 않으려는 자가 계속 싸우기 때문입니다. 힘을 잡은 자가 더 약한 자를 처벌하려 하고, 그러다 세력이 바뀌면 또 상황이 바뀝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어지럽습니다. 우리가 정말 추구할 정의는 악한 자를 벌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죄를 범했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희생당한 사람들을 보듬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설교 때 되도록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언제나 생각이 다른 분들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편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3년 전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의 핵심이 뭔지를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겠습니다. 그것은 유병언 일가의 정경유착을 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의 잘못된 구조 과정을 비난하며 책임자들을 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실 우리가 초점을 맞추었어야 하는 점은 그 사건을 통해 엄청난 상처를 받은 유가족들, 특히 부모들입니다.
물론 거기에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되었다고도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 그랬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최소한 그 부모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위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 아들이 수학여행을 갔다가 버스가 굴러서 호수 안에 빠져 가라앉고 있는데, 버스가 물속에 잠기는 것이 티비에서 생중계가 되는 것을 보며 자식을 꺼낼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특히 물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학생들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괴로웠겠습니까?
어떤 사건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상처 받고 희생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위로하며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 동안 사회의 약자들을 돌보는 일에 대해 우리 교회가 많이 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 홍 전도사님과 Youth Group이 조금이나마 거기에 참여하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악에 대해 싸우기도 해야겠지만, 상처받은 자들을 더 많이 위로할 수 있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장에서 그것을 연습하는 겁니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같이 마음 아파해주고, 또 무엇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습이 될 때 우리가 나가서 어려운 일을 당한 분들을 돌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건에 대한 해석입니다. 어떻게 보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으로 볼 때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서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 힘든 일을 당한 사람들, 최악의 일을 당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이 직접 당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바로 우리도 그 마음을 품고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런 사랑에 기초한 공의를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