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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1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91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다

(사도행전 2823~31)

 

[들어가는 말]

 

애틀랜타에 본사를 둔 코카콜라(Coca Cola) 회사를 지금처럼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사람은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oodruff, 1923-1954 회장 재직)였습니다. 그는 사업 비결을 물어보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유명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 몸의 혈관 속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다.” 


그 사람 안에 무슨 코카콜라가 흐르겠습니까? 그러나 얼마나 코카콜라에 대해 열정을 가졌으면 그렇게 표현했겠습니까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몸을 콕 찌르면 나오는 게 뭡니까? 혹시 나를 콕 찔렀더니 돈이 나오고, 명예가 나오고, 학벌이 나오고, 성공이 나오고, 승진이 나오고, 편안함이나 이기주의가 나오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콕 찌르면 무엇이 나왔겠습니까? 복음이 철철 흘러나오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툭 치면 복음이 줄줄 나오는, 속이 온통 복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은 한 교회에 부임하여 은퇴하실 때까지, 무려 134개월 동안 사도행전 하나만 가지고 주일예배 때 설교를 하시다 은퇴하셨습니다. 사도행전으로 연속설교를 하셨는데, 사도행전 설교를 마치는 날에 은퇴하고 교회를 떠나신 겁니다.

 

저는 2년 정도 걸렸으니까 빨리 한 편인데, 사도행전을 통해 정말 큰 은혜와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신약의 흐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바울이 쓴 편지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누구에게 주어졌는가를 더 잘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3사랑 장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말씀은 그저 사랑은 무엇인가 알아보는 수준으로 읽을 게 아니고, 그 사랑에 대한 말씀이 왜 거기 있느냐는 겁니다. 왜 다른 데는 안 나오는데 고린도전서에는 있는가?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사랑이 필요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갈라져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에베소서에 보면, 왜 바울이 영적 전쟁에 대해 다른 편지들에 안 나오는 말씀을 합니까? 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까? 왜냐하면 그곳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고 영적전쟁이 아주 치열했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이 편지가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 왜 이런 내용이 거기 들어가 있는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년 전에 시작했던 사도행전 강해가 오늘로서 끝납니다.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 오늘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바울의 복음 전파와 그에 대한 두 가지 반응 (23~29)

 

지난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가 불러서 그들에게 증언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3)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여기서 두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 나라이고, 그 다음은 예수님에 대한 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증언했는데, 그것을 다른 밀로 하면 예수님에 대한 일들을 설득해서 확신시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거나 성경을 가르친다고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그것뿐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일과 가르침을 다 포함하는 사도들의 메시지 역시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단을 왜 이단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지 않고 자기들의 나라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만 구원이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모두 볼 때 바로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 주제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전하신 핵심 메시지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 천국입니다.

 

어떤 주제를 아무리 멋지게 말하더라도, 신앙생활과 교회의 중심이나 그 어떤 것도 다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라는 복음의 핵심과 예수님의 구원을 위한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 저도 설교자로서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 말을 전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성경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나 교사뿐 아니라 우리 모두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모이지 않고 목회자만 교회당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모습을 인터넷으로 방송하며 예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유튜브(YouTube)나 인터넷 방송으로 설교를 듣기가 너무 쉽습니다. 웬만한 교회는 다 비디오로 녹화해서 영상을 올려 놓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듣는 것은 참 좋습니다. 열심을 갖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그렇게 다 듣겠습니까? 설교를 찾아서 듣는다는 것은 열심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내가 듣고 있는 설교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는가를 잘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진짜인가, 성경에 진짜 있는 건가를 잘 확인하며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의 증인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게 되고, 핵심이 빠진 설교를 들으니까 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종교적 교훈을 듣는 것일 수는 있지만, 복음 설교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일들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구약은 무시하고 신약만 강조한 건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은 구약성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은 당시 쓰이고 있으면서 돌고 있을 때지, 완성되려면 한참 멀었던 때였습니다.

 

바울은 구약(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내용과 복음이 연결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 즉 구원자가 바로 예수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23절에서는 그것을 모세의 율법과 선지지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했다고 말합니다. 즉 유대인들의 성경인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선지서 등 구약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조금 전 우리가 교독했던 교독문도 그 내용 중 나의 겉옷을 나누었다는 말이 시편 22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시편 22편은 다윗 때 쓰였으니까 대략 BC 1000년경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겉옷을 병사들이 나누었던 것이 이미 천 년 전에 예언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바울은 구약에 있는 내용들을 연결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했듯이 이무리 반대를 오랫동안 많이 받아도, 누군가가 우리에게 물어볼 때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겠습니다. 여기에는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거나 믿은 지 얼마 안 된 분들도 계시지만, 오래 믿은 분들도 계십니다. 저처럼 모태신앙이나 몇 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많으신데, 안 믿는 분이 와서 예수 믿는다는 게 뭘 믿는 겁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 줄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봐야겠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일수록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정말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까? 누가 물어보면 영화 <기생충> 줄거리는 줄줄 나오는데, 성경이 어떻고 복음이 어떤지 줄줄 나오는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준비가 안 되어 있고 부족하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부족하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부족함을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 공부를 제공하는 것이고, 말씀 묵상도 하시라고 매달 성경본문 표도 나누어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연구하고 공부해야 준비가 되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거나 즐거운 엔터테인먼트만 찾아서 살고 있으면 어떻게 복음에 대해 준비가 되겠습니까?

 

훈련 과정이 이렇게 있는데도 내가 안 해서 복음을 전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하나님 앞에 갈 때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기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 전체를 통해 복음을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제 금방 믿은 분들도 차곡차곡 준비를 해나가면서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가장 좋은 준비는 자기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전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어떻게 역사하셔서 이렇게 변화되었는가? 내가 이전에는 저랬는데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되었다. 어떻게 믿게 되었고 믿은 후에는 이렇게 변화되었다.’ 하는 것을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체험이 엉뚱한 체험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며, 동시에 말씀을 가지고 전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무리 사도 바울같이 위대한 주님의 종이자 사도가 복음을 전했어도 다 믿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 아니 오히려 반대가 아주 심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죽 볼 때 바울의 전도에 대한 반응은 대대 반반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이 소수일 때가 많았습니다.

 

참된 복음이 전파된다고 모든 사람이 거기에 잘 반응하여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말씀 앞에서는 둘로 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사실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괜히 전했다가 저 사람이 껄끄러워 하면 어떡하지?’ 그런데 그게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겁니다. 그걸 불편하게 여길 필요도 없고, 싫어하거나 거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복음을 전하지만, 사랑과 겸손의 태도로 전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전투적으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조차 반응이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네 가지 토양을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고, 시큰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도 그랬고, 아니 그 이전 선지자들이 전할 때도 그랬고, 사도들이 전할 때도 그랬고, 바울이 전할 때도 그랬고, 우리가 전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4-25)

 

그들은 바울의 이런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약 해석이 낯설고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24절에 나오는 것처럼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뉜 겁니다. 24절에서 믿는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원래 설득되어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논리적으로 설득이 되었지만, 일부 사림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설득되었다기보다는, 자기가 듣고서 , 이것이 정말 진리구나.’ 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겁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생명의 삶> 들으시는 분들에게 제가 늘 말씀드리는 건데, ‘믿음은 결정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이 다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 장로교 개혁 신학에서는 그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서 60~70% 정도는 진리이고 사실이라고 느끼며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제가 믿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고, 반면에 아이, 난 아직 이걸 믿지 못하겠다. 그걸 어떻게 믿는가?’라고 하며 믿지 않기로 결정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도 결정이고, 믿지 않는 것도 결정입니다. 이 두 가지 반응이 항상 나옵니다. 바울이 전했을 때도 믿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있었고, 믿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두 그룹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세상을 둘로 나눕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제시할 때 그 말이 옳다고 믿기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25절 맨 앞에 서로 맞지 않았다’, 즉 불일치하여 갈등이 발생해서 둘로 나뉜 채 이 자리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심지어 같은 집안 안에서도 사람들을 나뉘게 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0장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복음 앞에 믿는 사람과 믿지 않기로 결정하는 사람으로 나뉘어서 분리가 되는데, 그렇게 나뉘는 것은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서 바울은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사야를 통해서 오래 전에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도 바로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함으로써, 사도행전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동일한 성령이시라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복음 제시를 통해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들도 지금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6-27)

 

이 구절은 구약의 이사야 69-10절의 인용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인용한 게 아니라,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완악한 백성들에게 둔해져라, 눈이 멀어라혹은 눈을 감아라등의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헬리어 번역에서는 이미 벌어진 현상을 설명하듯이 그냥 서술형으로 해 놓은 것이 조금 다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하실 때도 이미 인용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이나 마태복음 13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듣기는 들어도 또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 히브리어 구약의 뉘앙스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 본문에서 바울은 복음을 듣고도 깨닫는 사람과 깨닫지 못하는 사람, 둘로 나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헬라어로 된 ‘70인역의 방식으로 인용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 27절에는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13:15)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가복음 4장에서는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4:12)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냥 들으면 이해가 안 갑니다. ‘아니, 하나님은 사람들이 듣고서 믿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닌가? 그런데 왜 듣고도 깨닫지 못해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왜 그러시나?’ 하며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들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귀를 막으시고서는 너 못 들었지? 그럼 너는 이제 멸망이다.’라고 하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게 막으시겠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나오는 복음서의 씨 뿌리는 비유의 앞뒤 문맥과, 오늘 사도행전 본문의 상황에서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려고 히는 것입니까? 그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서에서의 인용이나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인용한 것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주목하고 그것을 발견하면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란 위대한 일의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복음을 의도적으로 거절하는 사람들, 다 듣고도 자기가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제 영원한 맹인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올바르게 반응해서 회개하는 사람은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 없이 자동으로 구원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이 잘 믿으시니까 나도 자동으로 구원받았겠지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내 집안이 그러니까, 내 배우자가 잘 믿으니까, 내 자녀가 잘 믿으니까 구원받을 것이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또는 믿지는 않지만 군대에서 초코파이 준다고 해서 교회에 갔다가 마침 그날 머리를 내밀라고 내밀었더니 물을 뿌려주고 ,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라고 엉겹결에 세례를 받았는데 전혀 믿지 않는다면, 세례를 받았으니까 구원받은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자신이 복음을 듣고 복음 앞에 스스로 결단을 하고 자기 마음을 주님 앞에 드릴 때 진정한 구원이 임한다는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들의 이런 반응에 따라 복음의 물결은 이제 어디로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까?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8)

 

이 모든 사건을 통해 복음의 큰 물줄기,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제 이방인을 향해 방향이 전환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밝힙니다. 물론 이전에도 항상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거부할 때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전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주님께서 바울을 로마에 보내신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활짝 열어 놓으셨지만, 그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다.’라고 하며 폐쇄적으로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사도들 특히 바울을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지만, 반대로 이방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즉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을 것임을 대조시킵니다. 그것은 이미 또 다른 구약의 예언자인 에스겔 3장에 예언된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언을 할 때 바울의 마음이 어땠을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로마서에도 나와 있지만, 바울은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을 너무도 사랑합니다. 그래서 한 번도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그친 적이 없습니다. 자신부터가 유대교에 심취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잘못되었다고 하며 잡아 죽이겠다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 생각했고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처럼 잘못 가고 있는 동족을 어떻게든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그랬고 186절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대적하고 비방하니까 바울은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느 곳에 기든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유대인들에게 또한 경건한 이방인들과 유대교 개종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결코 오해하면 안 되는 게, 바울이 이방인에게만 복음을 전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 어떤 사람들 안에 그런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만 좋아한다. 이방인에게만 복음을 전한다. 우리 유대인들을 싫어한다. 자기 동족을 배신했다.’라고 했는데, 절대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점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로마서에서 그런 내용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최선을 다해 복음을 강론했지만 결국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거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방인에게 가서 하나님의 큰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확인하며 밝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는 유대인들인 옛 이스라엘이 아니라 새 이스라엘, 진짜 이스라엘, 즉 교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신약교회이며 옛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또는 감정적인 결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오셨던 커다란 구원 드라마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11:25-26a)

 

결국 자기 동족도 언젠가 믿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바울은 놓지 않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커다란 드라마 속에서 예수님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라고 하신 것이고(28:18-20),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1:8) 하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결론은 마태복음 2818~20절인 소위 대 사명입니다. 그와 같이 이 사도행전 2828절이 사도행전의 결론 역할을 합니다. 구원 역사로 볼 때 바로 이것이 최고 절정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흐름을 볼 줄 아는 눈을 길러야겠습니다. 가끔 보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기가 막히게 알고, 드라마나 영화의 줄거리 흐름은 기가 막히게 알고, 돈 냄새는 아주 기가 막히게 맡는데,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은 전혀 모른다면 이것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결국 사도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이 여기서 확증되고, 복음이 비로소 이방인들에게 더 힘차게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토록 험한 길을 지나 로마에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 사도행전 28장 사건을 통해 이방인 선교라는 새로운 장이 시작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이방인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해왔지만, 이제는 바울만 아니라 온 교회가 더욱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유대인들을 제외한 모든 세상 사람들이 이방인이고 우리도 이방인인데, 그 덕분에 우리에게까지도 복음이 전해지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돌아보면 바울은 황제에게 재판 받기 위해 로마에 죄수로 와서 2년 넘게 가택 연금이 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로마는 당시 세상의 중심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로마가 땅 끝입니다.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주님 앞에 돌이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그들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부함에 따라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또 앞으로 교회를 통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계속 전해질 수 있는 계기를 여기서 만드셨습니다.

 

 

2.   자신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바울 (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30-31)

 

복음은 이렇게 유대인에게서 이방 모든 민족들에게로, 예루살렘에서 세계로 나가게 되었음을 선언함으로 사도행전이 마무리됩니다. 30-31절은 그 사실에 대한 결론이고, 사도행전을 교향곡으로 비유할 때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두 해 동안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함으로써 이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명(22:21)을 성실히 수행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전했고, 그들이 거부했을 때 이방인들에게 열심히 전했습니다. 복음의 사도로서 사명을 수행하는 사역을 어떻게 했는지를 30-31절이 잘 보여주고, 앞의 23절과 같이 보면서 종합해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23절에서는 바울의 복음 사역을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했다고 표현합니다. 이때 강론했다는 말은 요즘말로 하면 강해했다’(영어로 exposition한 것)는 것입니다. 강론 혹은 강해를 한 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는 것이 23절 뒷부분에 나오는 두 개의 단어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한 것, 둘째는 예수에 대하여 권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 것은 복음을 선포한 증거사역이고, 예수에 대하여 권한 것은 자세히 설명하면서 설득을 한 겁니다.

 

이 두 가지는 바로 지금도 교회에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것이 설교이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는 것이 바로 성경공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설교도 하고 삶 공부도 하는 겁니다. 31절에서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 것,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강해(또는 강론)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거나 전파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잘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요즘 말하는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의 핵심입니다.

 

저희가 추구하는 방향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가 그 80년대에 강해설교 세미나를 주최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존경받는 분이셨는데 강해설교를 계속 하셨습니다. 한 책을 가지고 죽 연속설교를 하는 겁니다. 물론 중간 중간 주제별 강해설교도 하셨습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예수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제대로 드러내고 증언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설득하고, 실제 삶에서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강해설교의 핵심입니다.

 

성경 본문을 하나 잡아놓고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단어를 하나 잡아서 설명하거나, 윤리적 교훈으로 일관하는 것도 설교는 설교이지만 강해설교는 아닙니다. 그런 것이 필요할 때는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만 해서는 정말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예수님의 일을 설명하며 설득하는 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그 당시 땅 끝이라고 여겨지던 동시에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겨지던 로마로 보내시고 이제 새 이스라엘을 이루는 길로 나갈 수 있도록 구원의 복음을 강해(강론)하게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는 이제 어떤 방해도 소용없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전진해 나아갈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31절에서 보는 것처럼, 이제는 유대인들이 아무리 박해하거나 방해해도 더 이상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막을 수 없게 된 겁니다. 나중에 바울도 그렇고,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은 다 복음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제가 어떤 분과 교제하다가 그분이 최근에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 영화를 보고 바울이 마지막에 한 말이 인상 깊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람은 자기가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잘 모르는 것이나 100%가 아닌 것에 생명을 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복음은 진짜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거기에 바쳐도 아깝지 않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바울과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제는 핍박을 받고 쫓겨나서 다른 곳으로 갈 필요 없이, 로마에 갇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니까 거기서 복음을 전하면 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사람들은 2년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거부하지 않고 성실하게 듣는 역사가 일어난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복음의 새 물결 속에서 바울은 이처럼 담대하게 거침없이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누구에게든지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고 예수님의 일을 설명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바울은 바로 이 로마 감옥에 갇힌 기간 중에 쓴 네 개의 편지 중 하나인 빌립보서, 즉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고 아껴주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쓴 빌립보서에서 그것을 암시해줍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1:13, )

 

로마 군대의 핵심이며 황제도 그 안에서 나오던 친위대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밖의 모든 사람, 즉 수많은 로마 귀족들 심지어 왕족들 집안에도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특히 황제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4:22, )

무슨 말입니까? 그 당시 황제는 네로인데, 심지어 네로의 친인척 가운데 몇몇 사람들도 복음을 듣고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울은 갇혀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이 찾아와서 복음을 듣고 변하는 역사가 일어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확신을 가져야겠습니다. 어떤 것도 복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개인을 막을 수는 있지만 복음은 막을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당연히 방해가 있습니다. 당연히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나를 거부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계속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인도해주십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땅 끝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세상의 가장 중심인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방 세계의 중심이며 세상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개역개정 성경에는 30절에 온 이태(2)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했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 NRSVESV에 보면 “at his own expense”(자신의 돈으로)라고 했고, NIV에는 “in his own rented house”(자신이 렌트한 집에서)라고 풀어 번역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로마 당국의 감옥 밖에 있는 가택에 연금된 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감옥이 꽉꽉 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죄가 거의 없거나 가벼운 사람들은 밖에 가택연금을 했습니다. 거기서 정확히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일정 소득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같은 곳에서 계속 선교헌금을 보내준 겁니다. 그런 선교헌금을 통해 집세를 내고 손님들을 대접할 비용을 스스로 충당하고 지불해가면서 복음을 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바이러스 하나가 들어와서 모든 것이 다 스톱됐습니다. 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즐기던 영화관에 갈 수도 없고, 심지어 교회에 갈 수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이 있습니다. 회사들도 당분간 못 오게 하고, 출장도 못 가게 합니다. 갔다 와도 2주 동안 격리됩니다. 한국은 점점 더 그렇습니다. 한국에 가시면 가셔서 당분간은 돌아오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앞으로는 여기서 나가는 것도 제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매일매일 열심히 산 것이, 바이러스 하나가 탁 들어오니까 별 의미가 없어졌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뭐가 하나 들어와 다 스톱되니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저 조금 더 잘 먹고, 더 좋은 집에 살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옷을 입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건 아닌가? 열심히 사는 건 좋은데 목적이 뭐냐는 겁니다. 그저 단지 자녀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고 편하게 살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은퇴 후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하고 싶어서입니까? 지금은 여행도 못 갑니다. 갔다 와도 큰일입니다.

 

우리가 일하고 돈 벌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정말로 말년에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살고 노년에 즐겁고 편하게 지내다가 가는 것이 정말로 행복할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면 그런 삶이 정말 영광스러운 삶일까?

 

바울은 당시 세상의 중심이면서도 당시 유대인들이 땅 끝으로 여기던 로마까지 가서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삶을 마쳤습니다.

 

오스 기네스(Os Guinness)라는 분이 오래 전 쓴 책 중에 <소명(The Call)>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직업이 끝나는 것과 소명이 끝나는 것을 혼동하지 말라고 합니다. 직업에서는 은퇴할 수 있지만, 즉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다가 은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서는 은퇴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정신입니다.

 

그리고 기네스는 윌리엄 드레이크 경의 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성공회 기도문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일을 계속하여 끝날 때까지 하는 것이다.” 성실함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나가는 말]

 

이제 길고 길었던 사도행전 강해가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래서 바울이 언제 황제의 법정에 선 건가,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됐는가, 또 어떻게 그 후 잠시 풀려나서 이방인들이 알던 땅 끝인 스페인까지 갔는가, 아니면 소아시아로 도로 갔는가, 또는 어떻게 순교했는가, 이런 것이 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은 사도행전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역사가로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기록한 신학자에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누가가 쓴 것을 보면 아주 정교하고 놀랍게 썼습니다.

 

사도행전의 관심은 오직 복음의 증인인 사도들에게 나와 복음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았고, 사도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히 거침없이 가르침으로써, 이제 어떤 방해도 소용없이 복음이 땅 끝까지 나아가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행전을 시작할 때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주셨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1:8) 하신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과 그 물결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 이 강력한 물결에 저와 여러분 모두 동참할 것을 사도행전 28장은 조용하게 그러나 강한 목소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 초청에 대해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는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 반응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사도행전 29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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