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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3일 수요예배

예수신경 12

예수신경의 이야기(6) 

여인들과 긍휼

(누가복음 711~17)

 

 

1.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의 행동

 

긍휼을 입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긍휼이라는 마음과 행동을 통해, 제자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함께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공동체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서 그들을 모두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초대하시고 사랑하신 사람들 중에는 창녀나 도둑이나 강도나 세리처럼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배척이 아니라 용서와 구원이 필요합니다. 장애우와 가난한 빈곤층 같은 사람들은 비극적인 운명의 희생자이기에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기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서로 교제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불쌍한 사람들이 마치 세상의 낙오자이거나, 그들이 자신의 운명에 딱 맞는 결과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습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그들사이의 거리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적대감을 낳습니다. 그래서 적대감을 환영과 사랑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고 손을 뻗고 다리를 움직여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위험지대로 들어가고 가장자리로 걸어가 불쌍한 사람들을 붙들고 그들이 그 지역을 벗어나도록 인도하시고, 자신의 식탁에 자리를 베풀어 그들이 들을 수 있는 가장 깊은 말들을 들려주십니다. “이 식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지어 이방인도 들어와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해주십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런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긍휼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누가복음 7장과 8장에는 어떤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 넘치는 사랑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복음서에 장르를 붙인다면, 그것은 긍휼 이야기(compassion stor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긍휼 이야기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사람들의 슬픔을 보신 예수님

 

세상에서 실패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인 성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들어갔을 때, 한 장례 행렬을 만나게 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1-12)

 

사람들은 한 여자의 죽은 아들을 관에 넣어 묘지로 가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관습에서 장례 행렬은 여자가 맨 앞에서 이끕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와가 먼저 범죄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맨 앞을 여자가 맡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나신 장례 행렬 맨 앞에도 여자가 있었고, 더구나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역시 과부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과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비록 유대교에 과부를 보호하기 위한 율법이 있었지만, 과부는 곧 빈민과 같은 뜻의 단어가 됩니다. 불의한 재판장에게 찾아가 그가 공의를 베풀 때까지 간청한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에 그와 같이 무력하고 가난한 과부가 얼마나 흔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3-5)

 

나인 성의 과부는 오래 전에 남편이 죽고, 이제는 외아들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로 인하여 자신의 수입원도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가셨을 때 이 과부는 울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3)

 

울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은 그녀가 울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때때로 예수님이 목격하신 슬픔은 나병으로 인한 고통, 영적, 신체적 영양실조, 간질로 인한 무기력함, 앞을 보지 못하는 비참함 등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육체적 문제이든 영적 문제든 간에, 예수님의 긍휼 레이더는 높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그분은 항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 응급실(ER)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돌아보셨습니다.

 

 

2)  예수님의 정과 공감의 마음

 

긍휼과 자비를 찾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슬픔을 목격하신 예수님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곧바로 예수님의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불쌍히 여기사”(13). 그 다음 한마디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수없이 한 말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울지 마세요.”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정에 약한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에게 정서적인 공감대를 보이셨는데, 그 감정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배우신 것이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집에서 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일찍 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나인 성의 과부는 더 나쁜 상황입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2:22-23)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4:29)

 

마리아는 이런 말씀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 역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고 들으셨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께서 불쌍한 이들을 도와주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68:5)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없는 자녀들의 아바이신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에서 자라나며 경험하신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인하여 과부에 대해 정서적인 반응을 보이셨고 깊이 공감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감대는 어려움에 처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그 범위가 확장됩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했는데, 거기서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께 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를 아낌없이 드러냅니다(7:36-50). 그 여자는 예수님의 발에 눈물을 흘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것을 씻어내고, 감사의 표시로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은 예수님의 행동이 못마땅해 합니다. ‘왜 저런 여자가 저렇게 하는 것을 그냥 두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를 아바 아버지께서 목적을 가지고 지으신 귀한 존재로 보십니다. 시몬은 이 거룩한 자리를 저 여자가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하며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자를 죄인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지으신 귀한 존재로 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인간을 보시는 시각입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보아도 얼마나 못난 모습이 많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지 않으실 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한심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시각은 너는 어떻게 인간이 그 따위 밖에 안 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서 목적을 가지고 지으신 아주 귀한 존재로 봐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주 벌레 같은 사람부터 철면피 같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보십니다. 가장 내키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렇게 보십니다.

 

지금 내가 가장 미워하거나 불편해 하거나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조차 그런 시각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볼 때 너무 귀찮고 밉고 보기 싫지만, 예수님은 너무나 귀한 존재로 봐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봐야겠습니까?

 

바리새인 시몬은 아주 불편한 시작으로 그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자기 집의 손님으로 정중하게 맞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을 손님으로 초대해놓고도 당시 문화에 맞지 않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는 손님인 예수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환영의 표시로 입 맞추지도 않았으며,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예수님에게 그 모든 일을 했다고 하십니다.

 

또한 시몬은 이 여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일에도 물론 실패했습니다. 그는 여자의 신분과 종교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보았지, 그녀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새로워진 귀한 존재라는 것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몬은 자기 눈앞에 있는 그 여자보다 어쩌면 더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의 창녀(기생) 라합이 믿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 또 그뿐 아니라 자기들이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기는 다윗 왕의 계보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시몬에게는 이 여자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그녀는 용서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용서받았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그녀의 슬픔을 보셨고, 그녀에게 마음으로 공감해주셨고, 또 그녀에게 다가가 주셨기 때문입니다.

 

 

3)  행동함으로 회복시키시는 예수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슬픔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서 더 나아가 그와 함께 할 시간이 내게 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 불편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 사람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희생을 치를 마음이 있습니까?

 

<Jewish Moral Virtures>라는 책에, 경건한 유대인 랍비였던 아바 타흐나(Abba Tachnah)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식일 직전 해질 무렵, 아바 타흐나가 어깨 위에 짐을 메고 자기가 사는 성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해가 지고 안식일이 시작되면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노동이 되기 때문에 서둘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는 종기가 심하게 나서 샛길에 쓰러진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안식일이 거의 다 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도울 사람이 없는 그때 그는 랍비를 보고 외쳤습니다. “선생님, 제발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제발 저를 성 안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아바 타흐나는 도둑맞을 것을 감수하고 자기 짐을 길 위에 내려놓은 뒤 그 남자를 성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을 데려다 준 아바 타흐나는 서둘러 자기 짐을 내려놓은 곳으로 돌아가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처럼 경건한 사람이 안식일이 막 시작되려고 하는 때에 짐을 메고 가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이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픔을 함께 느끼시고는, 태양을 조금 더 비추셔서 아바 타흐나가 자기 짐을 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안식일의 시작이 늦어지도록 해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유대인 랍비라고 하면 대개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오히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는 대개 말로만 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도와야겠습니다. 희생을 각오하고 도와야겠습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2:14-17,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이 야고보서를 가리켜 너무 행동을 강조한다고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을 외치며 종교개혁을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교리와 다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루터가 오해한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구원받기 위해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 믿음이 사랑의 행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아무런 사랑의 행동이 없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기는 믿은 줄 아는데, 정말 믿었으면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이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 믿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슬픔을 목격하고 공감을 표현할 때 그 다음 단계가 시작됩니다. ,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보고 감정적으로 함께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행동이 없는 긍휼은 마치 집에 올 때 중간쯤 왔는데 자동차 개스가 떨어진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신경이 말하는 사랑은 긍휼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행동으로 옮기고 있습니까? 저부터가 너무 부끄러운 형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일과 자기 가족의 일에는 큰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아주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행동하지만, 또 큰 액수의 돈이 들더라도 나를 위해, 내 가족을 위해 기꺼이 지불하지만,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에는 아까워하며 참 인색한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입니다.

 

물론 다들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장을 통해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인데, 어떻게든 그 이기심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서로를 섬기고 VIP 분들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연민지수(Compassion Quotient = CQ)를 체크하신다면 과연 몇 점이나 받을까요? 정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은 없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긍휼로 이어져야 하고, 우리의 긍휼은 사랑의 섬김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불쌍한 사람들, 특히 여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울지 말라고 위로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시며 살리셨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4-15)

 

예수님은 죄인인 여자를 용서하시고 그녀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48)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50)

 

또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사로잡은 귀신들을 쫓아내셨고, 요안나와 수산나, 그리고 다른 여자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8:2-3)

 

이외에도 예수님의 긍휼이 사랑의 행동으로 옮겨진 예는 너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지시면서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만질 필요도 없이 말로만으로 고칠 수 있으신 예수님이 그를 만지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또 많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먹여주셨고, 간질병 환자를 치유해주셨고, 제자들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파하고 치유하게 하셨고, 앞을 못 보는 맹인의 눈을 불쌍히 여기며 뜨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추상적인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말로만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내셨고 힘들어도 움직이셨습니다. 귀찮고 힘들면 하기가 싫은 게 사실인데,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며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긍휼은, 마음에서 나와서 손과 발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며 우러러 보게 만들려고 긍휼을 베푸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순수한 사랑으로 행동하셨고, 슬퍼하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시려고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행동 때문에, 나인 성의 과부는 자신의 아들을 다시 돌려받았습니다. 그것은 수입을 얻을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몬의 집에 나타난 여인의 삶은 부정함에서 정결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또한 8장에 나오는 여인들, 즉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다른 여인들도 자신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영적으로 깨끗해진 이야기를, 다른 사람은 육신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은 물질이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배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특히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공적 사역을 하시는 동안 자신들의 소유로 예수님 일행을 섬겼습니다(8:3). 이 여인들은 부자였음에 틀림없는데, 예수님 당시의 부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재신을 구제하는 곳에 기부했습니다. 그런데 8장에 나오는 여인들은 자기 소유를 베푸는 대상으로 예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후원하면서 그분의 삶 전체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들도 바로 이렇게 예수님을 섬기며 따르던 여인들이었습니다(23:49).

 

우리는 나인 성의 과부와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에게 나아온 여자가 훗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도 변화되어 주님의 제자로 살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에 무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초대교회의 120명 중에 포함되었을지 모릅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1:13-15)

 

 

2.   긍휼의 순환

 

이 여인들은 우리에게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전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신경을 따라 살아야 한다면, 우리도 슬픔을 목격하고, 공감하고, 긍휼을 베풂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긍휼이란, 말로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행동입니다.

 

알바니아 스코피예(Skopje) 출신의 아녜제 곤제 보야지우(Anjeze Gonxhe Bojaxhiu)라는 소녀가 있었는데, 열두 살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교사로 부르셨다고 확신했습니다. 18세에 아일랜드에서 수녀가 된 아녜제는, 그로부터 18년 뒤인 1946년에 더 큰 부르심을 체험하는데, 그것은 수도원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인도 캘커타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테레사 수녀가 태어났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신앙은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신의 임재에 관하여 심오한 깨달음을 제시해주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5:40, 45-46)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자신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바로 이 본문을 통해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행동을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은 테레사 수녀는,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당시 가장 가난하다고 하는 인도로 갔습니다. 그 중 캘커타, 그리고 빈민들, 또 빈민 가운데서도 최빈민층에게 갔습니다 그들을 향한 테레사 수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시다는 테레사 수녀의 깨달음은 그 비전을 지속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슬픔을 목격하고, 공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캘커타의 빈민가에 살면서 가는 곳마다 항상 슬픈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한 영국인 자원봉사자가 테레사 수녀의 긍휼의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했습니다. “누구든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같이 이야기를 하는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도 함께 대화한 사람들에게 그런 느낌을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레사 수녀에게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만 쓸모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한 유명한 말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평범한 일들을 특별한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병든 사람과 노숙자와 외롭고 환영받지 못한 자를 보살피는 일, 그들을 씻겨주고 깨끗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일들 말입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신조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침묵의 열매는 기도다.

     기도의 열매는 믿음이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이다.

     사랑의 열매는 섬김이다.

     섬김의 열매는 평화다.

 

사랑으로 섬길 때 사실은 섬긴 사람이 괴롭고 힘든 게 아니라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사실 희생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바로 이 유익한 길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이야기해도 나오지 않는 VIP 영혼을 섬기는 것,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주님은 보십니다. “그에게 하는 것이 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해주십니다. 그것을 위해 쓰는 적은 액수의 돈이라도, 선교사님에게 보내는 적은 액수의 선교헌금이라도 주님은 그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오래 전 나인 성의 과부에게, 시몬 집의 예수님께 찾아온 죄인이었던 여자에게, 그리고 몇몇 부자 여인들에게 나타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테레사 수녀의 삶에서 나타났고, 바로 그 긍휼이 우리 삶에도 분명히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그 긍휼이 우리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이 길을 계속 함께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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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 (마 16:13-20) - 이맘다해 선교사 kpccoh 2017.09.21 492
117 "소망이 그분의 이름 " (창 2:2-7) - 홍 영락 (Steve Hong) 전도사 kpccoh 2017.09.14 562
116 예수님과 함께하기(2): "광야에서" (마 4:1-11) - <예수신경> 26 (9/06/17) kpccoh 2017.09.07 1090
115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나아갑시다” 가정교회집회 I " : 휴스턴 서울교회 김종진 집사 (빌 3:7-8) - (9/02/17) kpccoh 2017.09.03 643
114 예수님과 함께하기(1): "요단 강에서" (마 3:1-17) - <예수신경> 25 (8/30/17) kpccoh 2017.08.31 879
113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6): "예수 안에서 전하기" (마 10:1-10) - <예수신경> 24 (8/23/17) kpccoh 2017.08.24 939
112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5): "예수 안에서 용서하기" (마 18:21-35) - <예수신경> 23 (8/16/17) kpccoh 2017.08.17 1066
111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4): "예수 안에서 회복하기" (요 21:15-22) - <예수신경> 22 (8/9/17) kpccoh 2017.08.10 900
110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 (3): "예수께 항복하기" (막 8:27-38) - <예수신경> 21 (8/02/17) kpccoh 2017.08.03 1008
109 니카라과 단기선교 보고 및 간증 (마 28:18-20) - 홍영락(Steve Hong)전도사 (7/26/17) kpccoh 2017.07.27 486
108 가정교회 리더쉽 컨퍼런스 간증 및 나눔 - 허연희 주재윤 장순덕 박태경 집사 kpccoh 2017.07.20 538
107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 (2): "예수 안에 거하기" (눅 10:38-42) - <예수신경> 20 (7/05/17) kpccoh 2017.07.06 966
106 예수신경으로 살아가기 (1): "예수를 믿는다는 것" (막 7:24-30) - <예수신경> 19 (6/28/17) kpccoh 2017.06.29 1284
105 예수신경의 공동체(6): "영원의 공동체" (마 25:31-46) - <예수신경> 18 (6/21/17) kpccoh 2017.06.22 832
104 예수신경의 공동체(5): "기쁨의 공동체" (요 2:1-11) - <예수신경> 17 (6/14/17) kpccoh 2017.06.14 1194
103 예수신경의 공동체(4): "회복의 공동체" (마 8:1-4, 9:20-22) - <예수신경> 16 (5/31/17) kpccoh 2017.05.31 956
102 예수신경의 공동체(3): "공의의 공동체" (눅 4:16-30) - <예수신경> 15 (5/24/17) kpccoh 2017.05.24 1028
101 예수신경의 공동체(2): "겨자씨 공동체" (마 13:24-32) - <예수신경> 14 (5/17/17) kpccoh 2017.05.17 1035
100 예수신경의 공동체(1): "변화의 공동체" (막 3:31-35) - <예수신경> 13 (5/10/17) kpccoh 2017.05.10 918
» 예수신경의 이야기 (6): "여인들과 긍휼" (눅 9:49-56) - <예수신경> 12 (5/03/17) kpccoh 2017.05.04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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