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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9일 수요예배

예수신경 22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4)

예수 안에서 회복하기

(요한복음 2115~22)

 

1.   누구나 하게 되는 실패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으켜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제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주님을 완전하게 신뢰하고, 변함없이 예수님 안에 거하며, 전적으로 복종하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보다 더 도전이 될 만한 목표를 주십시오.’ 하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은 선뜻 실천하기가 어려운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말씀입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5:46-48, )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의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성숙함또는 자비로움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 때문에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라는 표현입니다. 적당히 성숙해지라거나 적당히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라는 것이며, 그 기준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어떤 명령을 받았든지 우리에게는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 부른 노래 가사처럼 우린 넘어져도 그 사랑 영원하네.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되는 겁니다. 우리는 실패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향해 오래 참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섬겨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아주 기쁜 소식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들도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들도 예수님 안에서 회복이 필요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나 자신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시에,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 집중하는데, 거기 머물면 안 되고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종종 유명한 사회 지도자나 목회자들 가운데 범죄나 불륜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륜이 아니더라도 이혼의 위기를 겪은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아주 유명한 목회자들도 그런 경우들이 꽤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위기를 당한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런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우리가 다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위기가 없는 가정이 어디 있습니까? 위기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회복되었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고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회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목회자뿐 아니라 교회의 어떤 리더든지 실패할 가능성이 얼마가 됩니까? 당연히 100%입니다. 저도 당연히 실수하고 실패할 확률은 100%이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크게든 작게든, 누구나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인간이면 다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실패는 얼마든지 드러내어 극복될 수 있습니다. 실패를 인정하고 그 실패를 드러낼 때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회복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숨기면 회복이 안 되지만, 드러내면 회복이 됩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자꾸 쉬쉬 하며 감추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문제와 아픈 마음을 드러내며 기도해달라고 할 때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해결됩니다. 목장에서 바로 그런 것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줄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2.   실패한 사람의 회복

 

그러므로 실패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요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실패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제자들이 실패하는 일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제자들의 실패는 일정한 패턴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실패합니다. 그들은 폭풍 가운데를 지나는 동안 믿음을 보이지 못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어떻게 공급하시는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마지막 순간, 즉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모두 잠에 곯아떨어집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그런 불완전함이라는 패턴은 그들이 죄가 없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신경은 사랑이 완전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그 예수신경 안에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가르치고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랑할 줄 아는 존재라면 왜 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겠습니까? 원래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고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복음서를 읽어볼 때 우리는 제자들의 불완전함의 패턴을 발견하는데, 그것을 소위 실패의 3R’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Rebuke, Repentance, Restoration. 그러니까 실패에는 책망(Rebuke)’이 뒤따르고, 책망 뒤에는 회개(Repentance)’가 오며, 회개 다음에는 회복(Restoration)’이 옵니다. 제자들 중에 이 패턴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명성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한 그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다른 제자들에 대한 리더십, 그리고 초대교회에서의 역할 등, 주로 좋은 일들을 통해 세워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 어부 출신의 제자가 항상 좋은 일만 경험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키기도 했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서로 누가 크냐고 싸웠는데, 더 큰 사람이 예루살렘에 가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당연히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오실 때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하여 조금 걷다가 실패하고 물속에 빠졌습니다(14:25-33). 예수님이 산 위에서 변화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을 때에도 베드로는 초막 세 개를 세우자고 하며 횡설수설했습니다(17:4).

 

무엇보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시던 순간 자기는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며 공개적으로, 그것도 세 번씩이나 연속해서 부인을 했습니다(26:69-75). 그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제자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입니다. 이처럼 복음서 저자들은 베드로가 실패한 사건들을 솔직하게 드러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적으로 실패를 드러내는 것을 절대로 안 해야 하는 금기로 삼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드러내고 인정할 때에만 회복이 찾아오는데, 그 중간에 책망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1)  책망 (Rebuke)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신 예수께 자신의 대안을 가지고 참견하며 야단을 쳤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16:21-22, )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으로 굉장한 히트를 쳤던 릭 워렌 목사님이 있는데, 그분의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안 됩니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영어로는 “Lord, no.”입니다. 그런데 이 Lord라는 단어와 No라는 단어는 함께 할 수 없는 단어라는 말씀이 아직까지 제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 라고 해야지, “주님, 안 됩니다. Lord, no.”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의 주인이 아니신 것이지, 진짜 주인이시면 yes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말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이 없는 천국’, ‘고난이 없는 천국입니다. 베드로의 그러한 말에 대해 예수님은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생각이 사탄의 생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책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16:23, )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가 이 순간 사탄의 꼬임에 넘어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너무 놀랍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탄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람의 일이 바로 사탄이 원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절대로 죽으시면 안 된다고 하는 베드로의 계획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참 좋은 일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안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제자로서 주님이 죽지 않으시도록 막아주는 게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일, 즉 하나님 중심인 신본주의적인 생각이 아니라 사람 중심인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죄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주님, no!’라고 합니다. ‘사람의 일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굉장히 옳은 일이라고 하고 모두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일 수 있고 사탄의 뜻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악 된 행동은 반드시 지적되고 책망 받고 고쳐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즉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7-8)

 

여기서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침입해 들어올 것이며, 성령의 임무 중 하나가 우리의 죄를 꾸짖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2:11-14)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이전에 일어났던 일을 회상하며 쓴 것입니다. 신앙의 연륜으로 볼 때 베드로에 비해 한참 까마득한 후배인 바울은, 원래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곳에도 있었습니다. 자기 표현대로 그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대 선배인 베드로에게 그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오니까 그들을 두려워해서 그 자리를 급히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그들 앞에서는 우리는 다 하나다라고 했으면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오니까, 마치 자기가 이방인들과 교제를 하지 않은 것처럼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베드로의 외식(위선)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아픔이 따르더라도 때로는 진실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사랑 가운데서 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할 때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2)  회개 (Repentance)

 

가장 좋은 결과는, 진실을 들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진실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가 아플 때 타일레놀 알약을 삼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베드로는 타일레놀을 전해 받았지만, 어른용 알약을 처음 삼키는 아이처럼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뒤에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셨던 대로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했습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6:74-75)

 

그 후에 베드로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기꺼이 예수신경을 실천하며 살 것인지, 그의 마음을 살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끔찍했던 밤을 세 차례 더 깊이 되짚어보면서, 그 각각의 실패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후에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말로 다시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의 3R’이 있는 것처럼, 진정한 회개에도 세 가지 R(회개의 3R)이 있습니다. Responsibility(책임), Restitution(보상), Recommitment(재헌신).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보상도 해야 하며, 다시 제대로 살겠다는 재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3)  회복 (Restoration)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와 다시 만나시고 그가 자신을 부인한 뒤에 행한 회개의 매듭을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신경이 묻는 질문, 가슴을 후벼 파는 것과 같은 질문에 대답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5-17)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그의 대답을 들으신 후에 내 양을 먹이라(치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던 그 해변에 서서 맨 처음의 부름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그 장면을 마무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8-19)

 

처음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과 함께,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의 소명을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소명을 회복하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다 보니까, 옆에 있는 다른 제자가 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따르려고 하다가 옆을 보면서 그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0-21)

 

이것이 요한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면, 뭔가를 해보려고 하면, 옆에 자꾸 다른 사람이 보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살면 되는데, 자꾸 다른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생각하며 눈이 엇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2)

 

너는 나를 따르라!” ‘저 사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 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저 사람이 아니라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라갈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자꾸 옆을 보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까?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주님만 따라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나가는 말]

 

정리해 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과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베드로가 살면서 들어본 말들 가운데 최고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위한 회복의 식탁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회복이라는 것은 결코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과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회개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서로 오래 참아주고 용납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모두 실패하고 죄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을 보시면, ‘저 사람은 왜 저래?’라고 하지 마시고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어?’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그렇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가 잘못 갈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우리의 회개를 이끌어내시며,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회복시키셔서 주님의 일에 사용하십니다.

 

이 순서를 기억해주십시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고 사명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베드로가 실패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하게 되고, 그것은 곧 사탄이 좋아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그 길은 위험하고 힘든 길이며, 그래서 우리는 넘어지고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길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실은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비록 넘어지고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함으로 회복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다 감당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세워주고 용납해주고 함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잘했다, 신실한 종아!”라고 칭찬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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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예수신경의 공동체(1): "변화의 공동체" (막 3:31-35) - <예수신경> 13 (5/10/17) kpccoh 2017.05.10 918
99 예수신경의 이야기 (6): "여인들과 긍휼" (눅 9:49-56) - <예수신경> 12 (5/03/17) kpccoh 2017.05.04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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