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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6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23 ✦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5)
“예수 안에서 용서하기”
(마태복음 18장 21~35절)
1. 하나님의 용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는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인간들에게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아셨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우리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 5:43-48, 새)
여기에 보면,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우리에게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문맥을 보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 가운데 이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십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우리를 해코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닮습니다.
사실 이러한 용서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이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용서는 모세의 그 어떤 계명 안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윗의 시편들을 보아도, 서로 용서하는 것과 관련된 기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언자들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서로 용서하라고 외치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에 인간의 용서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흔치 않은 사건들 중 하나는 요셉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의 장사를 지낸 뒤에 요셉이 자기들에게 보복할 것이 걱정되어 아버지가 생전에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어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창 50:15-17)
그들이 와서 요셉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창 50:18) 요셉은 뭐라고 했습니까?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 50:19-21)
이 이야기는 사실상 구약에서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 가운데 용서가 크게 강조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구약에서는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구약은 용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용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용서가 한 사람의 죄악 된 행위와 생각을 말끔히 씻어내는 것이라면,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다는 말은 정확합니다. 그래서 용서와 관련된 구약성경의 구절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주님이 용서하신다’는 과정으로 나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항이 있는데, 용서는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회개를 조건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 한 용서해주지 않았고, 회개할 때까지 사면장을 함부로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용서에 앞서는 회개의 요구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법체계를 보여줍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볼 때 불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받을 자격이 없는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바로 여기서 용서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정리해 보면, 구약에서 용서란 ‘하나님의 일’이며 ‘회개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기독교와 유대교가 중요한 해석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유대교학자 솔로몬 쉼멜(Solomon Schimmel)은 유대인의 용서에 관하여 가장 완벽한 연구를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유대교 사상가들 사이에 용서에 관한 다른 견해들이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도, 유대인들이 용서에 관한 자신들의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제시합니다.
쉼멜은 용서와 관련해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언급합니다. 먼저, 유대교는 전반적으로 구제불능의 죄인들을 용서하는 것보다는 정의를 지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꼭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그 기본이 되는 기도와 교리에서 정의에 대해서보다는 은혜의 행동으로서의 용서를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그 은혜는 자격이 없고 아직 뉘우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쉼멜은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자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벌하시고 회개하는 이들은 용서하신다.”
2. 용서의 전제조건
그렇다면 예수님은 용서와 관련해서 뭐라고 가르쳐주십니까? 용서는 매우 익숙한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의 분명한 뜻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먼저,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의 행동과 함께 시작됩니다. 용서는 그 어떤 법 제도도 작동을 멈추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인간에게 그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게 하시는 대신에 용서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이 용서라는 사랑의 행동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믿는 그분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자비와 은혜를 제공해주심으로써 인간의 상황에 폭탄을 투하하시는데 그것은 사랑의 폭탄입니다.
하나님은 왜 벌을 마땅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용서해주시고, 상을 받을 수가 없는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까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 선물을 주시는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신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고자 하신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눅 11:4a)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1-22절)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35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디모데후서 3:16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일부’ 성경이 아니라 ‘모든’ 성경, 즉 성경 전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요즘 동성애 문제가 큽니다. 우리 미국장로교도 몇 십 년을 그것 때문에 싸우다 결국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미국도 동성 간의 결혼이 가능하고, 그런 나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래도 성경에 의하여 동성애는 죄라고 말을 하려고 합니다. 요즘은 설교단에서 이런 말을 하면 이제는 고소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합니다. 죄는 죄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죄입니까? 당연히 죄인데 다른 죄도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동성애는 죄라고 하고, 내가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괜찮다고 하며 슬쩍 넘어갑니다. 물론 성적인 죄는 자기 몸에 대한 것이라 질적으로 다르긴 합니다. 사실 죄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꼭 동성애, 도둑질, 살인, 강도, 간음 등은 정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용서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은 그냥 슬쩍 넘어갑니다. 모두가 다 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볼 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엄격한 정의보다는 용서의 습관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처럼 완벽한 정의를 실천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할 때 하나님을 닮습니다.
둘째, 용서는 예수님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측정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다시 말해, 용서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드러나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본문에서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제한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런 무제한의 용서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용서의 모범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스데반도 그것을 본받아, 돌에 맞아 죽으면서 비슷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용서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예수신경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는 게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신경은 자비와 은혜가 넘치는 용서의 실천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신앙고백인 ‘쉐마’(신 6:4-5)가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쉐마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쉐마, 즉 예수신경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쉐마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유대교의 기도문인 ‘카디쉬(Kaddish)’가 확장되어서 그 안에 이웃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주셨습니다.
구약에는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 안에서 용서도 새롭게 선포되며 확장됩니다. 곧 하나님만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십니다.
3. 다른 사람 용서하기
유명한 영국의 지성인이자 크리스천 작가였던 C. S. 루이스는 자신의 유명한 책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용서가 아름다운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용서해야 할 무언가가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만 해도, 용서는 아름답고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 탁 생기면, 그 아름답던 주님의 말씀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무엇에 대해서든지 항상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생각해볼 문제들이 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갔다 살아남은 뒤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찾아내는 일에 뛰어들었던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잔혹함의 대명사로 불리던 한 나치 장교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는 그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장교는 수백 명의 유대인들을 한 집 안에 몰아넣고 그 집에 수류탄을 던져서 어른들과 아이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악독한 자였습니다. 그가 화해를 바라며 유대인인 비젠탈에게 용서를 구했을 때, 그는 용서의 소망을 하나도 남겨주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악독한 사람에게도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까?
그것은 약간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예들도 있습니다. 한 여성이 남편에게 학대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크리스천이었고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용서해야 합니까?
한 가족이 휴가를 다녀오는 동안 집을 돌봐달라고 이웃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휴가에서 돌아온 그 가족은 집을 맡아준 이웃이 자기 집의 서랍을 다 뒤지고 돈을 훔쳐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족은 도둑질을 한 그 이웃을 용서하고 다음번에 휴가를 갈 때도 그 이웃에게 집을 봐달라고 부탁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성경은 용서를 종류별로 분류하지 않지만, 용서에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차원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용서’와 ‘주관적인 용서’입니다.
객관적인 용서는 관계에서 발생한 가해 행위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화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관적인 용서는 용서하려는 성향과 용서하는 경험을 모두 포함하는데, 용서하는 경험이란 분노와 증오와 적개심을 떨쳐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러한 악의가 되풀이되는 것을 끝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의가 일으킨 부정적인 감정들을 없애고 용서하는 성품을 발전시킵니다. 즉, 주관적인 용서를 실천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화해가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서 예수신경(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1) 가해를 당한 피해자는 가해 행위와 가해자의 책임 문제에 실제로 직면합니다.
피해자가 ‘누가 무엇을 했는지’를 직시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화해나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폭력적인 상황을 마음속 주머니에 집어넣어 봐야, 결국 곪아 터지고 맙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와 가해 행위를 그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에 따라, 도둑질, 성적 학대, 속임 등으로 규정하여 그 문제를 직시할 수 있습니다. 가해 행위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그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이나 화해를 서두른다고 줄어들거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일에는 시간이 필요한데, 때로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2) 피해자는 가해 행위의 영향을 인식합니다.
피해자는 가해 행위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깨닫기 전까지 주관적으로 용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공격이 ‘단순히’ 관계에 약간의 손해를 끼쳤는지, 혹은 불륜과 같이 실제로 관계를 아예 파괴했는지 상관이 없습니다. 용서는 가해 행위로 일어난 실제 감정들을 솔직하게 받아들입니다.
3) 피해자는 객관적인 용서를 추구하기로 선택합니다.
비록 용서하려는 성품을 가졌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겠다’, ‘없었던 일로 여기겠다’, ‘분노를 떨쳐버리겠다’, 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피해자는 가해자를 똑같이 하나님 앞에 선 죄인으로 받아들이며 불의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러면 피해자는 정의로 심판하는 것을 중단하고 주관적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일을 통해 그토록 악했던 가해자의 마음이 녹아내릴 때가 많습니다.
4) 피해자는 객관적 용서 또는 화해를 위해 노력합니다.
용서라는 그 아름다운 생각이 평소에는 쉬울 것 같은데, 실제로 나 자신이 피해자가 되었을 때는 실천하기 어려운 것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죄를 범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잘 압니다. 동시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빛나는 모범도 잘 압니다. 이런 사실들 때문에 제자는 가해자와 화해하라는 도전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긴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더욱이 화해의 정도는 여러 요인에 의해 형성됩니다. 즉, 우리의 상처, 가해자의 반성 여부, 가해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냈는가, 가해자가 위험한 인물은 아닌가, 가해자가 아직도 살아 있는가 등에 의해 결정됩니다.
5) 용서는 최고의 대안을 제시하는데, 이웃 사랑의 물결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용서를 받게 되면, 그것이 ‘은혜의 선순환’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이 용서의 사랑과 은혜를 전해주는 아름다운 용서와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신경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이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삶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그 길을 힘차게 걸어감으로써, 주님의 참된 제자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풍성함을 맛보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