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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2일 부활주일예배
✦ 부활절 메시지 ✦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지라”
(요한복음 19장 19~31절)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웃는 얼굴이 정말 부드럽고 온화하게 보였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잊히지 않는 한 분이 있는데, 제가 오래 전 신학교에 다닐 때 만났던 분입니다. 그분은 인도에 있는 한 크리스천 대학의 학장님이셨는데, 아직도 그분의 미소 짓는 얼굴이 기억납니다. 그 온화한 미소를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위로가 됩니다.
그 인도 학장님이 제가 공부하던 신학교에 교환교수로 연구 학기를 갖기 위해 오셨습니다. 학교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다니면서 여러 번 뵈었고, 특히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같이 테이블에 앉아 식사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분 바로 옆에 앉아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평소에 그분을 볼 때마다 궁금했던 점을 여쭤봤습니다.
“인도는 주로 힌두교이고 크리스천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았는데, 어떻게 크리스천 대학교가 있습니까?” 그러자 그분이 그 특유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셨습니다. “인도 남부에는 크리스천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가 인도까지 와서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전승이 있는데, 그것은 인도 사람들에 의하면 그냥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인도 첸나이(옛 마드라스)에 가면 성 도마 기념교회가 있고 다른 유적들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의 삶> 때 간혹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어느 기독교 출판사 사장님이 오래 전에 회의가 있어서 마드라스 지역에 갔습니다. 거기서 도마의 손가락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서 그 손가락만은 썩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하여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갔더니 경비원이 그곳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접근하여 선물을 주며 아이들 과자 사주라고 주었더니 ‘내게 이런 걸 왜 주냐?’ 하고 경계하며 받지 않으니까, ‘그냥 주는 거니 받으라.’고 강권했습니다.
그러다 ‘여기 도마의 손가락이 있다는데 한 번 볼 수 있습니까?’ ‘내 이럴 줄 알았다. 절대 안 됩니다.’ ‘아니, 그냥 보기만 하겠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경비원이 ‘그럼 절대 만지면 안 되고 보기만 해라.’ 해서 간신히 들어가서 보니까 정말 손가락이 있었다는 겁니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 경비원이 방심한 틈에 살짝 그 손가락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경비원이 깜짝 놀라며 당장 나가라고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 출판사 사장님이 그 이야기를 어느 교회에 가서 간증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집회 이후 교인들이 한분도 빠짐없이 그분과 악수하기 위해 엄청나게 줄을 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 이야기를 전해준 목사님은 제가 잘 아는 분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 출판사 사장님과 여러 번 악수를 한 분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과 여러 번 악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저와 여러 번 악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함께 만나서 악수할 수 없으니 아쉬우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
의심이 많아서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봐야 믿겠다고 한 도마 때문에, 소위 의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영어로 “Doubting Thomas”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의심 많던 도마가 변화되어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바치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토록 의심이 많았던 도마가 어떻게 그렇게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일어났던 사건을 통해 이 점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제자들의 두려움과 의심이 기쁨으로 변화되다 (19~23절)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이러스 때문에 느끼는 불안함보다 훨씬 더 큰 공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자기들도 잡혀서 예수님처럼 비참하게 처형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 어떻게 하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 띄지 않고, 그래서 잡히지 않고 무사히 고향 갈릴리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
여기 보면,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어느 한 집에 숨어 문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이미 들었습니다(20:1-18).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달려가서 봤는데 그냥 돌아왔습니다. 이게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신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두려워하며 문을 잠그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갑자기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뭐라 하십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지금 이들에게는 평강이 없고 불안합니다. 공포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이라면 굉장히 괘씸했을 것 같습니다. ‘야, 너희들이 죽기까지 나를 따르겠다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어떻게 했어? 그냥 다 도망갔지? 다 배신했지? 에이 괘씸한 녀석들!”이라고 야단을 쳤을 텐데, 전혀 그렇게 안 하시고 오히려 평화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때 모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하며 자기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 자기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있습니다. 자기 귀로 직접 그분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게 뭔가 하며 모두 어리둥절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절)
이처럼 직접 보고 들으면서도 어리둥절하며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저분이 정말 우리 주님이 맞나?’ 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바로 이틀 전에 죽임을 당했던 ‘내가 바로 그 예수다.’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잠긴 문을 어떻게 뚫으셨는지 갑자기 나타나신 것을 보면 분명히 부활 전과는 다른 몸인데, 그러나 거기에 상처가 남아 있다는 말은 그 몸이 맞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 후에 뭔가 변화된 몸이고 달라진 모습인데, 몸은 다른 몸이 된 게 아니라 같은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야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하는데, 이미 보고 있었지만 뭘 봤다는 말입니까? 이제 정말 알아보았다는 말입니다. 알아보고 기뻐하며, 예수님께서 정말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뭔가?’ 하고 그들은 여전히 두려워하며 믿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그 후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주를 직접 보았다.’라는 말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니까 그들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워했던 그들이 기뻐하게 되었고, 불안에 휩싸였던 그들이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뿐만 아니라 사명도 주십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1-23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마음대로 죄를 사해주거나 그대로 두는 권세를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성령을 받고 성령 충만하여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지만,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게 되면 그 사람들은 죄 가운데 그냥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이 사명을 다하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 사명을 다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믿으실 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내가 직접 만나는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나는 오바마 대통령을 안다. 나는 트럼프 대통령을 안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상대방을 알고 상대방도 나를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입니다. 그들의 배우자는 자기 남편을 압니다. 그게 진짜 아는 겁니다. 그럼 나는 주님을 알고 주님은 나를 알고 계십니까?
많은 분들이 이런 것 때문에 예수를 못 믿는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이게 말이 되는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우리 삶에는 옛날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온지 벌써 15년이 지났습니다. 15년 전에 왔을 때에도 전혀 없던 것들이 지금 있는 게 많습니다.
몇 십 년 전에 인터넷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겁니다. 그나마 인터넷은 전화선으로 하는 것이 있었지만, 스마트폰은 전화기가 손 안에 들어가는 작은 것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것으로 웬만한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생각조차 못하던 일,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때 우리가 몰랐던 것뿐입니다. 우리가 그런 지식이 없었고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식이나 상식이나 경험으로 보면 부활 즉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부활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부활이 말이 안 된다고 믿지 않는 것을 보시면 굉장히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가 타임머신으로 가는 게 가능하다면 100년 전, 아니 30~40년 전으로 가서, 스마트폰이란 게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것으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고, 은행 일도 볼 수 있고, 검색도 할 수 있고, 사진도 찍고 비디오로 서로 통화도 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를 정신병자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인데, 그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부활이라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고 너무 쉬운 일인데, 단지 우리가 볼 때 모르니까 말이 안 된다고 느낄 뿐입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모든 증거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주님의 부활이라는 객관적 진리에서 시작하여, 그 부활하신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또 그분이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불안이 평안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의 증인으로서 보냄을 받아서 이것을 모르는 분들에게 바로 이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도마의 의심과 믿음 (24~29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날 저녁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중에 도마가 거기 없었다는 점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4절)
왜 도마가 하필 그때 그 자리에 없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성경에 안 나오니까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상해보면, 아마 그는 밖에 나가서 몰래 숨어 상황을 살피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 사람은 평소에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하는데 그게 정말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무덤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도마가 평소에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면 그것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디두모(쌍둥이)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 11:16)
그때 유대 지역의 유대인들이 아주 적대적이었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기에 그를 살리시기 위해서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시니까, 도마는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주님이 죽으러 가시니까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아주 유명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바로 도마의 질문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요 14:2-4, 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도마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요 14:5, 새)
이랬을 때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도마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려고 했던 사람인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해 굉장히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마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찾아오셨다가 떠나신 다음 돌아와서 보니까, 다른 모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며 기뻐하는 겁니다. 그것도 열 명이 똑같이 그렇게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5절)
다른 모든 제자들이 똑같이 말했다면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그는 자기가 직접 보고 만져봐야 믿겠다고 합니까? 왜 고집을 부립니까? 이것에 대해 가장 타당한 견해는, 도마가 예수님의 처절하고 비참한 십자가 죽음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그랬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실제로 그는 예수님의 상처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25절을 다시 잘 보시면 아주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못이 박힌 손의 상처와 창에 찔린 옆구리 상처를 강조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실은 만 이틀도 되지 않는 그 사건이 머릿속에 너무 강렬하게 남아서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토록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손과 발에 그렇게 손에 못이 박히고, 누구든지 고통스럽고 완전하게 죽여 버리며 한 번도 살아난 사람이 없는 로마의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은 대개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다른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경험하고 이해하고 아는 수준 이상의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누구나 있습니다.
어쩌면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자기만 쏙 빠져서 거기에 대해 화가 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기를 부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날로부터 만 일주일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6절)
여기 보시면 19절에서 부활하신 날인 부활주일 저녁에 처음 나타나셨을 때와 일주일 후에 나타나셨을 때의 상황이 아주 비슷합니다. 하신 인사도 똑같습니다. 안식 후 첫날인 것(여드레를 지나 주일 저녁인 것)이 똑같고, 문이 잠겨 있었다는 것도 똑같고, 그런데도 들어오셨다는 것도 똑같고, 평강을 비신 것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두 가지가 달랐습니다. 첫째, 제자들에게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때는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둘째, 도마도 거기 함께 있었습니다. 즉 열한 명이 다 함께 거기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시 일주일 후에 다시 오신 것은 순전히 도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드레 후 즉 만 일주일이 지나서 다시 오신 것은 도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다 변했지만 도마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도마의 말과 생각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도마의 의심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 바로 오늘 설교제목을 새번역으로 바꾼 겁니다.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마의 의심을 지적하시고 꾸짖으시는 것? 그게 아닙니다. ‘너는 믿음이 그것 밖에 안 되냐?’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그가 믿는 것,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 나타나셔서 그에게 자기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면서, 그렇게 해서라도 도마가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너의 생각은 편협한 것이다. 왜 너의 수준에서만 생각하면서 부활을 믿지 못하느냐? 직접 네 손으로 만져보고라도 나는 네가 믿기를 원한다. 너를 가두고 있는 네 작은 생각의 틀을 깨뜨려라. 그리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
도마 나름대로는 자기가 굉장히 지식의 체계를 갖추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수준이 낮고 너무 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틀을 깨뜨리고 넓은 데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절)
그토록 의심 많던 도마가 어떻게 이런 위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정말 손가락으로 만져보았기 때문입니까?
여기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가 그린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성 도마의 쉽사리 믿지 않음)이라는 그림인데, 독일의 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시면 뭐가 느껴지십니까?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쑥 집어넣고 있는데, 도마의 저 표정에 집중하며 이때 뭘 생각하고 있을까를 생각하고 계시면 문과 쪽이십니다. 그런데 손가락에 집중하면서 ‘저거 저거, 균이 막 들어가게 손가락을 집어넣나?’라고 하면 이과 쪽이십니다.
저는 도마가 이때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고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그가 만졌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손가락이 지금까지 썩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사실이 아닐 겁니다. 예수님도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29절)
이것이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라고 하셨지, ‘나를 만져서 믿느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정말 만졌다면 ‘너는 나를 만져서 믿느냐’라고 하셨을 텐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했는데, 자기 생각을 다 아시는 능력의 주님께서 자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그러한 그분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편협한 의심의 틀을 깨어버리고서 이제 그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한된 자기 생각과 경험이라는 좁은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도마를 깨우쳐주셨습니다. 꺠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를 가두고 있던 잘못된 생각의 틀을 무너뜨리도록 이끄셨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 보면, 말을 잘 안 듣거나 모임에 거의 안 나오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당연히 나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게 됩니다. 사실 그렇게 계속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그냥 빠뜨려도 지장이 없으니까, 나온 학생들 중심으로 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내게는 이미 열 명의 사도가 있으니까 괜찮다. 충분하다. 저렇게 나를 의심하는 도마 같은 녀석은 없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없는 편이 더 낫지.’라고 생각하시면서 그를 제외하고 하셔도 별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도마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도마 한 사람을 위해서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사실 도마는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배신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보겠다고 했지만 자기 방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의심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눈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30-31절)
바로 여기서 요한은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이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사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고, 성경 전체가 기록된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심했던 제자들, 자신을 다 버리고 도망했던 그들, 또 도마처럼 이렇게 의심이 많고 믿지 못했던 제자마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불러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그리고 그렇게 하셨을 때 제자들은 ‘저는 관심 없습니다. 저는 이제 좀 편안하게 살겠습니다.’라고 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어드리기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사도 요한 외에는 다 순교했습니다.
사실 요한도 원래 순교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다가 뒤늦게 사역으로 나와서 마지막에는 박해 받는 교회를 지키다가 밧모 섬에 유배되어 거기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순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특히 도마는 복음을 들고 말과 문화가 다른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에서 삶을 마쳤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에도 도마처럼 의심하는 분이 아마 계실 겁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의심한다고 꾸짖지 않으십니다. 의심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의심에서 불신으로 나아가면 안 되겠지만, 믿음을 위해 의심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꾸짖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믿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져보고 어떤 완벽한 증거가 있어서 그것을 확인하여 믿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식과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또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 믿음이 시작됩니다.
혹시 지금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나의 제한된 생각과 경험과 상식의 틀에 나 자신을 가두어놓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가진 그 지식의 틀에 주님이 맞지 않아서 나는 못 믿겠다고 하면, 이것은 오히려 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부활이 이해가 가지 않아 못 믿겠다고 한다면, 다른 것도 믿지 못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지성인이라 못 믿겠다면, 부활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과 원리들 역시 안 믿겨져야 정상입니다. 부활은 못 믿겠는데 다른 것은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면, 그것부터가 지성인으로서 모순이고 불공평한 태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솔로몬이라도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역사적 사실이나 진리라고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해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고 하고 사진도 있고 여러 증거가 있기 때문에, ‘아,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믿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직까지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도마처럼 의심하며 믿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리 도망가려고 해도, 아무리 고집을 부리고 오기를 부린다 해도, 주님은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셔서 우리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부활의 주님이 믿어지지 않더라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절대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혹시 지금 아직은 안 믿긴다면, 믿을 때까지 계속해서 다시 찾아오실 겁니다. 계속 내 주변에 사람들을 보내실 겁니다. 그것은 나를 귀찮게 하시는 게 아니고, 그만큼 내가 주님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해서 도저히 포기하실 수가 없는 겁니다.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자기에게 말해주십시오. ‘나는 천하보다도 소중한 존재다.’ 지금 옆에 있는 가족에게도 이야기해주십시오. ‘당신은 천하보다 소중한 존재다.’ 이게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나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도록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또 보내십니다. 이러한 부활의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이뤄드림으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