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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30일 수요예배

예수신경 25

예수님과 함께하기(1)

요단 강에서

(마태복음 31~17)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24주 동안 스캇 맥나이트 교수가 쓴 <예수 신경>이라는 책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어오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 부에 각 6장씩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1부에서 4부를 다루었고 이제 마지막 5부가 남았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면서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그가 어떤 사람이든) 끌어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의 가치관을 실천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삶에 동참합니다.

 

예수님의 삶 가운데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참 신비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5부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예수님은 왜 시험을 당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변화 산에서 변화되셨을까? 예수님은 왜 최후의 만찬을 베푸셨을까? 예수님은 왜 죽으셨을까? 그리고 예수님은 왜 부활하셨을까? 이 여섯 개의 질문이 마지막 5부의 각 장의 주제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근본적으로 자신이 가르치친 예수신경에 헌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분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 가운데 일어난 모든 사건은 예수신경의 표현입니다.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예수신경을 완벽하게 실천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분의 삶에 동참하며 오늘 예수신경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수동적 순종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고 죽으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분의 능동적 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사셨던 완벽한 삶입니다. 이제 마지막 5부의 초점은 예수님의 능동적순종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럼에 있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13:34-35, )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것으로써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서로 사랑할 때 안 믿는 사람들이 보고 이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다.”라고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한다고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성경 지식이 많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이 사람들은 정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1.   우리를 위해 사신 예수님

 

몇 년 전 콜럼버스에 눈이 많이 왔을 때 어린 아이들이 신이 나서 밖에 나와 놀았습니다. 그런데 눈이 자기의 키보다 더 높아서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때 부모들이 나와서 눈을 치워주며 길을 만들어주니까 아이들이 아주 더 신이 나서 놀았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자기 혼자 힘으로는 눈밭을 뚫고 지나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도 영적 활로를 뚫고 길을 낼 능력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눈을 뚫고 길을 내듯이, 예수님은 인간의 여러 어려운 조건을 뚫고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길을 뚫어주신 것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용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신대표참여라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예수신경을 기억하면서 이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신경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신경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하게 사랑하시는 가운데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substitute)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represent)해서 변호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변호하시는 동시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분 자신에게 참여’(participate)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 당신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 동안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의 삶에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 됨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사셨던 것과 같은 삶을 무시하거나 외면한 채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자신과 같이 정말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삶에 참여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아는데 삶에는 정작 그것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저처럼 모태신앙이거나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점점 더 은혜가 넘쳐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율법주의가 되어 가고 바리새인처럼 변질되는 모습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놓친 채 종교생활만 해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2.   요단 강의 세례 요한과 예수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삶은 요단 강에서 시작합니다. 이곳은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로 세례를 주던 곳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단 강에서 베푸는 세례는 회개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1-2)

 

그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주변에서 큰 무리의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5-6). 그런데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보고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7-10)

 

무시무시한 말씀을 막 선포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독설을 퍼붓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인데,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변질되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권력 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제사장들은 사두개인이었습니다. 부활도 안 믿는 사람들이 백성들의 영적인 면을 책임지니까 그 나라의 영적인 형편이 어땠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이 인기를 끄니까 그들은 그것을 구경하러 온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요한은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회개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정말로 회개했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세례만 받고 가서 똑같이 계속 율법주의자로 살고 현실타협주의자로 사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회개는 진짜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께 진실을 고하며, 거룩한 삶으로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회개했다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입었으니까 나가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안타까운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린 다음 밖으로 나가서 싸우는 겁니다. 심지어 예배 끝나고 나가면서 서로 멱살을 잡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예배를 드린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예배를 드렸다면 어떻게 그런 행동이 나옵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공동의회를 하는데 서로 삿대질하며 고성을 지르고 밀치면서 싸움을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면 어떻게 그런 행동이 나올 수 있습니까?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요한이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 뭐 합니까? 회개의 세례를 받아서 정말 회개를 했다면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서 똑같이 살거나 더 나쁘게 산다면 그게 어디 회개한 거냐는 것입니다. 합당한 열매를 보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단 강으로 내려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기 위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요한은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이 계신 것을 발견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3)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개할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사실 그 누구보다 세례 요한이 가장 당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은 죄인들이 소란스럽게 몰려 있는 요단 강에 예수님이 뛰어드시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막았습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1)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4)

 

요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결코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죄인이었고,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5)

 

요한의 세례는 분명히 회개를 위한 것이고, 예수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 곧 죄인들, 그러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1)

 

결국 요한은 예수님께 순종하여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십니다(16). 그 성령님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 임하십니다(2). 이러한 과정을 볼 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완전하게 회개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명을 받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깨끗한 상태가 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 점에 대해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악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완전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은 선한 사람뿐이다. 회개를 완전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마도 완전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회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을 완전하게 사랑하십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사랑하지 못하며,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죄를 통과할 때에만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 참여할 때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예수님을 따르다라는 표현은 이제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분의 삶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분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에 동참할 때 그분의 삶에 동참하게 됩니다. 곧 요단 강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서 그분의 온전한 회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들과 함께 해주시고, 그들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회개를 함께 나누시고, 그들의 삶을 사시고, 결국은 그들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3.   온전한 회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올바르게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올바른 회개에는 네 가지 요소가 포함됩니다.

  첫째,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합니다(자각).

  둘째, 죄에 대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고백).

  셋째, 변화하겠다는 각오가 있습니다(결단).

  넷째, 그것을 입증하는 행동이 따릅니다(결과).

 

우리는 예수님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제멋대로인 사람들의 숨겨진 속마음을 꿰뚫어보십니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2:8)

 

우리는 다 강한 척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강합니까? 사실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 한마디 툭 던진 것 때문에 그냥 무너질 정도로 약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다가 병이 날 정도로 약합니다. 또한 다 거룩한 척하면서 앉아 있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로 거룩합니까? 인간처럼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가 없습니다. 정말 악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7:9-10)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며,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예수님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완전하고 깨끗한 눈을 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참된 자각의 고백과 함께 예수님은 강물로 들어가셨고, 이 세상 최초로 진실한 고백을 쏟아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를 위해 요단 강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고백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깨닫고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며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거나, 우리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에 들어가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기에, 이제 우리의 회개도 가능해졌습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의 혼탁한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가지고도 진실한 고백을 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며 연약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참 답답한 것들이 많습니다.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 수준 미달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래 기도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형편없는 기도도 받아주십니까?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8:26-27, )

 

솔직히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연약한 기도는 우리를 위한 성령님의 중보로 말미암아 강해집니다. 이 로마서 8장에 기록된 기도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회개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하면서도 우리가 왜 죄를 범했는지, 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분명히 알지도 못한 채 불완전한 회개를 할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요단 강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셨을 때,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회개의 자리로 들어가신 것이며, 우리를 위해 진정한 고백을 드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준 미달의 회개를 하더라도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그것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는 회개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죄 용서를 위한 세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자신의 죄가 사하여졌는지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혹시라도 저 어두운 지옥으로 가지나 않을지 걱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세례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때 사라지게 됩니다.

 

첫째, 죄에 대한 우리의 자각과 고백은 모두 불완전한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둘째, 예수님은 온전한 자각과 확신을 갖고 계셨으며 그래서 진실한 고백을 하십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단번에 해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참된 고백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그저 죄 짓고 회개하고, 또 죄 짓고 또 회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마음의 혁명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살짝 덮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갈아엎고 새로 바꿔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요단 강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 고백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장면이 아주 혁명적인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6-17)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같은 장소와 시간에 임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16:13-15, )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진실을 말씀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물속에 들어갈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영을 넘치도록 받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용서하는 영이시며, 우리에게 예수신경을 실천하도록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참된 고백은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겪으셔야 했던 여러 사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단지 죽음과 부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죽음과 부활로만 예수님이 해주신 일을 제한하게 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다른 것들을 못 보게 되며, 그래서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도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회개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성령의 용서와 능력이 비둘기처럼 우리에게도 임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 비둘기가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해주신 예수님께 그 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 그분이 하신 것과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은, 그분처럼 성령의 내리심과 충만을 받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다라는 부드러운 인정의 말을 들으며, 믿음 안에서 하늘이 영광 가운데 열리는 것을 보며,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은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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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 (2): "예수 안에 거하기" (눅 10:38-42) - <예수신경> 20 (7/05/17) kpccoh 2017.07.06 966
106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 (1): "예수를 믿는다는 것" (막 7:24-30) - <예수신경> 19 (6/28/17) kpccoh 2017.06.29 1282
105 예수신경의 공동체(6): "영원의 공동체" (마 25:31-46) - <예수신경> 18 (6/21/17) kpccoh 2017.06.22 829
104 예수신경의 공동체(5): "기쁨의 공동체" (요 2:1-11) - <예수신경> 17 (6/14/17) kpccoh 2017.06.14 1194
103 예수신경의 공동체(4): "회복의 공동체" (마 8:1-4, 9:20-22) - <예수신경> 16 (5/31/17) kpccoh 2017.05.31 956
102 예수신경의 공동체(3): "공의의 공동체" (눅 4:16-30) - <예수신경> 15 (5/24/17) kpccoh 2017.05.24 1027
101 예수신경의 공동체(2): "겨자씨 공동체" (마 13:24-32) - <예수신경> 14 (5/17/17) kpccoh 2017.05.17 1035
100 예수신경의 공동체(1): "변화의 공동체" (막 3:31-35) - <예수신경> 13 (5/10/17) kpccoh 2017.05.10 918
99 예수신경의 이야기 (6): "여인들과 긍휼" (눅 9:49-56) - <예수신경> 12 (5/03/17) kpccoh 2017.05.04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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