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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0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13 ✦
예수신경의 공동체(1)
“변화의 공동체”
(마가복음 3장 31~35절)
1. 천국 사명
우리는 가끔 축구나 농구를 할 때, 공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 헤맬 때가 있습니다. 야구경기도 보면, 공이 작아서 어디로 갔는지 선수들이 못 볼 때가 있습니다. 길을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 가서 처음 가보는 길로 걸어갈 때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표현은 제자들에게 목표를 보여주었고, 제자들은 그 비전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실천하면서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나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어보면 대개 ‘하늘나라, 영생, 구원, 죽은 뒤의 삶’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땅 위의 하늘, 천년왕국, 완벽한 세상, 낙원’이라고도 대답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나타내기 위해 가장 즐겨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3)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비전 뒤에는 예수신경이 있으며, 그 옆에 예수신경을 기도 형식으로 표현한 주기도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 가운데서 예수님의 비전을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만일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간략히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예수신경이 삶을 변화시키는 사회입니다.
둘째, 그 사회를 형성하는 내용이 예수신경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삶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는 하나의 사회와 관련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특정한 개인들이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발전시키거나, 자신 주변에 모여 있는 실수투성이인 사람들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대상으로만 사역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한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예수신경을 실천하며 살 것을 요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신경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그들은 개인적으로 변화될 뿐 아니라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천국을 갈망하거나, 천국에 대해 깊이 묵상하거나, 천국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믿는 사람들을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내놓으신 모든 혁신적인 주장 가운데 가장 대단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0-21)
예수님은 너무나 혁명적인 말씀을 많이 전해주셨지만, 그 중 이것이 단연 최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믿으셨습니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매일의 삶 가운데서, 지금 이 순간, 천국에서 사는 것을 기대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분의 제자들은 지금 이 순간 천국의 가치를 실천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은,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가 가져오는 변화
변화하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은 변혁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성전의 제사장들과 관리들은 부패했고, 율법교사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지나치게 엉뚱하고 불필요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예루살렘과 약속의 땅을 손아귀에 넣고 압제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변혁이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 곧 이스라엘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본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셨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라. 그러면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곳에 들어가라. 그러면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곳에 들어가라. 그러면 삶이 변화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는 예수님께 나아감으로써 시작되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지속되며, 예수님의 새로운 사회의 중심에 있는 예수신경을 지키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함으로써 유지됩니다.
1) 예수님에게 나아감으로써 시작되는 천국 변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 10:32-33)
예수님이 자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셨다면,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말씀을 읽으신 뒤 이사야의 천국 예언이 바로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눅 4:16-30). 그리고 그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당장 죽이려고 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옴으로써 천국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관계’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천국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태신앙인이라고 해도, 예수님과 이런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되는 때가 진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2)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지속되는 천국 변화
그런데 예수신경은 한 사람의 인격 전체, 즉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요구하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합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생활방식이 되어야만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변화와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려면,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존경받는 유대인의 생활방식은 토라(율법)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노래 ‘강남 스타일’과 비슷하게, 우리는 그것을 ‘토라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그 토라 스타일에서 더 나아가 천국 업그레이드를 통하여 ‘예수 스타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OO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다섯 가지의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이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 5:43-44, 새)
예수님은 ‘예수 스타일’로 사는 것을 가리켜 자신의 ‘멍에’라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예수님 당시에 율법을 지키던 사람들은 토라 스타일을 ‘토라의 멍에’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토라의 멍에를 기쁨의 원천이라고 했지만, 보통의 유대인들은 토라의 멍에가 기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여겼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을 무거운 짐이라고 느꼈습니다.
바로 이 점에 관해 예루살렘 회의에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전에 바리새파였다가 믿게 된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일어나, 이방 사람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게 명해야 한다고 하며,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 그것에 대해 잘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행 15:9-10, 새)
바로 이것이 ‘토라의 멍에’입니다. 그처럼 율법을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신앙이 측정되던 사회에서, 예수님은 그 대안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스타일’입니다. ‘예수 스타일’은 쉽고, 가볍고, 쉼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스타일’이 쉽고 가볍고 쉼을 가져다주는 데 비하여, ‘토라 스타일’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었으며 쉼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토라(율법)를 무효로 만드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취소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 인하여 온전해졌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5:17-20, 새)
이것은 마치 이런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제가 처음 신학교에 가던 1990년에 저는 타자기(typewriter)를 사용했는데, 타자기는 상당히 무거웠고, 타이핑할 때마다 소리가 아주 시끄러웠습니다. 타자기가 그때는 아주 유용하게 느껴졌고 실제로 그것으로 일을 많이 했지만, 그 1년 정도 후부터는 타자기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제법 주고 구입했던 타자기는 그때부터 창고에 방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수동 타자기와 최신 사양을 갖춘 컴퓨터의 관계는, 토라 스타일과 예수 스타일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토라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토라가 모세와의 언약 아래 있는 이스라엘을 위한 생활방식인 것처럼,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천국의 생활방식입니다.
3) 교제를 통하여 유지되는 천국 변화
예수님이 천국에서 선언하시는 변화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깊어집니다. ‘예수 스타일’의 핵심은 예수신경입니다. 천국 변화라는 것은 개인적인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신경이 삶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입니다. 모든 공동체는 교제로 인하여 유지되는데, 예수님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신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만듭니다. 예수신경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홀로 외롭게 지내지 않고 함께 식탁에 둘러앉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예수님의 교제가 어떤 것인지를 서로에게서 배웁니다. 이 교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영적 가족’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리아와 그 자녀들이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던 집으로 찾아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러 왔는데,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어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1-32절)
사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계신 것을 방해한 것이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 한 가지를 던지십니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3절)
지금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는데 누가 어머니이고 동생들이냐고 물으신 것은 정말 놀라운 질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직접 던지신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십니다.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34-35절)
예수님은 자신의 주위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을 보시면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예수신경을 중심으로 만드신 새로운 사회 또는 공동체는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서로 나누고, 서로를 사랑으로 보살피며,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합니다.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며 그런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예수님에게서 이 새로운 변화에 대해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가족은 경계선을 허무는 식탁 교제에 대하여 배웁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0-13)
또한 예수님의 가족은 서로를 용서하는 법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마 18:21-22, 새)
여러분은 몇 번이나 용서해보셨습니까? 무한대로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족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족은 서로의 재정적 책임을 져주는 것에 대하여 배웁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은 가족 안에서의 평등에 대하여 배웁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마 23:8-10, 새)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족이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은 천국의 역설이고, 세상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반대인 가치관입니다. 먼저, 그들은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대신 서로를 섬깁니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마 23:11-12, 새)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대신 서로를 사랑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예수신경을 실천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천할 때 삶은 변화됩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천국 가족들에게 가르치시는 일이 끝난 뒤, 집에 가서는 가족들에게서 한바탕 싫은 소리를 들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셨던 핵심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예수신경으로 인하여 하나가 된 가족 간의 교제를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천국은 예수신경이 삶을 변화시키는 사회이며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예수신경을 따라 삶으로써 영적으로 변화되며 성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참된 변화, 천국 백성으로서의 변화를 체험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