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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22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3

고통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예레미야애가 319~26)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온라인예배도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설비가 잘 갖춰진 교회들은 오래 전부터 실시간 영상으로 방송한 경우도 있고 비디오를 찍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처음으로 해보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에 빠져 있고,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이 다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다 바뀌지 않았습니까? 아이들도 다 바뀌었습니다. 각 나라 정부나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소규모 사업체나 학교나 식당이나 항공업계나 여행업계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중단되거나 축소됐습니다.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고, 앞길이 어떻게 될지 언제 해결될지 안 보이는 상황입니다.

 

어제도 뉴스를 보는데, 미국은 캘리포니아에 이어서 일리노이, 뉴욕, 코네티컷, 오리건,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주 등에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시민들이 모두 집 안에 있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이미 유럽으로부터의 방문자들을 미국에서는 막고 있고, 이제는 미국에서 다른 나라로 여행가는 것도 여행경보 4단계를 발동하여 막고 있는 상태입니다.

 

어제까지 미국 내 감염자가 27천 명에 육박했고, 사망자는 340명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봤을 때는 미국의 감염자 수가 중국과 이탈리아에 이어서 3위였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그 사이 스페인에서 감염자들이 많이 나와 스페인이 3위가 되고 미국이 4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어 미국 통계가 나오면 또 순위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 유럽에 비하면 미국은 나은 편입니다. 이탈리아는 지금 최악의 상황이고, 이제는 의료체계마저 붕괴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환자들 때문에 일반 환자들, 특히 급한 환자들까지도 생명에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감염자 수는 이탈리아가 중국에 이어 2위이지만 사망자 수는 중국을 한참 앞섰고, 전국적으로 이동금지 조치가 시행 중임에도 계속 감염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또 스페인, 독일, 프랑스, 스위스, 영국 등 유럽 전역에 바이러스가 계속 확산되고 있고, 이에 유럽연합(EU) 국가들도 마침내 국경을 폐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비자나 여권 없이 다 통과하는 나라들인데 이제는 국경을 막고 있습니다. 시리아나 아프리카 난민들이 몰려 올 때도 완전히 폐쇄하지 않았던 국경을, 바이러스 때문에 폐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중국이나 한국은 감염자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고 그것도 요즘은 주로 외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확진된다고 하니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집단감염이 계속되고 있고, 자칫 방심하면 2차 감염의 물결이 몰아닥칠 수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에 바이러스 감염이 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웬만한 사회 체제를 갖추고 있는 나라들 중에 유일하게 바이러스 청정국을 유지하고 있는 대단한 나라가 있습니다. , 북한입니다. 그러나 밝히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아프리카나 아시아나 중남미의 작은 나라들에는 아직 몇 명 안 되는데 그것은 검사를 아직 안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 세계에서 감염자 수가 지금 31만 명 가까이 되었고, 사망자는 만 3천 명을 넘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려도 그렇게 많이 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일 걸리면 60%, 70%, 80%가 그대로 죽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인류의 재앙입니까? 그런데 죽는 사람의 수는 아주 적습니다. 그것도 합병증이나 질환이 있는 사람만 그렇기 때문에 약한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수많은 감염되어 고통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이 사건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악인들만 죽지 않고 수천, 수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가?’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놓아둔다는 말인가?’ 성경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사실 많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2,600년 전, 오늘 세계가 당하는 것과 비슷한 재앙을 당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가 살던 유다 나라입니다. 물론 그것은 이런 전염병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해보지도 못하고 당한 것은 비슷했습니다. 아니, 더 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다는 공격해오는 바벨론 제국에 대해 대항은커녕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었습니다. 바벨론에게 침략을 당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때 왕을 비롯해서 귀인들과 기술자들이 다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3년이 넘게 계속된 기근으로 쓰러져 죽은 시체들이 거리에 가득했고, 잔인한 바벨론 군인들이 와서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창으로 찔러서 무차별 살상을 자행했습니다. 심지어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가르고, 어린아이들을 벽에 때려서 죽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이 불에 타며 파괴되었고, 성전에 있는 거룩한 기구들이 약탈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의 온갖 보물들도 다 빼앗겼고, 나라는 백성을 지켜줄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겪으면서 수치와 고통으로 인해 찢어진 마음과 흐르는 눈물로 쓰인 책이 바로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1.   예레미야의 원망 (19-20)

 

예레미야는 자신의 조국, 특히 하나님이 택하신 곳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아주 심한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예레미야가 누구입니까? 40년 동안 유다를 향하여 눈물로 예언을 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하나님을 떠난 삶을 계속 살면 망할 것이라고 예언해 왔지만, 막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보니까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조금 전의 질문들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곳이 이토록 유린되고 파괴되는가?' '왜 이런 비극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유다에게 일어나는가?' '어떻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굶어죽거나 칼에 맞아 죽는 등, 이토록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가?’

 

물론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예레미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여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3장 처음부터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부터 죽 보면, ‘종일 나를 매로 때리는 자는 하나님이시다’(1, 3). ‘나를 어둠에 가둔 것도 하나님이시다’(2). ‘곰이나 사자 같이 자기를 갈기갈기 찢은 것도 하나님이시다’(10-11). ‘화살로 허리를 맞춘(심장을 뚫은) 것도 하나님이시다’(13). ‘쑥을 짠 쓴 물을 마시게 한 것도 하나님이시다’(15). ‘돌로 내 이를 쳐서 부러뜨린 것도 하나님이고’(16), ‘재로 나를 덮은 것도 하나님이시다’(16). ‘자신의 마음의 평강을 다 빼앗은 것도 하나님이시다’(17)라고 합니다.

 

지금 이 최악의 상황이 전부 다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주님께 두었던 희망이 다 사라졌다.’ 하고 탄식합니다(18).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도, 이렇듯 엄청난 고통과 비극 앞에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망의 마음이 그에게 낙심하는 마음을 주게 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19-20)

 

19절 끝에 기억하소서라는 말은 잘못된 번역이고, 원래는 기억합니다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19절은, 예레미야가 과거에 자기가 당한 그 쓰라린 고통과 재난을 결코 잊지 못하고 확실히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조국에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생생히 기억나서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감아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하니까 그 결과로 낙심이 된다고 말합니다(20).

 

이전에 상처 받았던 기억이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 마음이 답답하고 콕콕 찔리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겁니다. 그 모든 것이 이미 자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 상황이 자꾸만 기억나고 잊어버려지지 않으니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통스러운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날 때, 왜 그런지 그 답을 얻지 못해 괴로워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괴로운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찔리는 것 같이 느껴지고 굉장히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인생에는 다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죽은 사람만 고난이 없습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지 예외 없이 인생에는 어려움이 닥칩니다.

 

저는 이전에 교회에서 젊은 부부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들었습니다. ‘좋은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 ‘믿었는데 속았다.’ ‘배신당했다.’ 그러나 사실은 속은 것도, 배신당한 것도 아닙니다.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속은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모르셨습니까? 자기가 몰랐던 것뿐입니다. 그러니 속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배우자도 죄인이고 자기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기대치를 낮추고 서로서로 은혜로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도 원래 그런 곳입니다. 갑자기 악해지고 망가진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악인들이 많이 나오고 테러리스트들이 많이 나온 게 아닙니다. 옛날에는 더 끔찍했습니다. 인권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죄가 들어와 악해졌습니다. 그래서 악하고 불완전한 이 세상에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나 비극이 일어날 때 우리는 너무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당장은 괴롭고 힘들지만, 그러나 그 고통을 늘 기억하면서 주야로 고통을 묵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묵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소망과 위로를 얻지만, 고통을 묵상하면 낙심과 괴로움뿐입니다.

 

혹시 이전에 일어났던 안 좋은 일이 자꾸 내 마음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라는 겁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잘못하고 죄를 지은 것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죄를 고백했다면 이미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가 조금만 틈을 보여도, 자꾸만 이전에 저질렀던 죄악 된 모습들, 실패했던 일들, 해결되지 않은 인간관계들, 또 불편한 사람들이 자꾸 우리 머리에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런 것이 자꾸 기억나게 만들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주야로 묵상하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낙심하고 좌절하도록 만듭니다.

 

바로 그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야로 묵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무엇을 생각하는가가 중요하고, 그래서 말씀 묵상이 중요합니다. 마음속에 쓸데없는 것들이 떠오른다면, 즉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자꾸만 이 생각을 안 해야지, 안 해야지, 안 해야지!’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납니까? 바로 그 생각이 납니다. 그게 아니라 은혜로 그것들을 밀어내면 됩니다. 자꾸 은혜로 채우면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은 밀려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게는 힘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기억함 (21-26)

 

이처럼 완전히 낙심에 빠지고 소망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는데, 놀랍게도 예레미야가 갑자기 소망을 갖게 됩니다. 20절에 보면, 분명히 자신이 고난을 기억하며 낙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는 뭐라고 고백합니까?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1)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갑자기 낙심이 소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2-23)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22-23, 새번역)

 

지금 힘들고 비참한 상황이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어렵고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레미야가 갑자기 이런 전혀 다른 고백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그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고통스런 일들을 기억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을 주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사건들을 기억하니까 낙심이 되었는데,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21), 즉 곰곰이 그 의미를 생각해보았더니 오히려 소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일어난 비참한 일들과 현재의 상황만 기억하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셨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 하고 묻는 데서 그친다면, 마음이 답답하고 화도 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거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갔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슨 뜻인가를 물으며,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신 데에는 분명히 선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주님의 인자(한결같은 사랑)가 다함이 없고 그분의 긍휼이 끝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을 다시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봐도 상황은 똑같습니다. 여전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무서운 현실을 직면하기가 두려워 눈을 뜨기도 싫었던 아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성실하심이 크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레미야는 확신 가운데 믿음의 선언을 합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4-26)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기에, 주님께 나의 소망을 두고 그분을 기다릴 것이다’(24).

주님은 주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며 찾는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신다’(25).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26).

 

예레미야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뒤의 32-33절에서는 심지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32-33, 새번역)

 

어떻게 예레미야는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Yet this I call to mind).”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마음속으로 아주 깊이 고민하고 묵상하며 생각했습니다. 일어난 사실들만을 보거나 과거의 아픔들을 기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하는 말 중에 생각 좀 하며 삽시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그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비참한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보고 그대로 몸이 반응한 게 아니라 깊이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모두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조심하는 것 외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참 답답하고 불안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냥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답답해하고 또 원망하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 어려운 현실 때문에 마냥 괴로워하고 낙심하고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한 차원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서 이 사건을 하나님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위에서 내려보는 하나님의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다시 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냥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마음에 담아 두고 깊이 생각하며 재해석해서,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 주님께서 분명히 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신다.’ 이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겉만 보고 끝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재해석하여 보게 되면, 힘들고 괴로운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무궁한 자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스런 순간이 오히려 축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고백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우리가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알려줍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져도, 그 상황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고 알려줍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인자와 긍휼, 그리고 그분의 성실하심을 찬양하며 그 안에서 소망을 가지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라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오래 전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악기는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서 모진 풍파를 견뎌낸 나무의 북쪽 가지를 잘라서 사용해야 재질도 단단하고 그윽한 소리도 낸다.” 


의학계에 크게 공헌한 ‘606호 페니실린605 차례의 쓰라린 실패 뒤에 찾은 성공의 이름이다.” 


순도 99.9%의 정금이 나오기까지는 광산에서 캐낸 광석을 잘게 깨어서, 부수고, 씻고, 끓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 영국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스런 상황 가운데 소망을 발견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번 이 코로나19 사태의 어려운 현실은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었는가를 테스트하는 시간입니다. 지금 이 어려운 상황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재해석하며 고통 중에도 소망을 얻는 길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그저 불안해하고 원망하고 두려워하면서 안타까운 길로 나아가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나는 바이러스에 안 걸렸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 사태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엄청난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우리의 이웃을 돌아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부터가 정신이 없어서 사실 남들에게까지 마음을 쓸 여유가 많지 않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이 또 그리스도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헌금도 꾸준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우리 교회가 어려우니까 헌금해달라는 차원을 넘어서, 지금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때이기 때문에 우리도 거기에 마음을 모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돌보는 교회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물질과 시간과 지위 같은 것은, 나만 누리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이럴 때 더욱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영국 출신으로 유명한 여배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이 자녀에게 남겼다는 유언이 유명한데, 사실은 자기가 만든 말이 아니라 원래는 샘 레벤슨(Sam Levenson)이라는 사람의 시를 평소에 좋아해서, 그것을 읊은 것이 유언이 됐다고 합니다. 그 시의 제목은 “Time Tested Beauty Tips”(시간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매력적인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해라.

2)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아라.

3)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4)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다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해라.

5)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해라.

6)  물건들보다 사람들이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활기를 얻어야 하고, 깨우쳐져야 하고,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7)  누구도 내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을 기억해라. 도와야 하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서 그 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8)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너는 손이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손이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1993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녀에게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는데,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긴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지금 상황이 이렇게 어렵지만, 주님의 끝없는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것을 맛보며 주님의 성실하심이 크다고 날마다 찬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보다 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도 그러한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체험하게 될 수 있도록 먼저 기도하며, 또 그들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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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무엇이 중요한가요?" (미 6:1-8) - 김현철 목사 (2/16/2019) kpccoh 2020.02.16 981
249 "멜리데 섬에서 생긴 일" (행 28:1-1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9 (2/9/2019) kpccoh 2020.02.09 3186
248 "난파와 구조" (행 27:27-44)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8 (2/2/2019) kpccoh 2020.02.02 2036
247 "절체절명의 순간에 외친 소망의 선언" (행 27:13-26)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7 (1/26/2019) kpccoh 2020.01.26 2151
246 "드디어 로마를 향해 출발하다" (행 27:1-1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6 (1/19/2019) kpccoh 2020.01.19 2656
245 "당당한 죄수 앞에 당황한 권력자들" (행 26:24-3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5 (1/12/2019) kpccoh 2020.01.12 3043
244 "서로 격려하며 덕을 세우는 공동체" (살전 5:1-11) - 신년메시지/임직식 (01/05/2020) kpccoh 2020.01.05 1902
243 "다시 한 번 나누는 회심 및 사명 간증" (행 26:13-23)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4 (12/29/2019) kpccoh 2019.12.29 2206
242 "Christmas Is Celebration 성탄절은 축제다" (눅 2:8-14) - 성탄주일연합예배 (12/22/2019) kpccoh 2019.12.22 1900
241 "아그립바 앞에 선 바울" (행 25:1-1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3 (12/15/2019) kpccoh 2019.12.15 926
240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방문" (행 25:13-2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2 (12/08/2019) kpccoh 2019.12.08 4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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